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그 날 먹은 컵라면이 너무 맛있었거든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 왜 생기는 걸까. 주변에서 때가 되었으니 결혼을 하라고 부추길 때? 오랜 연애 기간 동안 상대방이 신뢰를 보여줄 때? 자산, 직업과 같은 경제적 능력 등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 나에게 그 순간은 연애한 지 일주일 만에 갑자기 찾아왔다.
드디어 미쳤네, 미쳤어
친구: 야, 데이트 잘했냐. 너 오빠랑 만나는 거 내가 도와준 거 잊으면 안 된다.
나: 그럼~ 항상 고마워하고 있지. 오늘 오빠랑 하늘공원 가서 일출 봤잖아.
친구: 오, 좋았겠네! 새해 일출, 뜻깊고 좋네.
나: 응, 진짜 좋았어. 그래서 말인데, 나 오빠랑 결혼하려고.
친구: 뭐? 오빠랑 이야기한 거야?
나: 아니? 내 생각인데?
친구: 드디어 미쳤네, 미쳤어. 만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됐잖아. 너 결혼 같은 거 안 한다며! 사람을 봄/여름/가을/겨울, 1년은 만나봐야지!
(사람을 1년은 만나는 봐야 한다던 이 친구도 3개월 만난 남자 친구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엄마의 고된 시집살이를 보며 자란 나는 ‘연애만 하고, 결혼은 하지 말자, 하더라도 아주 늦게 하자’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 전에는 연애를 하면서도 “난 결혼 같은 거 할 마음이 없다.”라고 이야기해 결혼과 영원한 사랑을 동일시하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런 내게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지’라는 생각이 든 건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친 일이었다.
컵라면을 먹으며 결혼을 결심하다
2016년 1월 1일 새해. 예전부터 새해에 사랑하는 사람과 일출을 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하지만 27년을 살면서, 연애 중이던 기간이 6년도 넘는데, 한 번도 소망을 이룬 적이 없다. 게을러서 늦잠을 잤거나, 가족과 보냈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떨어져 있었거나. 드디어 그 소망을 이루는 날이었다. 게다가 한 달 넘게 갖가지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해가며 - 빼빼로를 만들어 가고, 초상화를 그려 가고, 친구에게 받았다며 내 돈으로 산 뮤지컬 티켓으로 함께 뮤지컬을 보러 가고, 댄스 공연에 초대하고 - 시작한 연애가 아닌가. 들뜰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아침 6시에 집 앞으로 데리러 온 그 역시 나만큼 들뜬 기분이었을까. 피곤할 텐데 데리러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아침이라 손 시릴까봐 사왔다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내민다. 하늘공원 주차장에선 패딩을 입어도 추운 날씨라며 담요를 둘러주고, 정상에 올라선 보온병에 담아온 보리차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의 세심함에 감동을 받고 있던 그때, 새해를 알리는 그 날의 태양이 구름 사이로 떠올랐다. 우리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함께 박수를 쳤다. 저마다 새해의 결심을, 소망을 하늘에 이야기했겠지.
해가 충분히 하늘로 떠올랐을 때, 그는 또다시 뭔가를 꺼냈다. “여긴 산은 아니긴 한데... 산에 올라서 먹는 컵라면이 제일 맛있더라고.” 평소에 컵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 날 먹은 컵라면은 얼마나 맛있던지. 새해를 알리는 햇살을 맞으며, 하늘공원의 갈대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뜨끈한 컵라면을 먹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고.
이 사람과 결혼하길 잘했다
그 이후로, 주변에서 언제/왜 결혼을 결심하게 됐냐고 물어보면, 농담 삼아 이야기한다. “남편이 들고 온 컵라면이 너무 맛있어서. 그때 결혼이 하고 싶어졌어.” 그게 무슨 엉뚱한 대답인지 갸웃거리던 사람들도 앞 뒤 이야기를 들으면 고객을 끄덕인다. 그렇게 세심한 사람 흔하지 않다고, 다른 사람을 잘 챙길 줄 아는 따뜻한 사람과 결혼하니까 행복하게 잘 살 거라고 덕담을 건넨다.
그리고 그는, 내 남편은, 결혼한 지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출근 시간이 늦은 나를 위해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침마다 모닝콜을 해주고, 먼저 집을 나설 때면 입에, 눈에, 볼에, 입맞춤을 하고 간다. 결혼을 마음먹은 그 날 이후, 가족의 반대로 어려운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정말, 이 사람과 결혼하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