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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May 19. 2021

음식에 진심인 편입니다.

음식에 진심인 아내가 좋아한 제주 식당들

 아내는 음식에 대한 나름의 확고한 철학이 있다. 가격을 떠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몸에 대한 예의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가격과 맛이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지 지난 10년 치 네이처지와 사이언스지 논문 기록을 살펴보았다. 아직 이렇다 할만한 연구 성과가 없는 것으로 보아 양자역학 다음으로 규명하기 힘든 연구인 것만은 틀림없다. 대체로 값비싼 음식이 맛도 좋다는 통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주머니 사정이 언제나 넉넉한 것만은 않으니, 우리 가족처럼 보통의 사람들은 그런 통설을 시원하게 깨 주는 식당을 발견하는데 희열을 느낀다. (사회화의 결과일지도 모르나) 아내가 맛있어하는 음식이 대체로 우리 가족 입맛에 맞는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미각을 잃었으니, 맛있는지 여부를 냉정하게 따져 물을 때는 '맛집 리트머스지' 역할을 톡톡히 하는 둘째(Q)에게 의견을 묻는다. 아내가 공들여 만든 음식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소신을 가졌으니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항상 솔직하게 의견을 말한다. 물론 바이어스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아이 입맛이라 유난히 선호하는 음식 군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제주 한달살이를 포함, 지난 몇 년간 제주 여행 중 방문했던 식당들 중에서 보통의 입맛인 우리 가족이 좋아했던, 그래서 자주 들렀던 식당을 정리해 보았다. 그곳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고, 우리의 이야기가 있다. 코로나가 물러나고 다른 일상이 시작되면 멈췄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어느 순간부터 여행지에서 식당에 가려면 블로그부터 뒤진다. 블로그에 소개된 소위 맛집들은 대부분 평균 이상은 하니까 실패할 가능성이 낮다. 하지만 그건 타인의 취향이다. 다른 사람의 입맛을 쫓다 보면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기 어렵다. 20여 년을 마케팅에 종사하면서 수많은 조비사 조사를 진행했고 거기서 발견한 공통된 인사이트는 '소비자도 소비자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다면 여행지의 낯선 풍경에 동화되어보면 어떨까 싶다. 여행의 묘미 중 하나가 '낯설음과 친해지기' 아니겠는가! 우연히 발견한 포구 옆 작은 식당에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된장찌개를 마주치게 될 행운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소 이율배반적이긴 하지만, 이 글에 소개된 식당들은 참고(reference) 일뿐이다. 결국 맛(taste)은 오롯이 혼자만이 누릴 수 있는 우주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2년 전 제주 한달살이를 경험한 후 연재했던 <탐라유람기>에서 일부 발췌했다. 글의 내용도 수정했고 식당도 업데이트했다. 심해에 잠들어 있는 글들에 대한 일종의 '글은 생명이다' 셀프 캠페인이기도 하다. 계획에도 없던 브런치 작가가 된 후 독자도 없는 상황에서 하루에도 두세 편의 글을 올렸더랬다. 무지했으니 용감했다. 브런치가 뭔지도 몰랐고 그냥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썼으니 어디에라도 내놓고 싶었다. 서너 분의 독자가 읽어도 감사한 시간이었다. 요즘에도 검색을 통해 옛 글에 닿는 사람들이 드물지만 한두 분 있다. 평소에도 즐겨 찾는 제주였지만, 한달살이를 통해 제주와 더 가까워졌다. 제주 여행을 준비하거나 이미 제주 여행 중인 분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정보들도 상당수 있어 언젠가 정리하리라 마음먹었더랬다. 이는 두 번째 리라이팅이다. 여행지 중에 정수(精髓)만 모아서 펴낸 글이 브런치북 <제주에 가고 싶다>였다. 그곳에서 누락된 글들이 빛을 보면 좋겠다는 사심 잔뜩, 욕망 넘치는 시도가 '글은 생명이다'인 셈이다. 



