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가족 에세이 <어머니의 식탁>
우리 집은 딸 부잣집이다. 딸만 다섯이다. 그런 딸 부잣집에 귀하디 귀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너 하나 보려고 위로 많이 나았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많은 손주들 중에서도 유독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던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말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때는 어려서, 어리다는 말이 면죄부는 될 수 없지만, 할머니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던 어머니와 누이들에게 당신이 사심 없이 내뱉은 그 말씀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어머니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도 모르시면서 아들을 페미니스트로 키우셨다. (페미니스트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고 이견도 많을 테지만 여기서는 '이성 간의 공감'이란 뜻으로 사용했다) 다가올 미래에 남녀차별이 낡은 구제도가 되리라는 혜안을 가지셨던 건 아니었다. 고된 시집살이에서 온몸으로 느낀 부당함을 사랑하는 아들이 그대로 답습하는 걸 원치 않으셨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결혼하면 집안일도 스스로 하고 아내를 많이 도와주라'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도와준다'라는 말조차 눈치 봐야 하는 사회가 되었지만, 어머니 세대에게 그 말은 자신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고 미래를 살라는 선언과도 같았다. 부당하고 고된 시집살이가 가슴에 한(恨)으로 남은 어머니는 역설적이게도 '남녀평등'을 실천하는 역사발전의 디딤돌이 되셨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귀한 아들이라고 주어지는 혜택은 딱히 없었다. 밥상을 차릴 때 반찬을 나르거나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는 일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명절 때면 김 한 장 한 장에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려 굽는 일까지 했다.(한 동안 김을 먹지 않았다) 송편과 만두 빚는 일도 도왔다. 장난으로 주물럭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어머니처럼 예쁘게 빚었다. 어머니는 내가 빚은 게 누나들이 빚은 거보다 훨씬 예쁘다고 했다. 물론 수백 가지도 훨씬 넘는 집안일 중에 몇 안 되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들도 항상 집안일을 거들도록 하셨다. 딱히 불만이 있거나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다.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는데(아버지는 물론 열외) 혼자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더 이상했다.
혜택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 가정이 외식을 하지 못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린 시절 나는 '외식'이라는 말이 있는 줄도 몰랐다. 오직 한 달에 딱 한 번, 아버지 월급날 통닭 한 마리를 온 가족이 함께 나눠 먹는 게 전부였다. 통닭 심부름 역시 내 몫이었다. 통닭 한 마리 가격이 5천 원 미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식구가 많은데도 언제나 딱 한 마리만 사 왔다. (성탄절에만 두 마리가 허락되었다. 크리스천도 아닌데 말이다) 막 튀긴 통닭을 포장하면 누런 종이에 기름이 잔뜩 묻어나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먹고 싶어 돌아오는 길 내내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집에 도착해 누런 포장지를 찢어 통닭을 펼쳐 놓으면 김이 모락모락 났다. 누군가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먹음직스러웠다. 한 마리 통닭이 많아야 얼마나 되겠는가! 어머니는 얼른 닭다리 두 개를 집어 아버지와 나에게 하나씩 쥐어주셨다. 누나들 중 누구도 어머니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닭다리는 내가 받은 최고의 혜택이었다. 반면에 어머니 몫은 언제나 목이었다. 통닭에서 제일 맛있는 부위, 이걸 먹어야 꾀꼬리처럼(닭이 아니고) 노래를 잘한다고 매번 같은 레퍼토리를 읊으시며 살점도 없는 닭목을 뜯으시는 어머니. 어린 나 역시 닭목은 맛도 없고 게다가 노래를 잘 부르는 것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닭다리를 어머니께 드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닭 한 마리로는 대가족에게 턱없이 부족하다고 불평만 했다. 심지어 기름이 잔뜩 밴 누런 종이를 먹는 한심한 '쇼'도 했더랬다. 정말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랬다. 가장 맛없는 거, 가장 안 좋은 게 언제나 어머니 몫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철이 든 이후로도 어머니 몫을 당연시했다. 