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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24. 2021

익숙한 제주 낯설게 즐기기를 끝내며

에필로그 - 다시 여행을 떠나다 

 가끔 스마트폰 자체 기능이나 SNS를 통해 '몇 년 전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과거 사진을 보여줄 때가 있다. 3년 전 오늘, 4년 전 오늘, 5년 전 오늘에도 우리는 제주에 있었다. 10년 이상을 한 해도 거르지 않았으니 10년 전 오늘도 제주에 있었으리라. 솔직히 중간에 두 해 정도는 베트남으로 여름휴가를 떠나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 갑자기 병원으로 달려갈 일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또 자주 가는 제주가 조금 지겹기도 했다. 구시가지가 아름다운 호이안에 처음 간 아이들은 마치 이십 년 전 내가 코타키나발루에 흠뻑 빠진 것처럼 호이안에 반했다. 눈에 띄는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졌고 진심으로 즐겼다. 호이안의 대부분 바닷가는 물놀이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온종일 리조트 수영장 안에서 놀아야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머무르는 내내 똑같은 음식으로 차려진 조식 뷔페를 먹어도 매일 다른 음식을 먹는 것처럼 새로워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다른 나라 아이들과도 잘 어울려 놀았다. 호이안은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우리 가족 네 명이 맛있는 음식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한국에서 외식할 때보다 저렴했다. 미식가 아내에게도 베트남은 천국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그토록 행복해하니 나에게도 천국이었다. 여행 경비는 제주보다 1.5배 정도 더 들어 부담되었지만,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었다. 1년에 한 번 있는 가족 여행이기에 조금 무리여도 강행했다. 솔직히 제주 생각은 1도 나지 않았다.     

 매해 가는 제주가 시큰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안 가본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제주에 대해 아는 것도 많다고 자부했다. 그런 오만한 생각이 산산이 부서진 건 한달살이를 준비하면서부터였다. 제주의 전설과 신화, 민간 신앙, 역사, 문화, 음식, 오름, 최근에 인기 있는 명소들까지 책을 통해 다시 공부했다. 모르는 것은 부끄럽지 않았으나 그 오만함은 부끄러웠다. 안 가본 장소가 없다고 자부한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오래전에 제주에서 신제품 출시 행사를 진행했다. 주요 고객을 제주로 초청했고 출시 프로그램 일부로 관광이 포함되었다. 실무 책임자였기에 일주일 전부터 제주에 내려갔다. 그중 3일은 베테랑 관광 가이드와 함께 제주의 명소들을 샅샅이 훑었다. 수백 명이 넘는 고객의 여행 계획을 세워 동선과 점심 식사할 장소까지 챙겼다. 고객들은 두 차례에 걸쳐 전국에서 몰려왔다. 그렇게 제주를 누비고 다녔으니 제주 관광지 중에 가보지 않은 곳이 있을까 싶었다. 회사 동료나 친구들도 제주 여행 갈 때마다 일정이나 맛집을 물어보았다. 엑셀과 파워포인트로 정리된 제주 관광 코스와 맛집 정보를 건넸다. 제주에 사는 현지인만은 못해도 뭍사람으로는 제주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주위에 없었다. 결국 우물 안 개구리였지만 말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제주라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변화무쌍했다. 올레길이 생기고 자전거길이 생긴 것처럼 새로운 관광자원이 계속 개발되었다. 재수해서 1년 동안 학력고사 준비했는데 개정 전 교과서로 공부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겸손한 마음으로 한달살이를 준비하고 처음 제주에 가는 설렘으로 익숙한 그곳을 낯설게 보게 되었다.      


