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의 나는 친구가 공부를 많이 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는 아이였다. 친구들이 원한 건 불안감을 공유하며 마음을 달래는 것이었지만, 난 그걸 몰랐다. 그래도 친구들이 눈치 없는 나와 어울린 까닭은 한편으로 믿음직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진실과 하얀 거짓말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적당히’가 모범 답안이겠지만 그게 쉬웠다면 이 세상에 갈등이란 없었을 테다.
뜬금없이 중용의 미덕에 대해 고민하게 된 배경은 이랬다. 호찌민 풋살팀 친구들과 자동차로 왕복 6시간 거리인 붕따우에 대회를 하러 갔다. 그렇게 4번, 도합 24시간을 투자해 대회장에 갔지만 내가 뛴 경기는 딱 한 번, 그것도 5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날 결승은 4대 1로 승리했다. 이 정도 점수 차이면 당연히 후보 선수도 뛰게 해 줄 줄 알았건만 매정하게도 나를 비롯한 절반의 팀원들은 끝내 경기장을 밟지 못했다. 속상했다. 우리 팀 어땠냐고 환히 웃으며 묻는 친구들 앞에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짜증나는 건 짜증나는 거지 뭐. 그래서 그냥 솔직하기로 했다.
이곳이 외국이라는 사실을 좀 더 염두에 뒀어야 했다. 이런저런 어휘들을 활용해 예쁘게 포장한 말과 투박하게 핵심을 던지는 행동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너’와 ‘니’가 엄연히 다르듯 부정적인 말은 특히나 단어 선택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데 내 조악한 베트남어 실력이 만들어 낸 결과물은 이랬다.
“난 행복하지 않아.”
청소년 드라마에서 반항아 주인공이 통제형 부모에게나 칠 법한 대사다. 풋살팀 사람들이 술렁이더니 내 눈치를 보며 본인들끼리 속닥이기 시작했다. 저기요, 제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지 시력은 좋거든요. 아무튼 그때까지만 해도 당당했다. 싫은 걸 싫다고 말하는 게 죄도 아니고 말이야. 기분이 별로였던 건 사실이라고.
자신이 한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무거웠다. 풋살 팀원들이 하나둘씩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주장 언니부터 와서 아임 쏘리를 연발하는데 하필 발음도 어눌해서 더더욱 내가 천하의 나쁜 놈처럼 느껴졌다. 왜 언니가 미안해요, 팀이 승리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아요. 이런 내용을 전하고 싶었으나 내가 할 줄 아는 말이라곤 아니야, 괜찮아 가 전부였을 뿐이었다.
걱정이 된 팀원들은 응우옌에게 도움을 청했다. 비록 대회 때는 없었지만 영어능통자이자 팀의 총무 응우옌이 중간 역할을 해준다면 오해가 풀리리라. 나도 마음이 놓여 다시 한번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경기에서 뛰지 못해 속상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실력이 없어서 경기에 참여하지 못한 거 이해해. 그건 내 문제잖아? 내가 더 열심히 연습을 할게.”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통역 어플이 아니라 한 명의 인격체였던 응우옌은 자초지종을 듣고는 심각해졌다. 그는 내 입장을 전달해 주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이건 우리 팀이 고쳐나가야 할 숙제야. 잘하는 사람만 경기에서 뛸 수 있다면 그게 어떻게 팀이겠어. 당장 가서 주장에게 문제 제기를 해야겠어. 으악. 갑자기 선수 발탁 공론화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다음 훈련 날 주장 언니는 내 눈을 피했다. 이해는 됐다. 사과를 했는데도 돌아오는 게 항의였으니 마음이 상했을 수 있겠다 싶었다. 유난히도 패스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착각이라면 참 좋았겠으나 내가 공을 잡으면 아무도 빼앗으려 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기분 탓은 아닌듯했다. 접대 축구를 이런 식으로 경험하게 될 줄이야. 부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당신들, 지금 나 불편하지. 당장 그만둬. 여러 솔직한 말들이 차올랐으나 애써 눌렀다. 정제되지 않은 솔직함은 그저 감정 분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미 배웠다. 같은 업보를 두 번 쌓을 수는 없었다.
그냥 눈치 없는 외국인 행세를 했다. 제대로 감정과 상황을 공유하지 못할 바에는 이 편이 나았다. 당신들이 나에게 보이는 불편한 기류, 이해할 수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아무것도 몰라. 동네 바보 포지션으로 나오자 그들도 철딱서니 없는 외국인이 잠시 속상했었구나, 하고 넘어갔다.
외국인이기에 생긴 오해이지만 한편으로 외국인에 대한 고정관념 덕에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너무 내 감정만 생각했나 싶으면서도 내 마음을 보였기에 뛰지 못한 것에 대한 서러움을 건강하게 넘겼다는 생각도 든다. 여전히 정답을 모르겠지만 베트남어 배우기가 필요하다는 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