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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 Eponine Jan 12. 2022

10월을 위한 영화 31편 02

4일-6일: Douglas Sirk

왠지 모르게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더글라스 서크 감독의 멜로드라마들이 생각난다. 지금 보면 너무 닳고 닳아 낡아빠진 소재들처럼 느껴지지만, 진부하다는 건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의미도 될 수 있으니까. 낯설고 당황스러운 감정들보다는 그런 진부한 소재에서 느껴지는 매우 오래되고 익숙한 감정들이  더 그리워지는 계절이 가을 아니던가. 

1897년, 독일에서 태어난 더글라스 서크 감독은 자국에서 무대와 영화를 오가며 감독 경력을 쌓아나가다 1937년,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1950년대, 그를 대표하는 멜로드라마들이 꽃을 피운다. 그의 영화들은 상영 당시, 흥행에는 매우 성공했지만, 평론가들에게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라며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유럽에서 그의 영화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며 현재는, 진부한 이야기 뒤에 감춰진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을 드러낸 영화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순정에 맺은 사랑 All That Heaven Allows, 1955


감독 더글라스 서크 Douglas Sirk

각본 페기 톰슨 Peggy Thompson

출연 록 허드슨 Rock Hudson, 제인 와이먼 Jane Wyman

캐리는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스토닝엄 저택에 살고 있다. 그녀가 하는 일은 친구들과 차를 마시거나 친구들의 저녁 파티에 초대받는 것, 그리고 컨트리클럽에 가는 것, 주말에는 대학교에 간 두 아이가 집에 오길 기다리는 것 외에는 별로 없다. 어느 가을날, 그녀는 점심식사에 초대한 친구가 약속을 취소하게 되자, 정원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러 온 론에게 함께 차를 마시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게 되고, 이후 론의 제안으로 그가 키우는 나무들을 보러 함께 그가 사는 곳에 가게 된다. 세속적인 삶을 떠나 자연 안에서 자족하며 사는 론의 모습은 캐리의 마음을 흔든다. 캐리는 그렇게 그가 속한 세계에 점점 발을 들이고,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제 론이 캐리의 세상으로 들어갈 차례. 그러나 캐리가 속한 세상은 편견과 가십과 오만으로 가득한 곳. 두 사람에 대한 괴소문이 곧 동네에 퍼지고, 캐리는 결국 론과 헤어지기로 마음먹는다.


생각해보면 놀랍다. 미국에서는 50년대에 이미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가진 것 없이 그저 자연과 함께 자족하는 삶을 사는 연하의 남자와, 부자이며 파티에 다니며 딱히 집안을 돌보는 일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연상의 미망인이 결혼을 하려고 한다. 그러다 이런저런 사람들의 말과 자녀들의 억지로 헤어지지만, 결국은 그들이 들이댔던 억지 핑계들로부터 도망쳐 나와 다시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동시대에 개봉했다면 굉장히 센세이션이었을 것 같은 이야기.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밀 방앗간도 매우 인상적이다. 론이 캐리를 위해 개조한 두 사람의 공간에는 따뜻한 벽난로, 이와 대조되는 눈 쌓인 바깥을 그대로 보여주는 전면 창이 있어, 자연 속의 따스함을 느끼게 해 준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그림으로 남는다. 토드 헤인즈의 영화 '파 프럼 헤븐 Far From Heaven'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바람에 쓴 편지 Written on the Wind, 1956


감독 더글라스 서크 Douglas Sirk

각본 조지 주커먼 George Zuckerman

출연 록 허드슨 Rock Hudson, 로렌 바콜 Lauren Bacall, 로버트 스택 Robert Stack, 도로시 말론 Dorothy Malone