<제주시>


▶ 고기국수의 맛을 일깨워준 삼대국수


 제주에 갈 때면 항상 처음 들르는 식당이 삼대국수다. 보통 아침밥을 거르고 출발하기 때문에 제주공항에 도착하면 딱 출출해지는 시간이다. 공항에서 가깝기도 하고 가족 모두 고기국수를 무척 좋아하기에 곧장 삼대국수로 향한다. 처음에는 이미 정평이 난 자매국수올레국수를 찾았더랬다. 두 식당은 언제 가더라도 대기시간이 길어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아이들과 기다릴 수 없었다. (개점 시간에 맞춰 1등으로 줄을 서 먹어본 적은 있다) 급하게 가까운 고기 국숫집을 찾았고 우연히 들른 식당이 삼대국수였다. 이미 다른 식당에서 몇 차례 고기국수를 먹어본 경험이 있었으나 딱히 그 매력을 알지 못했더랬다. 유독 이곳은 우리 가족 입맛을 사로잡았다. 고기국수의 참맛을 깨닫게 해 준 셈이다. 국수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둘째는 말할 것도 없고 국수에 냉정한 첫째도 무척 좋아했다. 사골육수 맛이 진하게 우러나온 국물과 큼직하게 썰어 넣은 돼지(돔베) 고기는 쫄깃했다. 입안 한 가득 면발을 머금으면 진한 국물과 어우러져 감동을 선사했다. 처음 삼대국수에 갔을 때 첫째도 둘째도 유모차를 타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 고기국수에 매콤한 비빔국수까지 한 그릇 뚝딱 해치운다. 삼대국수에서 배를 채워야 비로소 제주에 도착했다는 기분이 든다. 이곳은 언제나 우리 가족에게 제주 여행의 '시작'이 되어주었다.   


▶ 제주 흑돼지 생등갈비를 좋아한다면 태을갈비


 여행이나 출장으로 제주도를 자주 찾는 나에게도 가끔 식당을 소개해 달라는 분들이 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추천하는 곳이 제주산 흑돼지구이 식당, 태을갈비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음식에 진심인 아내가 제주에서 가장 사랑하는 식당이기도 하다. 현지인이 즐겨 찾는 식당이라 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이곳은 생등갈비가 유명하다. 저렴한 가격대는 아니지만, 기꺼이 지불할 가치가 있는 맛이다. 여러 식당에서 생등갈비를 먹어 보았지만 이곳에 견줄만한 곳은 아직 찾지 못했다. 다 같은 고기인데 왜 어느 식당만 유독 맛있고, 어느 식당은 그렇지 않은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소금만 뿌려 먹기에 마법 소스(양념)가 능력을 발휘할 여지도 없다. 제주의 유명 식당들이 좁은 골목길 허름한 집에서 시작해 3~4층짜리 건물로 옮겨간 과정을 지켜보았다.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수록 음식의 맛과 질이 떨어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그런 식당들을 가끔 찾긴 했지만 점점 발걸음이 뜸해졌다. 현지인은 관광객이 많이 찾는 식당에 발을 들이지 않음은 물론이다. 오죽하면 블로그에도 '현지인이 찾는'이라는 단어가 키워드가 되었을까! 태을갈비도 원래 있던 자리에 번듯한 건물을 지었다. 다행히 황홀한 맛은 여전했다. 이곳만큼은 오래도록 본연의 맛을 잃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 분식의 품격을 높인 관덕정 분식


