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31일: 사랑에는 힘이 있다
뮤지컬 '하데스타운'을 본 적이 있다. 봄을 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할 만큼 황량하고 음습한 세상 가운데 에우리디케와 오르페우스가 만난다. 신화의 이야기와 같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노래가 완성되면 봄이 올 거라며 아름다운 멜로디를 읊조린다. 그 사이 에우리디케는 하데스를 따라 지옥에 내려가고, 그런 그녀를 구하러 오르페우스는 길을 나선다. 그리고 익히 알려진 결말과 같이 그는 결국 그녀를 구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다시 시작된다. 황량한 세상에 남겨진 작은 소녀 에우리디케와 봄을 기다리며 멜로디를 읊조리는 오르페우스가 다시 만난다. 결과가 뻔하더라도, 실패가 눈에 보일지라도 그들은 다시 만나고, 다시 사랑한다. 사랑에는 그런 힘이 있다.
우울하고, 슬프고, 냉혹한 현실에 대한 영화들 끝에 사랑 이야기로 돌아왔다. 가을이 우울함을 즐기기에 좋은 계절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우울함으로 마무리하기엔 삶이 너무 아쉬우니까. 삶에서 사랑보다 더 큰 게 뭐가 있겠나. 뭐니 뭐니 해도 결국은 사랑이지.
감독 레오 맥커리 Leo McCarey
각본 델머 데이비스 Delmer Daves, 레오 맥커리 Leo McCarey
출연 데보라 커 Deborah Kerr, 캐리 그랜트 Cary Grant
니키 페렌테는 살면서 한 번도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는 유명한 플레이보이다. 어느 날, 그가 600만 달러의 재산을 소유한 미국인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 세계 방송을 타던 때, 니키는 유럽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배를 탄다. 유명인사인 니키는 배 안 모든 승객들의 관심대상이 된다. 한편 홀로 여행을 하고 뉴욕으로 돌아가는 배에 오른 테리는 니키가 잃어버린 담배 케이스를 우연히 그에게 돌려주게 되고, 두 사람은 그렇게 배 안에서 대화를 이어가며 가까워진다. 연인이 있던 니키와 마찬가지로 테리 또한 연인이 있었기에, 두 사람을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그녀는 불편함을 느끼고 그와 거리를 두기도 한다. 그러다 배가 잠시 정박을 하는 동안, 니키는 테리를 데리고 그의 할머니 댁에 방문한다. 그곳에서 테리는 니키가 그린 그림을 발견하고, 그가 그림에 열정과 재능이 있었지만,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는 할머니 댁에 방문한 이후 그에 대해 더 마음을 열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은 1월 1일 아침, 6개월 후인 7월 1일 오후 5시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102층에서 만나기로 한다. 니키는 테리와의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돈을 벌기로 하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테리 또한 연인인 켄을 떠나 다시 나이트클럽 가수로 돌아가 일한다. 그리고 7월 1일, 두 사람은 설렘과 기대를 안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향한다.
이 이야기는 데보라 커와 캐리 그랜트 보다는 워렌 비티와 아네트 베닝의 리메이크로 더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 자체보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으로 더 유명할지도 모르겠다.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게 만드는 그 피아노 멜로디와 허밍 말이다. 사실, 그 음악 하나만으로 이 이야기가 모두 전달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역대급 바람둥이가 운명의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 여인을 향한 순애보를 이어간다는 설정은 진부하기도 하거니와 현실성도 없어서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확실히 영화란 그것을 어떻게 풀어내느냐로 그 모든 클리셰를 상쇄시킬 수 있다. 누가 연기하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어떤 분위기로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진부하고, 지루하다는 생각은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 이미 여러 번 보기도 했고, 진부하다고 할 만큼 수없이 회자되었던 내용이라 예상 가능한 엔딩에 도달하는데도, 꼭 마지막 장면에 가서는 어김없이 눈물이 나온다. 이런 게 고전의 힘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랑이라면 바람둥이도 고쳐쓸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영화이기도.