노란색 스포츠카가 한적한 도로 위를 질주한다. 차 안의 남자는 술을 마시며 위태로운 모습으로 어딘가로 달려가는 중이다. 차는 해들리 석유회사를 지나 한 저택에 도착한다. 그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후 총성이 들린다. 영화는 1956년 11월 6일의 현재에서 1955년 10월 24일로 돌아간다. 석유 부자인 해들리가의 아들 카일은 어려서부터 친구인 미치와 같이 자랐다. 카일의 아버지는 똑똑한 미치를 아들인 카일보다 더 신뢰하며 살았고 카일은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열등감만 키워갔다. 매일 술과 여자들 사이를 오가며 살던 카일은 어느 날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루시를 만나게 되고, 루시가 자신이 평소 만나던 여자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그녀와 결혼한다. 한편, 어려서부터 미치를 좋아했던 카일의 동생 메릴리는 여전히 그를 마음 깊이 사랑하지만, 어른이 된 미치는 메릴리를 동생 이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미치에게 반항하는 마음으로 그녀는 아무 남자와 쉽게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술도 멀리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카일은 자신이 아버지가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방황을 시작하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루시 또한 걱정에 빠진다. 그리고 오랫동안 루시를 향한 마음을 숨기고 있던 미치는 회사를 떠나 이란으로 가고자 하고, 어떻게 해도 미치의 마음을 가질 수 없던 메릴리 또한 방황을 계속한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남자, 곁에서 그 열등감을 상쇄해주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하는 완벽한 남자, 그리고 그런 남자가 너무 좋기만 한 또 다른 여자. 얽히고설킨 네 사람의 이야기가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이지만, 56년의 이야기라 생각하고 본다면 진부함이나 클리셰 보다는 그 진부함에 어울리는 영화의 분위기에 먼저 매료되어 버린다. 특히나 열등감에 사로잡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분노를 표출하는 로버트 스택의 얼굴이, 질투에 사로잡혀 법정에서 거짓 진술을 하다 결국은 진실을 얘기하고 마는 메릴리의 대사가 마음을 툭 건드린다.


슬픔은 그대 가슴에 Imatation of Life, 1959


감독 더글라스 서크 Douglas Sirk

각본 엘리노어 그리핀 Eleanore Griffin, 앨런 스캇 Allan Scott

출연 라나 터너 Lana Turner, 존 개빈 John Gavin, 샌드라 디 Sandra Dee, 후아니타 무어 Juanita Moore, 수잔 코너 Susan Kohner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는 해변. 로라는 딸 수지를 찾아 헤매다 애니와 그녀의 딸 사라 제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사진작가인 스티브도. 남편과 사별 후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린 딸과 함께 뉴욕에 온 로라는 갈 곳이 없는 애니와 사라 제인을 자신의 집에 들이고, 애니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바쁜 로라를 대신해 집안일을 하며 아이들을 키운다. 그렇게 수지와 함께 자라게 된 사라 제인. 그녀는 흑인인 엄마 애니보다는 백인이었던 아버지를 닮아 피부가 하얗고, 그래서 모멸감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흑인의 삶보다는 백인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편, 해변에서 만났던 스티브는 그때 찍었던 아이들의 사진을 가지고 로라의 집을 방문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데이트를 시작한다. 그리고 스티브가 청혼 한 날, 로라는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에이전시 대표의 전화를 받고 그의 청혼을 거절하게 된다. 이후 로라는 연극배우로 승승장구하고, 두 아이는 어른이 되어간다. 그리고 애니는 마음의 병이 깊어간다.


영화를 보고 난 후 한참을 생각했다. 왜 제목이 'Imitation of Life'일까? 흑인의 정체성은 버리고 백인으로 살려고 하는 애니의 딸, 사라 제인을 보면 그녀의 삶이 가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 영화가 사라 제인을 축으로 돌아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게는 로라와 애니, 두 여인의 삶이 더 크게 다가왔다. 꿈을 좇았고 그 꿈을 이루었지만, 딸아이의 마음조차 모르는 엄마가 된 로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딸아이를 키우고 사랑했지만,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애니. 화려한 삶을 살았던 배우도, 소박한 삶을 살았던 평범한 사람도 그저 탄생과 죽음으로 연결된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가는 작고 연약한 존재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쓸쓸해지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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