 동문시장 골목 어귀에 있는 작은 서점인 ‘미래책방’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관덕정 분식은 품격 높은 분식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분식 골목이던 동문시장 끝자락에 자리해 있는데 분식집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세련된 인테리어가 시선을 잡아끈다. 별도의 주차장도 마련되어 있다. '분식집이 뭐 이렇게까지 우아할 필요가 있나?'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음식을 맛본 후 '한 곳쯤 있어도 좋겠네!'로 바뀌었다. 제주 로컬 수제 맥주도 만날 수 있다. 2년 전보다 가격은 인상되었지만, 이전에도 저렴한 편이어서 그런지 턱없이 비싸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모든 메뉴가 다 맛있지만 우리 가족 입맛을 사로잡은 건 한치 튀김이었다. 바삭하게 튀긴 한치 튀김은 느끼하지 않게 고소했다. 한치 특유의 부드러운 식감도 일품이었다. 너무 매력적인 맛에 무려 세 번이나 시켜먹었다. 요즘에는 제주 분식의 시그니처 메뉴인 '모닥치기'도 등장했는데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 관덕정 분식에 들러 품격 있는 분식으로 허기를 달랜 분이라면 근처에 있는 미래책방에서 지적 목마름도 해소하시길 조심스레 권해 본다.   


▶ 흰쌀밥과 황돔회 콜라보가 환상적인 용출횟집


 용출횟집은 이미 너무 유명한 식당이다. 용담해안도로 횟집들이 대부분 정평 나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곳을 단연 으뜸으로 친다. 이를 증명하듯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예전 글에서도 일부러 이곳을 소개하지 않았고, 이번에도 망설였다. 비싼 가격도 한몫했다. 두 사람이 가면 10만 원은 기본이다. 게다가 아이와 함께 하는 가족 여행객이 갈만한 식당은 아니다. 회를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먹을 음식이 없다. 어른들끼리 여행에서, 모처럼 자유를 만끽하는 자신에게 근사한 한 끼를 선물하고 싶을 때 들를만한 식당이다. 용출횟집의 시그니처 메뉴는 뭍사람에게는 조금 낯선 황돔회와 흰 쌀밥(초밥)이다. 함께 나오는 깻잎 한 장에 초밥과 황돔회 한 점을 올리고 이 집만의 비법 젓갈을 살짝 올려 먹으면 그 맛이 가히 환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었던가?' Best 10 안에 들 정도였다. 어스름 저녁에 이곳에서 한 잔 하고 친구들과 재미있는 놀이도 즐길 수 있다. 시력이 좋아지는 건강한 놀이다. 용담해안도로는 제주로 착륙하는 비행기가 가깝게 비행하는 곳이다. 저 멀리서 제주로 진입하는 비행기의 항공사를 알아맞히는 놀이가 그것이다. 시시할 것 같지만 여행지에서 주는 해방감이 재미를 더해 준다. 반대편인 이호테우 해수욕장에서 이륙하는 비행기의 항공사를 알아맞히는 놀이를 한 시간도 넘게 아이들과 했더랬다. 아이들도 무척 신나 했다.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어른이들이 함께 하기에 이만한 놀이가 없다. 단, 너무 시끄럽게 하면 곤란하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즐겨야 한다. 사실 이 놀이가 용출횟집을 부러 소개하는 이유다.


▶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는 우진해장국


 우진해장국은 가족여행에서는 절대 들르지 않는 식당이다. 제주로 출장 온 다음날 무슨 일이 있어도 들르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에 예외적으로 소개해 볼까 한다. 내 입맛은 객관적이지 않다. 미각을 잃은 대신 행복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선택한 식당이니 믿을 만한 곳이 못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우진해장국은 현지인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식당이다. 그러니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곳도 줄을 서야 겨우 먹을 수 있는데 아침부터 그렇다는 것이 좀 신기하다. 제주 고사리가 유명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부드러운 식감과 좋은 맛으로 이름을 떨쳐 가격도 다른 고사리에 비해 비싼 편이다. 우진해장국은 돼지고기 육수에 고사리나물을 다져 넣고 메밀가루(강원도보다 제주에서 메밀이 더 많이 재배된다는 사실도 놀랍다!)를 풀어 넣어서 걸쭉하게 끓인 육개장이다. 처음 본 사람은 '이게 뭐야?' 놀랄 수 있다. 일단 한 숟가락 뜨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맛이다. 개인적으로 '된장찌개 폭폭이'와 '미역국 폭폭이'를 무척 좋아한다. 우진해장국의 육개장도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전날 거나하게 취한 이유 중 팔 할은 바로 이곳에서 제주만의 독특한 육개장을 맛보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핫도거의 핫플레이스 두물머리 연핫도그


