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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 Eponine Jan 06. 2022

10월을 위한 영화 31편 01

1일-3일: 삶의 끝에서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한기 속에 외로이 서 있고, 모든 생명이 추위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겨울인데도, 왠지 겨울보다는 가을이 주는 쓸쓸함과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겨울 뒤엔 봄이 기다리고 있지만, 가을 뒤엔 겨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어쩌면 겨울보다는 가을이 더 '끝'과 어울리는 것 같다.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죽음'. 우리 모두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가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걸 망각한 채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죽음'이라는 단어를 일깨우는 사건들을 만나며 삶의 의미와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삶의 불확실성 앞에 우리는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지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는 온전히 우리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여기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스스로 삶을 마치고자 하고, 누군가는 막을 수 없이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주인공 들인 만큼 전체적인 분위기가 암울하기는 하지만, 주인공의 심리에 너무 매몰되지는 말자.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있는 삶을 기억하고 그 삶이 선사할 환희를 기대하자.


노킹 온 헤븐스 도어 Konckin' on Heaven's Door, 1997


감독 토마스 얀 Thomas Jahn

각본 토마스 얀 Thomas Jahn, 틸 슈바이거 Til Schweiger

출연 틸 슈바이거 Til Schweiger, 얀 요세프 리퍼스 Jan Josef Liefers, 티에리 판 베르베케 Thierry van Werveke, 모리츠 블라입트로이 Moritz Bleibtreu

기차 안에서 잠깐 마주쳤던 루디와 마틴은 한 병원의 병실에서 다시 조우하게 된다. 루디는 혈액암으로, 마틴은 뇌종양으로 삶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우연히 병실에 있던 데낄라 한 병을 발견하고는 소금과 레몬을 찾으러 병원 식당에 내려가 둘만의 파티를 가진다. 그러던 중 루디는 바다를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고, 마틴은 천국에 가면 모두들 바다의 아름다움과 바다에서 바라본 석양만을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한편, 보스에게 차를 몰고 가서 마당에 세운 후 열쇠를 주고 오되, 중간에 결코 차에서 내리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갱단의 멤버 헹크와 압둘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인해 병원에 들리게 된다. 같은 병원에 있던 루디와 마틴은 술에 잔뜩 취한 채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한 대 골라 타고 병원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헹크와 압둘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를 보며 자신들의 차를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음날 차 안에서 맨 정신으로 깨어난 루디와 마틴은 바다를 보기 위해 모험을 감행하고, 차를 도둑맞은 헹크와 압둘은 이들을 찾아 나선다.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두 사람, 루디와 마틴. 바다를 보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무모한 여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에 갱단의 멤버라고 하기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헹크와 압둘이 가세한다. 쫓기는 두 사람과 쫓는 두 사람 사이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이를 통해 영화는 루디와 마틴의 상태를 잊게 만든다. 그렇게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코믹함을 잃지 않는다. 슬픔이나 눈물은 어차피 맞이해야 할 그 순간을 위해 아껴두라는 듯. 어차피 갈 곳이라면 가는 동안이라도 즐겁자고.


미 비포 유 Me Before You, 2016


감독 테아 샤록 Thea Sharrock

각본 조조 모예스 Jojo Moyes

출연 에밀리아 클라크 Emilia Clarke, 샘 클라플린 Sam Claflin, 재닛 맥티어 Janet McTeer, 찰스 단스 Charles Dance, 바네사 커비 Vanessa Kirby, 제나 콜먼 Jenna Coleman

루이자는 6년 동안 일한 카페에서 퇴사 통보를 받게 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직업 알선 센터에 갔다가 간병인 자리를 찾게 된다. 한때 잘 나갔던 금융맨이자 스포츠 마니아였던 윌 트레이너의 간병을 맡게 된 것이다. 윌은 몇 년 전 빗속에서 달려오던 오토바이에 치이는 사고로 인해 목 아래로 마비가 되었고, 간신히 손가락 정도를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다. 자신의 변화된 삶에 적응할 수 없었던 윌은 새로 온 간병인에게도 냉정함을 한껏 내뿜는다. 그러나 루이자는 그녀가 입은 옷만큼이나 재기 발랄한 인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윌 또한 루이자의 따스함에 익숙해져 간다. 또한 꿈을 가지고 있지만, 그 꿈을 펼칠 생각을 못하고 있는 루이자에게 윌은 지루한 이곳을 떠나라며 그녀를 격려하기도 한다.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는 가운데, 루이자는 윌의 부모님이 다투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고, 윌이 안락사를 결정하였으며, 그때까지 부모님께 6개월의 유예기간을 주었음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영화는 조조 모예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꿈은 있지만, 그 꿈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작은 마을에 갇혀 살아가는 루와,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교통사고로 인해 얻게 된, 이전과는 180도 다른 새 삶에 적응할 수 없었던 윌이 만난다. 윌의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결코 겹치지 않았을 것 같은 두 사람의 세계가 그렇게 맞닿는다. 수다스럽고 사랑스럽고 따뜻한 루의 곁에서 윌은 그동안 잃어버리고 살았던 웃음과 기쁨을 되찾지만, 그렇게 루와 가까워질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안락사'라는 매우 민감하고 논쟁적인 소재를 가지고 전개되는 이야기라, 루와 윌의 사랑에 마냥 웃기만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안락사에 대해서 한 번쯤은 깊이 고민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영화이다. 단 한 번도 안락사 허용에 대해 폭넓은 시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걸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 없는 내 인생 My Life Without Me, 2003


감독 이자벨 크와셰 Isabel Coixet

각본 이자벨 크와셰 Isabel Coixet

출연 사라 폴리 Sarah Polley, 스캇 스피드먼 Scott Speedman, 마크 러팔로 Mark Ruffalo, 레오노르 와틀링 Leonor Watling

23살의 앤은 17살에 지금의 남편 돈을 만나 첫 아이를 낳았고, 현재는 엄마네 집 뒤뜰의 트레일러에서 남편, 그리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남편 돈은 불규칙적인 공사 일을 하고, 앤은 대학교 야간 청소 작업을 한다. 그렇게 소소한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앤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다. 그리고 난소암 판정을 받는다. 살 날이 2달 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그녀는 자신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목록을 만들기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더 많이 말해주기, 아이들이 18살이 될 때까지 매해 생일에 들을 수 있는 메시지 녹음하기, 남편에게 좋은 여자 찾아주기, 남편이 아닌 남자와 잠자리해보고 어떤지 알아보기, 감옥에 있는 아버지 찾아가기 등. 그리고 그렇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나하나 해 나가던 중, 리를 만나게 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 벌어진 일에 책임을 지며 살아온 앤의 삶. 그런 삶이 별로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임지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아니까. 그렇지만 그러한 그녀의 삶이 안쓰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녀가 살아온 삶이 'My life without me'였고, 그녀가 죽은 뒤의 삶 또한 'My life without me'이기에. 사라 폴리의 창백한 얼굴 위로 영화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이 영화는 나에게 배우 '마크 러팔로'를 처음 각인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앤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그의 품이, 그리고 그의 얼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땐 지금처럼 주목받는 대스타가 될 줄은 몰랐는데... 왠지 나만 알고 있던 보물을 뺏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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