감독 자크 오디아르 Jacques Audiard
각본 자크 오디아르 Jacques Audiard, 토마 비더갱 Thomas Bidegain
출연 마리옹 코티야르 Marion Cotillard, 마티아스 스콘아츠 Matthias Schoenaerts
무일푼의 알리는 어린 아들 샘을 데리고 남부 프랑스에 있는 누나에게 향한다. 마트 계산대의 점원으로 일하는 누나네 집에 얹혀살게 된 알리는 나이트클럽의 바운서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간다. 어느 날, 그는 나이트클럽 앞에서 남자와 싸움이 붙은 스테파니를 도와주게 되고, 남자에게 맞아 엉망이 된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집에 도착한 스테파니는 동거 중인 남자 친구와 말다툼을 벌이고, 알리는 만일을 대비해 그녀에게 연락처를 주고 나온다. 마린파크에서 범고래 조련사로 일하고 있던 스테파니는 얼마 후 공연 도중 불의의 사고로 두 다리를 잃게 되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괴로워한다. 알리는 마트의 야간 경비를 서던 중 직원들을 몰래 감시하기 위해 카메라를 설치하러 온 사람을 만나고, 그로부터 격투기 경기에 대한 정보를 얻고 불법 도박 격투기에 참여하기로 한다. 그 사이, 스테파니는 알리가 남겨놓고 간 연락처로 전화를 하고, 그는 그녀의 집에 방문한다. 그동안 집 안에만 갇혀있던 그녀에게 알리는 수영을 하고 싶다며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알리를 지켜보던 스테파니 또한 바다에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느끼고, 알리는 그녀를 업고 바다에 들어간다. 그날 바다에서 자유롭게 수영을 하던 그 순간 스테파니는 오랜만에 좋은 기분을 만끽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가까워진다.
영화 'God's Own Country'를 보았을 때, 이 영화가 떠올랐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무시한 채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누군가를 통해 그것을 고백하게 된다는 맥락에서 두 영화가 참 닮았다고 생각했다. 알리는 좀처럼 긍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여자와 섹스를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전화통화를 한다. 그에게 그것은 그저 어떠한 행위일 뿐이지 감정의 교환은 아닌 것이다. 그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는 불법 도박 격투기를 하며 돈을 번다. 피가 튀고 이가 나가고 얼굴과 몸에 멍이 드는 그 과정을 반복하며 돈을 번다. 스테파니는 자신의 몸을 자신 있게 드러낸다. 그러나 사고 후 그 모습은 정반대가 되고, 그러한 자신의 몸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알리와 스테파니의 관계는 서서히 발전한다. 그저 시간을 함께하는 친구에서 의미 없는 섹스를 하는 파트너가 되고, 그렇게 애써 배제했던 감정을 끌어들이며 갈등 가운데 놓이기도 한다. 그렇게 모호한 관계 속에 놓여있던 두 사람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괴로움 앞에 선 알리는 그제야 마침내 '사랑'이라는 감정을 쏟아놓는다. 어느 누구도 사랑의 둘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이 사람을 지탱하겠는가.
감독 머빈 르로이 Mervyn LeRoy
각본 클로딘 웨스트 Claudine West, 조지 프뢰셸 George Froeschel, 아서 윔퍼리스 Arthur Wimperis
출연 로널드 콜먼 Ronald Colman, 그리어 가슨 Greer Garson, 수잔 피터스 Susan Peters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독일에서 부상당한 채 발견되어 영국의 멜브릿지의 시설로 오게 된 존 스미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말까지 더듬는다. 그러다 종전 소식이 전해지고 마을 전체가 기쁨에 들뜬 가운데 그는 몰래 시설을 빠져나와 담배가게에 들어간다. 가게 주인은 그가 시설을 탈출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신고를 하려고 하고, 옆에 있던 손님은 이를 눈치채고 그를 데리고 급하게 가게를 빠져나온다. 그를 데리고 나온 폴라는 자신의 쇼가 있는 극장으로 그를 데려가고, 그에게 분장실 앞 좌석까지 마련해 준다. 그러나 그는 공연을 보던 중 쓰러지고, 폴라는 그런 그를 잘 보살펴 준다. 폴라는 공연팀에 얘기해 그를 공연 스태프로 일할 수 있게 해 주고, 멜리브릿지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려고 준비한다. 그러나 폴라의 매니저가 스미스가 시설을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신고하려고 하자, 두 사람은 몰래 빠져나와 기차를 타고 데번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스미스는 리버풀에 있는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며 돈을 번다. 두 사람에 사이에 첫 아이가 태어나고, 스미스는 신문사로부터 일자리를 제안받는다. 면접을 보러 리버풀로 간 스미스. 그러나 길을 건너던 중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다행히 약간의 혹을 얻은 채 멀쩡히 깨어나긴 했지만, 그의 기억은 세계대전의 전장에 머물러 있고, 그 후의 일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 이야기의 소재는 '기억상실증'이다. 