 아내는 떡볶이에, 나는 핫도그에 진심인 편이다. 핫사모(핫도그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의 모임) 회장으로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핫도그를 먹어왔다고 자부한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핫도그를 먹게 해 준다면 기꺼이 메피스토와의 계약에 서명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핫도거(핫도그를 좋아하는 사람)다. 다행히 메피스토를 만날 일은 없을 듯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핫도그를 제주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인생 핫도그의 주인공은 두물머리 연핫도그다. 두물머리? 맞다. 핫도그로 유명한 양평 맛집. 하나밖에 없는 분점이 제주 판포포구에 있었다. 두물머리는 우리 집에서도 한 시간 거리인데, 그걸 멀리 제주에서 만났다. 기묘한 인연이었다. 사실 판포포구는 스노클링과 석양 맛집이다. 뭍사람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이다. (지금은 너무 유명해졌다 T T) 우리 가족도 스노클링 하러 갔다가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다. 나와 둘째는 핫도그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지만, 첫째는 핫도그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두물머리 연핫도그는 아내와 첫째가 더 좋아했다. 처음 이곳에 들른 날, 첫째는 핫도그 따위 먹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거절 의사를 강력히 표현했다. 몇 번 권했는데 싫다고 했다. 그러다 맛있게 먹던 둘째 모습에 '한 입만'을 요청했고, 다른 건 다 내주어도 핫도그만큼은 내줄 수 없었던 아빠의 소중한 핫도그를 기필코 뺏어 먹었다. 그 날 이후로 이틀에 한 번은 판포포구에 들러 핫도그를 먹었다. 매운맛과 순한 맛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매운맛은 나와 맞지 않았다. 해 지는 시간에 맞춰가면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핫도그를 먹으며 감상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입장료는 공짜, 핫도그 값만 지불하면 된다. 이보다 더 완벽하게 제주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서귀포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두루치기와 만나는 용이식당


 첫째 아이가 만 두 돌이 되기 직전, 처음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왔다. 두 돌 안된 아기는 항공료가 공짜였기에 이때다 싶었다. 서귀포에서 우연히 들른 허름한 식당이 바로 용이식당이었다. 첫인상은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시장 안 평범한 식당 모습 그대로였다. 메뉴는 제주산 돼지고기 두루치기 하나였는데 그 맛이 정말 끝내줬다. 아직 어린아이였던 첫째가 먹기에는 무척 매웠는데 주인 할머니가 예쁜 아기가 왔다고 맛있는 김을 따로 챙겨주셨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제주 한달살이를 하면서 오랜만에 다시 찾은 용이식당은 장소를 훨씬 큰 곳으로 옮겼지만 여전히 친절하고 인심 좋았다. 맛은 말할 것도 없었다. 수십 년간 본연의 맛을 유지하는 제주에서 몇 안 되는 귀한 식당이다. 우리 가족은 4명이라 4인분을 주문했더니 너무 많다고 3인분만 주문하란다. 돼지고기에 파절이, 콩나물, 김치를 넣고 직접 볶아 먹으니 대식가인 우리 가족에게도 3인분이 모자라지 않았다. 게다가 밥과 반찬은 계속 리필이 가능하다. 고기가 조금 남으면 마무리는 볶음밥으로 한다. 맛도 끝판왕, 가성비도 끝판왕이다. 여전히 메뉴는 두루치기 하나밖에 없다. 주류나 음료도 팔지 않는다. 근처 슈퍼에서 사 와서 마셔도 눈치 주지 않는다. 일하는 분들까지 너무 친절한 용이식당의 오랜 인기 비결은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두루치기가 궁금하다면 용이식당만한 곳이 없음은 분명하다. 


