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위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다. 순간 망설였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하지만 다시 집으로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고, 그러면 하교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또 둘째 아들과 길이 엇갈릴 것이다.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학교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는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빗방울이 퍼지며 번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여기 서 있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학교 앞에 도착하니 3학년인 둘째 아들이 나왔다. 다행히 하교 시간은 맞췄지만, 우산을 챙기지 못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는 듯했다. 순간 떠오른 생각에 6학년인 큰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산 두 개 들고 내려와 줄 수 있겠니?” 큰아들은 별다른 말 없이 알겠다고 했다.
잠시 후, 둘째 아들과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저 멀리서 큰아들이 우산 두 개를 들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세월이 참 빠르구나.’
아장아장 걸으며 어린이집에 보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 동생과 엄마를 위해 우산을 챙겨오는 모습이라니. 육아를 하다 보면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간다고들 하지만, 이렇게 직접 체감하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문득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정말 자세히 바라본 적이 있었을까? 바쁘다는 핑계로, 일상에 치여 아이들의 모습을 스쳐 지나가듯 보고만 있었던 건 아닐까?
우산을 건네주는 큰아들의 모습을 보니 새삼 듬직해 보였다. 키도 부쩍 커 있었고, 표정에는 어딘가 어른스러움이 묻어났다. 사춘기라며 짜증을 내고, 때로는 퉁명스럽게 굴 때도 많았지만, 이렇게 동생과 엄마를 위해 망설임 없이 우산을 챙겨 내려오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뭉클했다.
“고마워.” 우산을 받아 들며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괜찮아.”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우산을 동생에게 건넸다. 그 순간,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이 순간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늘 지나가버리는 하루하루가 아니라, 찰나의 순간순간이 모여 인생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아이들의 발걸음, 우산을 받쳐 든 작은 손, 그리고 내 마음속에 스며드는 따뜻한 감정. 이것들이 모두 합쳐져 나의 오늘이 된다.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온전히 느끼는 것이 삶을 깊이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졌다. 세 식구는 각자 우산을 펼쳐 들고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우산 너머로 보이는 아이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이제는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맞출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새 내 아이들은 이렇게 자라 있었다.
빗속을 함께 걸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감사함을 되새겼다. 아이들이 곁에 있다는 것, 그리고 함께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깨달았다. 사춘기의 문턱에 서 있는 아이들이 때때로 미워 보일 때도 있지만, 이렇게 다정한 순간들이 있기에 그 모든 시간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오늘은 아이들의 성장을 다시금 눈으로 확인한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삶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찰나의 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