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 복슬복슬한 흰 털에 초록과 파랑이 오묘하게 섞인 눈의 귀여운 고양이. 외모평가를 하고 싶지 않다만 말리가 예쁜 건 사실이었다. 고양이라서 너그럽게 본 게 아니라 크고 맑은 눈, 쫑긋한 귀, 새하얗고 깨끗한 털까지 미묘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고양이였다.
그런 말리를 보고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저마다의 감상평을 이야기했는데, 그중 정미의 평가가 괴이하기 그지없었다.
“너무 귀여워! 삶아 먹고 싶어!”
고양이를 삶아 먹는다고? 그게 무슨 징그러운 발상이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 보신탕도 먹어? 내 질문에 정미는 질색하며 ‘귀여운 것을 보았을 때 포악해지는 인간의 습성’에 대해 설명해 주었으나 전혀 와닿지 않았다.
똑같은 상황 앞에서 사람들의 행동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 회를 좋아하네 싫어하느니 하는 영역을 떠나 행복과 슬픔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 슬프니까 전화기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는 사람이 있고 잠을 자버리는 사람이 있다. 한국 사람끼리도 그런데 나라가 다르다면? 문화권이 다를수록 각자의 색은 더더욱 다채롭고 뚜렷하다.
한국 토박이인 내가 가장 낯설었던 문화권은 서양이었다. 영어가 자연스러운 동네에서는 물건을 계산할 때조차 계산원의 안부를 물어야 했다. 한국이었다면 편의점 직원에게 삼각김밥을 내밀면서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같은 소리를 했다면 이상한 취급을 받았겠지만 여기서는 계산만 해달라고 하는 건 상대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듯했다.
이놈의 하왈유 아임파인 땡큐 앤유의 나라는 길을 걷다가도 초면인 이에게 웃으며 스몰토크를 해야 했다. 러닝 중인 사람도 헉헉 거리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며 참 괴롭다고 생각했지만 지내다 보니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가볍게 주고받는 인사가 눈송이처럼 쌓이다 보니 어느새 두터운 솜이불이 되었다. 묘하게 긍정적인 공기가 마을 전반에 흘렀다. 인사하고 나서 오늘 시장에서 오렌지를 많이 샀는데 하나 드려도 될까요 하는 이야기가 매끄럽게 흘러나오게 되는 식이다.
같은 동양이지만 한국과 동남아시아는 또 느낌이 다르다. 현재 호찌민에 살고 있으니 베트남을 예시로 들어보자. 오토바이의 나라답게 관련한 추억만 해도 수두룩하다. 오토바이가 넘어졌을 때 다가와 일으켜주는 주변 사람들이라던가, 고장 난 오토바이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자 기꺼이 본인 오토바이를 끌고 와 도와주던 동네 주민들 같은 일화들 말이다.
이곳 사람들은 참 헌신적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의 시간을 되돌아봤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친절과 애정을 전달했더라. 내가 느끼기에 한국의 호의는 무관심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길에서 누군가가 엎어졌다면 상대가 부끄러울 수도 있으니 오지랖 부리지 않고 모르는 척해주는 게 매너인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면 굳이 나서지 않는 문화. 과한 친절은 도를 믿습니다라던가, 옥장판 강매 요구자로 비칠 수 있는 배경 탓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의 호의가 타인에게는 당황스러움으로 다가올지도 몰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떤 쪽이든 좋은 이유에서 비롯된 문화이길 바란다.
누군가에게는 건조하다고 느껴질지 몰라도 따스한 무관심이 고마울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실수로 방귀를 뀌었을 때 속이 괜찮냐고 묻기보다는 안 들리는 척하는 편이 덜 부담스럽다. 매 순간 지나치는 사람에게 인사할 준비를 하며 표정을 신경 쓰고 있자면 무표정으로 멍을 때리던 한국의 삶이 그립기도 하다.
내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목놓아 울고 있다면 아마 서구권 사람은 달링, 무슨 일이야 하며 말을 걸 것이다. 베트남 사람은 휴지와 바나나 같은 음식을 건네리라. 한국이라면 굳이 아는 척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대신 근처에 편의점에서 사 온 휴지가 어느새 놓여 있을지도.
어떤 문화권의 방식이 정답인가. 물론 답은 없다. 우리는 각자의 결로 서로에게 온정을 베풀며 살아가고 있다. 다양한 색채의 고마운 마음들을 맛볼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저마다 다른 표현의 방식들을 내게 성숙하게 받아들이기를. 그리고 나 역시 상대에게 알맞은 친절을 베풀 수 있길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