 인생 된장찌개와 만난 소랑밥상


 위미항 근처 작은 식당에서 인생 된장찌개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한달살이 숙소가 위미항 근처에 있었고, 마침 멀리 가기 귀찮은 마음에 가까운 동네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내가 한 곳 점찍어 둔 식당이 있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문을 닫았다. 풀이 죽어 돌아서는데 맞은편에 출입구가 예쁜 아주 작은 식당이 있었다. 늦은 오후였는데 다행히 식사가 가능하다고 해서 무작정 들어갔다. 그렇게 몇 번의 우연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소랑밥상을 만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생 된장찌개를 만났다. 사람과 사람이 옷깃만 스치는 인연으로 만나려고 해도 전생에서 몇 겁의 인연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소랑밥상과 우리 가족은 어떤 인연이 있어 이렇게 만났을지 궁금했다. 이곳에서 만난 딱새우 된장찌개는 따스한 엄마 품을 닮았다. 투박하지만 정겨운 냄새가 풍겼다. 마음씨 좋은 고운 누이 같은 주인아주머니가 비법은 천연조미료라고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그곳에서 항상 따님과 함께 점심을 드신다고 하시니 자식 입에 들어가는 걸 만드는 마음이 나머지 비결이 아닐까 추측해볼 뿐이었다. 주인아주머니가 딱새우를 꼭 먹어 보라고 권했다. 사실 된장찌개에 들어간 새우는 국물을 우려내기 위한 용도라고 생각해 한 번도 먹지 않았다. 그런데 이 딱새우는 속이 굉장히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살이 통통히 올라 까먹는 재미도 있었다. 점심 메뉴는 정식을 주문하면 흑돼지구이와 딱새우 된장찌개 그리고 밑반찬들이 함께 나온다. 직접 만든 듯한 예쁜 그릇에 소담하게 담긴 찬들은 하나 같이 정갈하고 맛도 일품이었다. 소랑밥상은 모처럼 제주에서 발견의 기쁨을 선사해 준 식당이었다.   


 짜장파를 짬뽕파로 만들어버린 섬소나이


 섬소나이는 제주 한달살이를 시작한 첫날 집 근처를 산책할 때 만난 식당이었다. 독특하게도 메뉴가 짬뽕과 피자였다. 왠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게다가 맛있는 향토 음식이 차고 넘치는 제주에서 딱히 먹고 싶은 음식들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쳤는데 단 한 번도 들어가 보리라는 마음을 품지 않았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위미항에서 비를 맞으며 바다낚시를 하게 되었다. 한여름인데도 추웠는지 따끈한 짬뽕 국물이 간절했다.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아내도 흔쾌히 오케이 했다. 아이들은 '피자'라는 말에 환호성부터 질렀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한식(제주 향토음식)을 좋아했지만, 피자나 돈가스가 맛있을 나이였다. 섬소나이 메뉴는 짬뽕 3종류, 피자 2종류로 심플하다. 개운하고 시원한 맑은 짬뽕인 땡짬 (매운맛 조절 가능), 우도 땅콩이 들어간 매콤 담백한 크림 짬뽕인 백짬, 피자는 소섬(우도)과 되새기(돼지)를 주문했다. 단언컨대 이곳은 짬뽕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한 독특한 국물이 일품이었다. 바닷가니 해산물이 풍부한 것은 기본이었다. 특히 백짬 국물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얼핏 보면 크림 파스타 같은데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맛이 느껴져 무척 놀랐다. 끝내주는 국물 맛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짬뽕 국물을 하나도 남긴 없이 비웠다. 짜장과 짬뽕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엄마가 좋은지 아빠가 좋은지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큼 어렵다. 오죽하면 짬짜면이라는 세상에 없는 음식이 등장했을까? 굳이 따지자면 짜장파인 나는 이날 이후로 짬뽕파로 급선회했다. 제주에서 중식 인생의 변곡점을 맞게 된 셈이다.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피자는 제주산 재료를 듬뿍 넣어 만들어 맛있었지만, 솔직히 짬뽕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맛을 느끼지 못했다. 두 아이에게 맛이 어떤지 묻자 대답은 하지 않고 '한판 더'를 외치는 걸 보니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짬뽕과 피자의 조화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국물만큼은 진심인 식당이다.  


