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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찔이의 무모한 도전

세상에 나쁜 술은 없다 - 피트 위스키

by 조이홍

위스키 업계, 그것도 스카치위스키 업계에 만 20년이나 종사했지만, 피트(peat) 위스키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걸 떠나 솔직히 마셔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몇 번 시도했다가 호되게 당했던 기억 때문입니다. 한 모금 마시고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아마 생굴을 처음 먹었을 때도 같은 표정이었을 터입니다(여전히 생굴은 못 먹습니다). 하루키 작가가 <위스키 성지여행, 후에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으로 제목 변경>에서 환상의 조합이라고 극찬했던 피트 위스키와 생굴 모두 먹지 못하니 아일라 섬 여행은 다했습니다. 아무튼, 굳이 기분 나빠지는 '풍미'로 가득한 위스키를 마실 이유가 있을까 싶어 피해 왔던 것입니다. 세상에 부드럽고 달콤한 풍미를 자랑하는 위스키가 얼마나 많은데요. "세상에 나쁜 위스키는 없다. 그저 다른 위스키보다 덜 좋은 위스키가 있을 뿐."이라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말처럼 '피티드 위스키'는 제게 덜, 덜, 덜 좋은 위스키였습니다.


이쯤에서 피트(peat)가 도대체 뭔데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 듯합니다. 나는 위스키에 관심 없고, 피트 따위에는 더더욱 관심 없어, 하시는 분들은 더 이상 이 글을 읽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은 넓고 좋은 콘텐츠는 넘쳐나니 관심 밖 분야의 글로 여러분의 귀중한 시간을 뺏고 싶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위스키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다면 재미 삼아 읽으셔도 좋을 듯합니다. 모든 음식이 그렇듯 위스키도 '스토리'를 알면 더 맛있게 즐길 수 있으니까요.


'이탄'이라고도 불리는 피트는 이끼, 잎, 풀, 꽃과 같은 식물이 썩어 습지와 연못에 축적된 것을 말합니다. 식물이 퇴적해 천 년 이상 지나면 피트가 되고, 여기에 수천 년 혹은 수만 년이 지나면 석탄이 된다고 합니다. 성분적으로는 탄소 함유량이 60% 미만의 석탄을 의미한다고 하고요.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석연료입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가 여기에서도 통합니다. 환경이 문명을 결정짓는다는 이론 말입니다. 보리가 무럭무럭 자라고 물이 풍부한 데다 땅만 파면 피트가 나오니 위스키를 안 만들고 버틸 재간이 있겠습니까. 자연스럽게 위스키를 만들 수밖에요. 특히 아일라(ISLAY) 섬의 피트는 페놀 함량이 높고 해조류와 바다내음까지 더해져 더욱 유명합니다. 오죽하면 그 무라카미 하루키도 위스키를 마시러 아일라 섬으로 날아갔을까요.


곡물(보리)은 과일(특히 포도)과 다르게 자체적으로 당화(단백질이나 당류가 포도당과 결합하여 구조가 변형되는 화학적 변화)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보리를 물에 불려 싹을 틔웁니다. 이를 맥아(몰트)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싱글 몰트 위스키'의 그 몰트 맞습니다. 물에 담가 산소를 공급해 습해진 보리를 몰팅 플로어에 1주일 정도 넣어두고 정기적으로 섞어주면, 이 힘든 작업을 하는 사람을 몰트맨이라고 부릅니다, 부어 오른 보리에서 싹이 나 부드럽고 끈적끈적해집니다. 이 과정을 통해 보리의 전분이 당분으로 바뀌며 자연 디아스타제 효소(전분을 포도당 등 단순 당으로 분해하는 효소)가 발산됩니다. 습한 몰트를 건조할 때 피트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때 피트 연기의 기름과 페놀 성분이 보리 표면에 달라붙게 됩니다. 이후 위스키 제조 과정을 거친 후에도 여전히 피트 향이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 물론 모든 몰트가 피트에 의해 건조되는 건 아닙니다. 몰트를 사용하지 않는 스카치위스키가 훨씬 많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피트 위스키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앞에서 언급한 아일라 섬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피트는 아일라 몰트 위스키의 DNA'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증류 비법에 훤하던 맥바흐(MacBeatha) 가문이 1300년 아일라 섬에 자리 잡은 덕분에 이 작은 섬은 스코틀랜드 증류의 정신적 고향이 되었습니다. 이곳 남부 연안 포트 엘런에 전설적인 증류소 세 곳이 있고 사람들은 이들을 일컬어 '킬달튼 삼총사'라고 합니다. 바로 라프로익(Laphroaig), 라가불린(Lagavulin), 아드벡(Ardbdg) 증류소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핍찔이(피트 위스키를 잘 못 먹는 사람)인 제가 무모하게 피트 위스키에 도전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위스키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어서? 호기심 많을 나이라서? 아닙니다. 사실은 취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워낙 술 마실 기회가 없다 보니 소주 몇 잔에 취해 없던 용기가 덜컥 생겨버렸습니다. "그래, 이 짬밥에 피트 위스키 못 마실 게 뭐야, 도저언!!!' 뭐, 이런 뻔하디 뻔한 취중 스토리입니다. 그래도 위스키 마실 땐 바짝 정신 차렸답니다.


