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드업 코미디가 사랑이야기가 되기까지
뭔가 복잡한 듯 하지만, 넷플릭스 시리즈 '필 굿(Feel Good)'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2020년 넷플릭스와 영국의 채널4를 통해 공개된 이 시리즈는 캐나다 출신의 스탠드업 코미디언 '메이 마틴(Mae Martin)'과 그녀의 친구 '조 햄슨(Joe Hampson)'에 의해 탄생했으며, 2021년 시즌2까지 12개의 에피소드가 공개되었다.(앞으로 새 시즌이 추가되진 않을 전망이다. 메이는 그랬으면 했지만, 영국인인 조는 두 시즌이면 충분하다고 못을 박았다고 한다)
첫 문장과 같이, '필 굿'은 사랑 이야기이다.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그들이 진짜 원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여성(생물학적으로)이 사랑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등장하기에,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는 그저 흥미로운 '퀴어물' 정도로 인식했었다. 그런데 작품의 창작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한 메이 마틴에 대해 찾아보다가 '퀴어물'이라는 단어로 단순화하기에는 메이가 그동안 이 이야기 안에 쏟아 넣은 시간과 고민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11살 생일, 토론토의 한 코미디클럽에 방문했던 메이는 코미디와 사랑에 빠져버렸고, 13살에는 이미 지역에서 유명한 십 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어 있었다. 20대가 된 이후에는 런던으로 무대를 옮겨 30대 중반인 현재까지도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사실,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캐나다 출신의 논바이너리 코미디언의 무대가 내게는 그다지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처음 그녀의 무대들을 찾아보았을 땐 어느 부분에서 웃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매우 난감했다. 그런데, 그녀의 무대가 익숙해질수록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 자신을 알아가는 방식, 사랑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던져진 그녀의 유머에 조금씩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필 굿'이 그냥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메이는 런던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기타를 메고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음악 콘텐츠를 선보였다. 자신이 겪었던 일들, 생각하는 것들을 노래로 만들어 들려주었다. 하루에도 샤워를 수 번씩 하는 자신의 습관을 노래로 만든 '샤워 송', 사이가 좋지 않았던 플랫 메이트와의 관계를 좀비가 점령한 세상에서의 힘의 역학으로 풀어낸 '좀비 아포칼립스' 등. 특히 후자는 한 번 들으면 계속 중얼거리게 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이후에는 관계와 중독에 관한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놓기 시작했고, 이는 그녀의 스탠드업 코미디 쇼 'Dope'으로 완성되었다.
어느 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한 메이는 "요즘 감정이 좀 무뎌진 것 같아요. I feel quite flat these days."라고 했다. 그저 나이가 들어 모든 일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며 꺼낸 말이었는데, 그녀의 엄마 웬디는 "그건 네가 요즘 어느 것에도, 누구에게도 중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야. You probably feel flat because you are not currently addicted to anything or anyone."라고 했다. 처음 이 말을 들은 메이는 '대체 그게 무슨 말이지?'라며 당황했지만,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짚어 보며 엄마의 말이 괜한 핀잔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메이 자신은 무언가를 좋아할 때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만을 매우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게다가 20대 대부분을 소수의 사람과의 장기 연애로 보냈던 그녀에게 그들과의 이별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고,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약물을 끊을 때의 감정들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중독'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중독의 정의, 그러니까 중독이라는 것은, 당신이 어떤 것을 상습적으로 하는데, 그것이 당신의 일상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So the definition of an addiction, like what makes it an addiction is when you're doing something compulsively and you can't stop doing it despite it having negative consequences in your day to day life.