 익숙한 제주를 낯설게 즐기는 방법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늘 하던 행동 말고 평소와 조금 다르게 해보면 된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풍광을 보고, 늘 찾는 식당에서 매번 똑같은 음식을 먹는 것부터 바꿔보면 어떨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장소를 찾아가고, 우연히 들른 한적한 어촌 작은 식당에서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주문해서 먹어봐도 좋다. 렌터카를 빌렸다면 내비게이션은 잠시 꺼두어도 좋다. 편리함은 때론 갑자기 닥친 이를 모를 꽃길이나 숲길에 대한 탄성을 빼앗아 갈 때가 있다. 자신의 근력으로 오롯이 페달을 밟아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자전거로 제주의 돌담길을 달려 보아도 좋다. 모퉁이를 돌면 눈앞에 오직 당신만을 위한 눈부신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어도, 사람이 많이 몰리는 장소가 아니어도 내가 발견한 여행지의 매력을 친구들과 나누어도 좋다. 낯섦과 설레는 조우, 이것이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아닐까? 낯선 여행지에서 책에서 읽었던 역사나 전설, 신화를 술술 읊어주면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다시 보게 되리라.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즐겁다. 여행 가서 머리 아프게 공부해야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현재의 여행이 만족스럽다면 그럴 필요는 없다. 여행해도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느끼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시도해도 좋다.   


 <랜선 제주 여행 - 익숙한 제주 낯설게 즐기기>에는 최근 제주에 많이 생긴 예쁜 카페나 전망 좋은 커피숍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새로 생긴 박물관에 대한 정보도 없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만 해도 우리 가족의 여행 코스는 주로 박물관이었다. 그때는 아이들이 박물관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가끔 전망 좋은 카페에 들러 향기 좋은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아이들이 제법 자라고 난 후부터는 온종일 바닷가에 머물렀다. 때로는 힘차게 한라산을 오르고 한적한 숲길을 걸었다. 예쁜 카페나 새로 생긴 박물관에는 자연스럽게 발길이 닿지 않았다. 가지 않는 곳을 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다시 제주에 가게 되면 그곳 이야기로 우리 여행이 더 풍성해질지도 모르겠다. 

   

 2년 동안 제주에 가지 못했다. 코로나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서로 일정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이제 첫째 아이는 가족 여행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더 좋은 나이가 되었다. 아이는 어른이 되기 위한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려는 중이다. 몇 걸음 더 함께 나가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일 테지만 아이는 그만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우리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쳤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왠지 섭섭한 마음이 앞선다. 그래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하고 떠나야 한다. 학창 시절 아버지께 칭찬이나 격려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잔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입대하던 날 102 보충대 연병장에서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붉은 눈시울을 처음 보았다. 아버지도 드라마 대사처럼 돌보지 않음으로 돌보셨다. 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우리는 이 별에 불시착한 고독한 여행자이다. 우주나 이 별의 나이에 비하면 우리네 삶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도 미치지 못한다. 여행지에 가면 단단히 잠근 마음의 빗장을 스르륵 풀어놓게 된다. 평소보다 넉넉해지고 여유로워진다. 삶을 여행으로 비유하곤 한다. 태도라는 측면에서 삶을 여행하듯 살아가도 좋겠다. 일상에서도 여행자의 기분으로 반쯤은 마음을 열어두고 살아도 좋겠다. 우주 나이에 비해 찰나의 순간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간을 꽉 조인 기계처럼 살 필요가 있을까? 지구별에 잠깐 들른 여행자로 마음 닿는 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여정을 즐기면 좋겠다. 심각하게 살기에 인생은 너무 짧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너무 많다. 태양 궤도를 벗어나기 전 보이저 1호는 뒤를 돌아 지구를 보았다. 창백한 푸른 점, 너무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그 작은 별에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산다. 티끌이 우주의 질량이나 무게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되기를 바란다.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도서들을 소개해 볼까 한다. 제주를 여행하기 전에 읽어 두면 꽤 유용하리라 믿는다. 


 ♥ 조근조근 제주신화 1, 2, 3 / 여연 지음 

 ♥ 이야기와 함께하는 제주 기행, 제주의 파랑새 / 김정숙 지음 

 ♥ 신화와 함께하는 제주 당올레 / 여연, 문무병 지음 

 ♥ 제주 역사 기행 / 이영권 지음 

 ♥ 새로 쓰는 제주사 / 이영권 지음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주편) / 유홍준 지음 

 ♥ 제주, 오름, 기행 / 손민호 지음 

 ♥ 할망 하르방이 들려주는 제주 음식 이야기 / 허남춘, 허영선, 강수경 지음 

 ♥ 제주 설화와 주변부 사람들의 생존 양식 / 현길언 지음 

 ♥ 모두의 제주 / 제주여행연구소 지음 

이전 23화 음식에 진심인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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