핍찔이가가 선택한 피트 위스키는 무려 라가불린 16년, 아드벡 코리브레칸, 라프로익 쿼터 캐스크 이렇게 세 종류였습니다. 킬달튼 삼총사 중에서 사이좋게 하나씩 고른 셈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 피트 위스키가 이렇게 괜찮았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최근에 피트 향이 약한(덜한) 킬호만(Kichoman)이라는 위스키를 먹었을 때도 '아, 역시 난 피트와 인연이 없구나.' 했었는데 의외의 결과에 제가 가장 많이 놀랐습니다. 물론 앞으로 피트 애호가가 되겠군, 할 정도는 아닙니다. 피트에 열광하는 덕후들의 마음을 백만분의 일쯤은 헤아렸다고나 할까요. 그간 선입견 때문에 무조건 피트를 멀리했던 제 자신이 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라고나 할까요. 딱, 그 정도였습니다.

Lagavulin-16-Year-Old.png
아드벡코리브레칸.png
라프로익 쿼터캐스크.png
라프로익 16년 (43%) / 아드벡 코리브레칸(57.1%) / 라프로익 쿼터 캐스크(48%)

세 위스키의 선호도를 고르면 라가불린 16년 => 아드벡 코리브레칸 => 라프로익 쿼터 캐스크 순이었습니다. 역시 병원 냄새, 소독약 냄새의 진수는 라프로익이었습니다. 피트의 매력에 방금 눈뜬 제게 여전히 큰 시련(?)을 선사했다고나 할까요. 모닥불 같은 라가불린으로 시작해 해초와 바다내음의 짠내가 특징인 아드벡을 거쳐 타르와 소독약의 라프로익과 마주쳤으니, 저절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병원 냄새 풀풀 풍기는 라프로익 위스키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창업주의 증손자 '이언 헌터'가 금주법이 한창인 미국에 라프로익 위스키를 수출한 일이 그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금주법 중에도 처방만 있으면 열흘마다 500ml 위스키를 합법적으로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이언 헌터는 그러한 허점을 노려 라프로익 위스키를 의약품으로 반입 허가를 신청했습니다. 세관원은 병원 냄새, 소독약 냄새가 풍기는 라프로익 위스키의 허가를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이언 헌터 덕분에 라프로익은 매출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라프로익 피트 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오시죠.


참고로 피트에 의해 건조된 몰트는 페놀 수치(ppm)로 표시되는데 숫자가 높을수록 페놀 수치가 높습니다. 통상 라가불린은 34~38ppm, 라프로익은 40~45ppm, 아드벡은 50ppm 이상의 몰트를 사용해 위스키를 만듭니다. 라가불린 피트 향이 다른 두 곳에 비해 은은하게 느껴지는 건 사용하는 몰트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카치위스키 전문가 '찰스 맥클린'도 라프로익을 '매운 스모키', 라가불린을 '향기로운 스모키'라고 표현했다고 하니 어쩐 일로 핍찔이 입맛이 전문가와도 통했습니다. 아, 그런데 가장 강한 피트 몰트를 사용해 '피트 몬스터'라고 부르는 아드벡이 어떻게 라프로익보다 피트감이 덜할까요? 숙성까지 마무리하면 실제 페놀 수치가 뚝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드벡은 강한 피트 몰트를 쓰는 대신 과일 풍미가 많으면서 가볍고 깔끔한 스피릿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합니다. 키 큰 증류기와 정화기가 달린 라인 암을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건 좀 어려운 개념이니 다음 기회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노력으로 아드벡 위스키는 세계적으로 컬트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라프로익 증류소와 라가불린 증류소는 불과 3.2km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두 증류소는 악연이 깊습니다. 어떤 인연인지 궁금하시죠. 한번 찾아보세요. 여기서 더 수다 떨고 싶지만 글이 너무 길어져 이제 그만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오랜만에 전공 분야를 이야기하니 자꾸만 또 다른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과유불급'이니 이제 끝내야죠. 세상은 넓고 위스키는 많습니다. 평소라면 절대 도전하지 않을 피트 위스키를 마시고 나니 그만큼 스토리가 늘어났습니다. 다음에는 어떠 이야기에 도전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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