소재만 보아도 왠지 신파일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의외로 영화는 침착하게 흘러간다. 오늘날에는 너무 많이 반복된 이야기여서 모든 것들이 클리셰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스미스가 자신의 집에 찾아가 가족들을 만나고, 수년이 흘러 사업가가 되었을 때 폴라가 아무렇지 않게 비서로 등장하는 장면은 마치 스릴러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놀랍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하면서 그가 조금씩 그녀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데, 그 기대는 많이 미뤄진다. 이런 부분들이 이 영화를 지루함 없이 볼 수 있게 한다. 신파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 그리고 자각하지 못해도 내면에 쌓인 사랑이 강하고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Guillermo del Toro
각본 기예르모 델 토로 Guillermo del Toro, 바네사 테일러 Vanessa Taylor
출연 샐리 호킨스 Sally Hawkins, 옥타비아 스펜서 Octavia Spencer, 마이클 섀넌 Michael Shannon, 더그 존스 Doug Jones, 리처드 젠킨스 Richard Jenkins, 마이클 스툴바그 Michael Stuhlbarg
밤 10시 45분, 여느 날과 같이 일라이자는 잠에서 깨어 씻고 식사를 하고 출근 준비를 한다. 나가면서 옆 방에 사는 친구 자일스의 식사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정이 되면 그녀의 일은 시작된다. 볼티모어에 있는 항공우주연구소의 청소부가 그녀의 직업이다. 어려서부터 벙어리였던 그녀는 한 강가에 버려진 채 발견되었고, 목에는 거대한 동물의 발톱에 긁힌 것 같은 세 줄의 흉터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동료인 젤다와 함께 시설 내부를 청소하다가 보안담당자 플레밍에게서 새로운 '자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더불어 다른 기관에서 온 호프스테틀러 박사가 연구를 위해 합류하고, 아마존에서 새로운 '자산'을 생포한 스트릭랜드 대령이 그와 함께 등장한다. 그가 데려온 새로운 '자산'은 성인 남자 크기의 괴생명체로, 양서류와 비슷해 보인다. 어느 날, '그것'을 가두어 둔 연구실에서 총성이 들리고 스트릭랜드가 피를 철철 흘리며 손을 부여잡은 채 나온다. 일라이자와 젤다는 플레밍의 명령에 따라 바닥이 피로 흥건한 연구실을 청소하게 되고, 스트릭랜드의 손가락 두 개를 발견한다. 이후 일라이자는 연구실에 갇혀 있는 '그것'을 발견하고 그와 소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호프스테틀러 박사는 '그것'에게 소통 능력과 감정이 있음을 알게 된다. 스트릭랜드는 소련과 맞붙은 항공우주 기술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그것'이 가진 특성을 이용하고자 하고, 따라서 그것의 해부를 주장한다. 그러나 호프스테틀러 박사는 '그것'이 가진 능력에 호기심을 갖고 더 연구하길 원한다. 그러나 러시아 스파이였던 그는 러시아에게서도 '그것'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것'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게 된 일라이자는 '그것'을 구해내기로 결심하고 친구인 자일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탈출 계획을 세운다.
피 튀기는 것과 잔인한 장면을 매우 싫어하는 나에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는 쉽게 정 붙일 수 없는 세계인데, 이 영화만큼은 예외이다. 시나리오, 프로덕션 디자인, 음악, 배우의 연기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모든 게 마음에 든다. 특수분장을 전공한 그답게 이 영화에서도 피와 함께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지만, 연인들이 사랑의 순간은 잊은 채 서로 속이고 마음의 생채기를 내고 갈등하며 돌아서는 영화들을 보다가 이 영화를 보니, 그저 마음이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워졌다. 두 생명체가 그저 서로를 발견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가 나를 바라볼 때, 그가 나를 보는 눈빛에는... 나의 부족함이 보이지 않아요.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가 보이지 않아요. 그는 나를 있는 그대로 봐줘요. 그는 나를 보며 행복해해요. 매번, 그리고 매일. 그러니 이제 나에겐 그를 구하거나 아니면 죽게 놔두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만 남은 거예요.
When he looks at me, the way he looks at me... He does not know, what I lack... Or - how - I am incomplete. He sees me, for what I - am, as I am. He's happy - to see me. Every time. Every day. Now, I can either save him... or let him d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