이쯤에서 메이의 중독 히스토리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그녀의 인생 첫 중독은 바로 배우 '베트 미들러(Bette Midler)'이다. 그녀의 영화 '호커스 포커스(Hocus Pocus)'는 메이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며 그녀를 메이 인생 최초의 '중독 대상'으로 만들었다.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그녀에 대해 생각할 때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있고 싶었다는 걸 보면 그녀를 향한 메이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녀 이후에는 '코미디'가 메이의 중독 대상이 되었다. 11살에 경험한 코미디클럽은 메이 인생에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고, 일 년 동안 100번이 넘게 클럽을 방문하며 코미디를 향한 자신의 열정을 키워나갔다. 결국 메이는 코미디 공연을 하기 위해 학교까지 그만두게 되었다. 그렇게 코미디에 점점 익숙해져 갈 즈음, 사춘기의 메이에게 약물 중독이 찾아왔다. 동료 코미디언이 건넨 약물이 그녀를 잠식했고, 우연히 이를 알게 된 메이의 부모님은 그녀를 집에서 내쫓았다. 결국엔 재활원까지 가게 되었지만, 다행히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약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다. 약물 중독 이후에 찾아온 것은 '관계' 중독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메이는 주로 소수의 사람과 장기 연애를 했다. 그러나 그 장기 연애 속에서 메이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십 대 때 만났던 남성은 30대의 동료 코미디언이었는데, 메이가 십 대였던 만큼 둘의 사이를 드러내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두 사람은 연인이 아닌 남매였다. 성인이 된 후 만난 여성은 이성애자로 살아온 사람으로, 메이가 첫 동성 연인이었다. 그랬기에 커밍아웃이 쉽지 않았고, 연인의 친구들에게 메이는 그저 이상한 룸메이트에 불과했다. 메이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자신이 관계에 있어서 마조히즘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그녀의 코미디 쇼 'Dope'에 담아냈다.
이제 '필 굿'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 런던에 온 지 2년이 된 메이는 '개그 빈'이라는 코미디 클럽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고 있다. 어느 날, 그녀는 객석에 앉아서 아무도 웃어주지 않는 자신의 쇼에 유일하게 웃음으로 답하는 조지를 발견한다. 그저 막대기 끝에 옥수수 한 알을 붙여놓은 것처럼 생긴 자신과는 너무도 다르게 우아하고 예쁘기만 한 조지가 공연 후 그녀를 찾아와 말을 건다. 한 번도 여자와 데이트해본 적이 없었던 조지는 그날로 메이와 첫 키스를 하고, 두 사람은 몇 개월 후 동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서로의 문제점을 직면하게 된다.
갓 세탁한 빨래 냄새가 날만큼 깔끔하고 깨끗해 보이는 메이가 감옥까지 갔다 온 약쟁이였다는 사실에 조지는 충격을 받는다. 친척의 결혼식에 초대된 조지는 파트너 한 명을 동반할 수 있다는 초대장의 문구에도 불구하고 메이를 속이고 혼자서 결혼식에 참석하고, 조지가 없는 사이 메이는 안절부절못하며 조지에게 수십 통의 문자를 남긴다. 이성애자로 살아온 조지는 친구들에게 메이와의 관계를 숨기고, 이런 사실은 메이를 불안하게 하며 둘의 섹스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메이는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참석을 하고, 조지는 얼결에 친구들 앞에서 커밍아웃을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늘 누군가를 애정의 대상으로 두고 열중하며 살았던 메이의 과거는 조지를 불안하게 하고, 이성애자로 살아왔던 조지의 과거는 메이를 불안하게 만든다. 메이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조지의 집을 떠난다.
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야. 이도 저도 아닌 실패한 인간이야.
I'm not a boy. I'm not even a girl. I'm like a failed version of both.
'필 굿'의 시즌2는 캐나다에서 시작된다. 다시 약물에 손을 대기 시작한 메이는 캐나다로 돌아가 재활원에 들어가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옛 친구 스캇에게로 간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로, 아주 가까워 보이지만, 무언가 말하지 못할 벽을 사이에 두고 있다. 그렇게 스캇과 함께 토론토의 코미디 클럽에 머물던 메이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고, 우여곡절 끝에 조지와 재결합한다. 그러나 메이는 어떤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조지와의 관계는 각종 역할극을 동반한 섹스에 집중된 채 이어진다.
