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야호 치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장래 Apr 03. 2024

언어를 뛰어넘는 순간

카페 테라스에 홀로 앉아 계신 할아버지에게 눈길이 간다. 아무래도 블루투스 마이크를 들고 태블릿 안의 악보를 보며 열창을 하고 계시면 그럴 수밖에 없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봤으나 아무도 음악에 심취한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곳은 베트남. 이 자유분방한 문화에 새삼 놀란다.



역주행이 다반사인 오토바이, 식당에서 당당히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들...... 당혹스럽지만 ‘고유문화’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받아들이게 된다. 풍뎅이만 한 바퀴벌레가 인도를 지나다녀도 원래 그런 곳이라고 여기는 수밖에. 다 알겠는데, 아직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죄송합니다는 씬 로이(Xin loi)라며. 이 상황에서 미안한 표정으로 씬 로이라고 하고 있잖아. 미안하다고. 그러나 이들은 내 사죄를 받아주지 않는다. 애초에 사과를 했는지도 모른다. 나름의 생활회화를 시도할 때마다 물음표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베트남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아니, 이 정도라고?



영어, 중국어에 이르기까지 나름 언어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콧소리 가득하게 그동안 들었던 단어들을 따라 말해봤지만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고의라는 의심도 해보았지만 그러기엔 머리를 맞대곤 얼굴을 찌푸려가며 내 말을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가족오락관이 따로 없었다. 언어 수준으로는 동네 개와 비슷했다. 사실 그마저도 앉아, 손, 을 베트남어로 모르니 개한테 밀렸다.




개만도 못하게 지내던 어느 날,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이 투르크 막토와 교감이라도 하듯 언어의 장벽이 뻥 뚫리는 경험을 했다. 풋살장이었다.

    

사이공의 여자 풋살팀이라는 말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간 그곳은 유니폼 차림의 튼튼한 여자들이 가득했다. 몸을 풀면서 누군가는 패스를 주고받고, 힘 넘치는 사람은 개인기를 시도하며 장난치고... 너무도 그리워하던 풍경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자기소개를 할 때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오랜만에 느끼는 티키타카에 눈이 번쩍 뜨였다. 구장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방금 옆 친구가 한 손짓은 보다 압박 수비를 하라는 뜻이고, 주장 언니가 머쓱하게 웃는 이유는 본인이 보기에도 크로스를 너무 깊게 찔러 주어서고... 이 순간만큼은 풋살에 관심이 없는 한국인 친구보다 베트남의 이들이 나와 더 통했다.




철저한 언어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중이었기에 말없이도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는 느낌은 정말이지 소중한 경험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수식으로 말하는 수학자나, 음악으로 보여주는 연주자들도 비슷한 쾌감을 느끼지 않을까. 세상에는 참 신비한 영역이 많다.









풋살이 끝나고 정리운동을 하자 다시 바보가 됐다. 나는 갓난아이로 돌아갔고 그들은 대다수가 영어 울렁증 보유자였다. 결국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기만 했다. 본인들끼리 쉬지 않고 하는 종알거리는 말들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적어도 공 앞에서 우린 하나가 될 수 있으니까.



함께 바라보는 초록 구장, 너나 할 것 없이 송골송골 맺히는 땀, 눈 맞춤과 함께 굴러오는 공. 이 모든 것이 참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망고라이팅을 멈춰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