 맛과 가격 모두 착한 석경초밥


 일부 제주 식당은 일찍 문을 닫는다. 오후 5~6시에도 재료가 떨어져 문을 닫는 경우가 왕왕 있다. 유비가 제갈량을 맞아들이기 위해 삼고초려했듯이 우리 가족도 세 번이나 방문한 끝에 간신히 그 맛을 경험한 식당이 있었다. 용이식당과 함께 아랑조을거리에 있는 석경초밥이 바로 그곳이다. 젊은 미식가들에게 초밥 맛집으로 입소문이 자자해 SNS를 보고 젊은 연인이나 여성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식당이다. 아담한 규모의 식당이라 그런지 언제나 사람들이 줄을 서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재료가 떨어져 일찍 문을 닫는다. 초밥을 먹지 않는 둘째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초밥을 좋아하는 아내와 이제 막 그 세계에 발을 디뎌 탐구열에 타오르는 첫째를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 주문방식이 조금 재미있는데 메뉴판도 있지만, 초밥 모형을 접시에 담아 셰프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석경초밥 역시 맛과 가성비 모두를 만족시켜 주는 흔치 않은 식당이다. 신선한 재료로 만든 맛있는 초밥을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 자기는 먹지도 않는 초밥집에는 왜 왔냐며 투덜거리던 둘째도 장어와 계란으로 만든 초밥을 맛보고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모듬롤초밥 메뉴도 있어 아이와 함께 가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둘째의 인생 초밥집이었던 석경초밥은 오랜 가뭄의 끝에 만난 단비와도 같은 곳이었다.  


 모닥치기 (떡볶이) 끝판왕 짱구분식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간식, 분식에 한해서)은 떡볶이다. 회사가 강남역 근처에 있을 때 길거리 포장마차부터 프랜차이즈 떡볶이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사 날랐다. 결혼기념일에도 아이들을 재우고 떡볶이와 와인으로 조촐한 둘만의 파티를 가졌더랬다. 늘 맛있는 음식을 갈망하는 아내에게 떡볶이는 끝없이 탐구해야 할 미지의 세계였다. 그런 아내가 제주 한달살이를 하는 동안 떡볶이를 먹지 못하니 금단 현상이 왔다. (아직 관덕정 분식을 발견하기 전이었다) 밥을 먹어도 배가 고프고, 안 먹어도 배가 고프다나? 맛있는 떡볶이 공급이 시급했다. 제주에 사는 회사 동료에게 전화해 물어보았더니 깜짝 놀랐다. 뭍에서 온 사람이 제주 맛집을 물어보는 경우는 많았지만 떡볶이 맛집을 물어본 경우는 내가 처음이란다. 제주시에 사는 후배라 서귀포시 사정에는 밝지 않았다. 새로 뚫린 도로로 40분이면 왕래하는 제주시와 서귀포시는 사실 심리적 거리가 매우 멀다. 괸당 문화가 강한 탓이다. 후배가 수소문 끝에 소개해 준 식당이 짱구분식이다. 정말 허름하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분식집이었다. 떡볶이를 보기 전까지는. 결코 평범한 떡볶이가 아니었다. 수차례 제주로 여행 왔지만 '모닥치기'라는 특별한 음식을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 모닥치기는 여러 개를 한 접시에 모아준다라는 뜻인데 국물 자작한 떡볶이에 튀김, 계란, 어묵과 김밥이 함께 나온다. 튀긴 떡으로 만든 떡볶이는 쫄깃함이 두 배였다. 평소 매운 것은 입도 못 대는 둘째도 잘 먹었다. 정말 푸짐하게 한 접시 가득 나와 '이걸 어떻게 다 먹지?' 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 해 치우고 튀김 떡볶이를 추가했다. 떡볶이에 진심인 아내도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제주까지 가서 굳이 떡볶이를 먹을 필요는 없다. 제주의 색다른 음식 문화 하나쯤 놓치더라도 여행을 즐기는 데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겉바속촉 돈가스의 진수 까망고띠