이제와 돌아보니 십 대 시절 함께했던 스캇과의 관계가 어쩌면 애정과 우정을 가장한 성적학대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이 메이를 트라우마에 가두었고, 이 풀리지 않는 괴로움으로 인해 그녀는 사랑을 화학적 반응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조지와의 갈등은 다시 시작되는데, 헤어짐이란 쉬운 길을 택했던 시즌1에서와 달리, 조지는 메이의 곁을 지키는 것을 택한다. 두 사람은 캐나다로 날아가고, 메이는 그곳에서 스캇을 마주한다. 조지는 메이의 괴로움을 지켜보며 그녀를 위로하고 안아주고, 그제야 비로소 두 사람의 세상은 겹치기 시작한다.
George
내가 생각하는 진짜 로맨스가 뭔지 알아? 우리가 빨래할 때야.
Do you know what I think actual romance is? It's when we do our laundry.
우리의 옷들이 뒤섞여 있는 걸 보는 게 좋거든.
I like seeing all of our clothes like mixed up together.
진짜 이상한 일들 있잖아요. 제가 직접 경험한 부끄럽거나 당황스러운 일들이요. 무대에서 그런 것들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공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무대에서 늘 그런 것들을 이야기해요. 가장 개인적인 것이 어떤 면에서는 가장 보편적인 거죠.
I always find that like the weirdest stuff that I share on stage, like the really specific kinda stuff that I'm ashamed of or embarrassed about, that's always the stuff that people relate to. So that just has been the rule. Like the more personal, the more universal in a way.
메이는 NME와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이 작품을 만들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자신이 겪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을 정리하고 곱씹고 고민하며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녀가 겪었던 고민과 괴로움은 메이와 조지의 고민과 괴로움이 되고, 그녀가 고민했던 사랑과 관계는 메이와 조지가 만들어가는 사랑과 관계가 된다. 서로를 알아갈수록 이전에는 몰랐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마주하게 된 메이와 조지는, 누구나 그러하듯 '이별'이라는 쉬운 길을 택하기도 했지만, 결국 문제 안에 갇힌 서로를 견뎌내고, 끌어주고, 밝혀주며 하나의 세상을 이루어 간다. 특히, 조지가 메이를 이해하게 된 이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매우 마음을 울린다. 핫도그 장수가 자신에게 'Sir'라는 단어를 쓰는 걸 듣고, 메이는 조지에게 묻는다.
M: 너는 나를 남자로 봐, 아니면 여자로 봐? 어때?
When you think of me in your head, do you think of me like a boy or a girl, would you say?
G: 그냥 너로 봐. 너는 자신을 어떻게 봐?
Just you, really. More importantly, how do you see you?
M: 그냥 나로 봐. 하지만 그건 좀 말이 안 되잖아. 별 뜻도 없는 것 같고.
Um... yeah, just me, really I think. But then that feels like not really a thing. I don't know what that means.
G: 뜻이 없긴 왜 없어. 그게 '논바이너리'잖아. 구글에서 검색해 봐.
I think that is a thing. That's non-binary, Mae. I do think maybe you should google it.
M: 그래, 검색해 봐야겠네.
Yeah, I probably should google it.
G: 네가 알려주면 올바른 단어를 쓸게.
You tell me and I'll use the right words.
Sexuality(성적 지향)와 Gender(성 정체성)의 구분이 없던 나에게 이 작품은 그 두 가지를 구분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실제로도 논바이너리(남성이나 여성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난 성 정체성. 성 구분이 없는 대명사인 They, Them을 써주길 희망하는 사람도 있고, 메이처럼 She, Her를 써도 무방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로 커밍아웃한 메이 마틴은 '필 굿'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정체성을 보인다. 시즌1의 식당 장면에서 메이를 'Sir'라고 부르는 종업원에게 '그녀는 여자예요'라고 당연한 듯 말했던 것과 달리, 시즌2의 조지는 메이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묻는 것이다. 조지 스스로가 당연하다고 단정 지었던 메이의 정체성을 물어봐주는 것, 그게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변화이고, 사랑이다. 메이 마틴이 꺼내놓은 이 조그만 사랑이야기가 보는 이들에게 건네는 손길은 매우 반갑고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