명절 때면 대가족이 모였다. 밥 먹는 것도 일이요 전쟁이었다. 자식들이 모두 출가했으니 다 함께 식사를 하려면 언제나 14개의 자리가 필요했다. 거실에 큰 밥상 2개를 나란히 이어 붙이고 조금씩 좁혀 앉으면 열네 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 어찌어찌 마련되었다. 정신없이 밥을 먹다 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는 열세 명뿐이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뭐 부족한 게 없나 살펴보시느라 함께 앉아 식사하지 않았다. 찌개를 좋아하는 사위 앞에는 찌개를 듬뿍, 잡채를 좋아하는 아들 앞에는 잡채를 듬뿍 그리고 도라지나물무침을 좋아하는 며느리 앞에는 도라지나물무침을 듬뿍 담아 오느라 바쁘셨다. 어머니의 기쁨이고, 먹지 않아도 배부른 이유라며 자식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셨다. 한바탕 식사가 끝나면 다음에는 손주들 밥상이 차려진다. 이번에는 자식들이 앞다퉈 밥상을 차린다. 어머니는 제발 앉아 계시라고 신신당부해도 자식들이 못 미더워서인지, 손주들에게 손수 밥상을 차려주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어머니는 잠시도 쉬지 않으신다. 외손주 열한 명과 친손주 두 명, 모두 열세 명의 밥상이 다시 차려진다. 어떤 손주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훤히 꿰뚫고 있는 어머니는 다시 분주해지신다. 어머니 밥상에는 정작 어머니 자리는 없다.
언제부턴가 어머니도 우리와 함께 앉아 식사를 하신다. 기력이 떨어지셨다며 이전처럼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게 힘들다고 하셨다. 며느리가 차려준 밥상을 맛있게 드시는 어머니의 모습도 보기 좋지만, 이기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자식들과 손주들이 당신이 손수 만든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뭐 더 줄 거 없는지 뒤에서 지켜봐 주시던 어머니가 그립기도 하다. 할 수만 있다면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젊은 어머니로 되돌려 드리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올해는 어머니가 태어난 지 여든 번째가 되는 해다. 지난해 가족끼리 조촐하게 팔순 잔치를 했기에 이번에는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함께하고 싶었다. 온 가족이 어머니, (외) 할머니와의 추억을 글로 써보자고 제안했다. 가족 채팅방에 아이디어를 올렸더니 어떻게 글을 쓰냐, 무슨 이야기를 쓰냐, 나는 글을 못 쓴다 등등 반응이 다양했다. 글을 잘 쓰고 못쓰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머니(할머니)라는 대상은 하나지만, 느끼는 감정과 경험은 모두 다를 것이며 그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의미 있으리라 여겼다. 결국 취지에 모두 공감해 어머니(할머니)를 소재로 한 '가족 에세이' 출판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문장이 매력적인 글, 표현이 조금 서툰 글,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만드는 글 등 개성 넘치는 글이 하나둘씩 모였다. 개성 넘치는 다양한 글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렇게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모두 처음으로 어머니(할머니)께 사랑을 고백했다. 어떤 자식은 명절이 돼야 얼굴 한번 보고, 어떤 자식은 매일 얼굴을 마주치며 살지만, 아무도 어머니께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표현에 서툴렀기 때문이다. 가족 에세이 출판 프로젝트를 통해 어머니께 받은 끝 모를 사랑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생신 때 낭독회를 가질 예정이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로 가족 모임이 취소되었다. 대가족이라 한번 모이기도 어려운데 코로나까지 나서서 방해한다. 어머니께 깜짝 선물로 책을 선물하려고 했는데 손주들 나쁜 병 전염될까 봐 절대 집에 오지 말라는 전화기 너머 어머니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쓸쓸했다.
가족 에세이 출판 프로젝트에 참여한 가족들 동의를 얻어 브런치에 개성 넘치는 글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우리 모두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그 사랑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 특히 코로나로 오래도록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했다면 이 글을 읽다 말고 고향집에 안부 전화라도 드리면 좋겠다.
가족 에세이 제목은 <어머니의 식탁>으로 정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라면 충분히 유추해 내리라 믿는다. 글을 쓴 작가는 밝히지 않고 간단한 소개만 할 예정이다. 대가족이기에 가능한 프로젝트였다. 가지 많은 나무라 바람 잘날 없었는데 나무가 자라 다른 나무가 되었고 그렇게 나무들이 모여 숲이 되었다. 숲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나서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