 골목식당에서 화제가 된 돈가스집 '연돈'이 제주에서 개업해 더 화제가 됐다. 전날부터 줄을 서는 모습은 여전했다.. 종종 텐트까지 등장했다. 그 맛이 미치도록 궁금하지만 그렇게까지 감내할 자신은 없다. 줄 서서 음식을 먹는 나름의 기준은 1시간 정도가 최대치다. 그 이상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고역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경지이다. 그래서 7~8 시간을 기다리는 분들이 정말 존경스럽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기다려야 한다면 이번 생에 연돈 돈가스 맛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행히 우리 가족도 제주에서 꼭 들르는 돈가스 식당이 있다. 거문오름과 가까운 까망고띠가 바로 그곳이다. 거문오름 체험을 함께 한 해설사께서 소개해 준 인연이 이어졌다. 돈가스도 짬뽕이나 피자와 마찬가지로 제주까지 가서 꼭 먹어야 할 음식은, 우리 가족에게, 아니었다. 해설사께서 워낙 강력히 추천해 혹시 가족이나 친척이 운영하는 식당인지 살짝 의심하기도 했다. 사실 까망고띠는 마을기업으로 거문오름 주위에 ‘블랙푸드’ 육성을 위해 운영되는 식당이다. 거문오름과 함께 그 일대를 문화관광지로 육성하려는 큰 그림이 깔려있었다. 까망고띠는 카페 겸 식당으로 운영했는데 공간을 넓게 활용해 세련된 인테리어에 편안함까지 더했다. 사실 로컬 식당들이 관광객 유치를 위해 지나치게 (다소 획일화된) 인테리어에 신경 쓰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바가 있을 테지만, 소비자도 소비자를 잘 모르기에 생산자는 트렌드를 만들 능력도 필요하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어떤 소비자도 스마트폰을 원하지 않았다. 심지어 잡스 형님이 소비자 조사를 했다면 아이폰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우스게 소리가 있을 정도다) 돈가스 맛은 훌륭하다. 제주 흑돼지뿐만 아니라 모든 식재료를 로컬에서 나고 자라는 것만 사용한다. 돈가스는 두툼하지만 무척 부드러웠다. 재료도 훌륭하지만 튀기는 기술이 예사롭지 않았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육즙이 흘렀다. 아직 '겉바속촉'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겉바속촉이네'라는 말이 툭 나왔다.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나조차도.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인 아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돈가스 중에서 가장 맛있다고 극찬했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이 식당들 이외에도 몇 군데 자주 갔던 식당이 있지만 소개하지 않았다. 우리 입이 간사해졌는지 아니면 정말 그 식당들 음식 맛이 변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예전처럼 좋은 맛, 건강한 맛, 매력적인 맛으로 느끼지 못하니 차마 소개할 수 없었다. 10년 이상 다녔던 식당들인데 오래된 손님으로서 아쉬움이 컸다. 예전 글에는 주소, 가격 정보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번 글을 쓰면서 제주 곳곳에 얼마나 추억이 많은지 새삼 깨달았다. 식당 하나하나에도 우리 가족의 역사가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경험한 음식 맛은 '진짜 맛'이 아닌, 여행의 기쁨과 설렘에 취해 그렇게 느끼도록 '인식'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주라면 그런 마법 같은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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