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현지인 명의로 오토바이를 구매하다
밍은 사기꾼일까. 나는 5100만 동(한국 돈으로 280만 원)을 잃게 될까. 밍의 안면 근육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그의 속마음을 알아내려고 애쓰지만 될 턱이 없다. 영화 곡성을 찍는 기분이다.
상황은 오토바이를 구매하면서 시작되었다. 베트남에서는 외국인 명의로 오토바이를 사는 것이 여러모로 불리했다. 주기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서류들이 있고, 무엇보다도 번호판 색깔이 달라서 공안의 먹잇감이 되기 쉬웠다. 그러다 보니 외국인의 선택은 보통 둘 중 하나였다. 중고 오토바이를 구매하거나, 베트남 사람의 명의를 빌리거나.
후자를 선택해 밍에게 오토바이 구매를 부탁했다. 밍은 내 킥복싱 코치로, 베트남에 온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던 상태에서 부탁할 수 있는 최선의 존재였다. 본인 회원이니 잘 처리해 주겠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도 밍은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었다.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믿던 그 시절이 오래갔어야 했다.
이름을 빌려줬던 베트남 사람이 갑자기 오토바이가 본인 소유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오토바이를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의심의 시간이 펼쳐졌다. 생각해 보니 내 오토바이는 베트남 물가로 치면 상당히 비싼 물건이었다. 우리 집 가사도우미의 20개월치 월급에 해당했는데 그 정도면 직업윤리를 저버릴 수도 있는 금액이지 싶었다.
인터넷을 뒤지고 지인에게 물을 때마다 수많은 오토바이 사기 사례가 쏟아져 나왔다. 물론 나도 내가 좋은 이야기는 모조리 뒤로 하고 사기 사례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미 미끼를 물었는걸.
점점 밍을 바라보는 내 눈길에 경계심이 그득해졌다. 그러고 보니 수상쩍은 부분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번호판이 두세 달이나 지나야 나온다는데 그게 맞는 건가? 임시 번호판은 왜 받을 수 없다는 거지? 밍은 오토바이 안부를 물을 때마다 난처한 표정만 지으며 명쾌한 답을 주지 않았다. 사기꾼 같으니라고.
삼 주쯤 지나자 밍이 내 오토바이를 훔쳐간 것은 머릿속에서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무 연락 없이 상황이 방치될 리가 없었다. 소송을 해도 소용이 없을 테니 그냥 다 잊는 게 빠를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달랬다.
마구니 가득하게 살아간 지 한 달 차에 밍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토바이를 복싱장에 뒀으니 가져가라고 했다. 드디어 내게도 오토바이가! 신이 나서 달려가자 그는 오토바이 작동법을 설명해 주고는 본인의 오토바이를 끌고 앞장서서 내가 집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제야 밍이 해준 많은 일들 -번호판을 받아오고 경찰서에서 필요한 서류 작업을 했던-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나였으면 귀찮아서 하기 싫었을 것 같다. 이걸 모두 해결해 준(사실 아직도 서류 처리가 조금 남았다고 한다) 밍을 예비도둑 취급했다니... 너무 미안했다.
술을 사갔다. 7만 원짜리 위스키였다. 최저임금이 월 25만 원인 베트남의 경제시장을 고려했을 때 나름 힘을 준 금액이었다. 밍은 살짝 부담스러워하며 선물을 받았다. 고마움보다는 미안함이 더 많이 담겨있다는 사실은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방심하는 순간 다시 곡성으로 들어가곤 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순간 밍이 말을 바꿔 이건 나의 바이크니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를 위해 모든 의심을 멈추기로 했다.
You are what you see. 친구의 SNS에서 본 문구다. 어차피 주관적인 김에 희망, 사랑, 우정이 듬뿍 담긴 렌즈를 끼고 세상을 보고 싶다. 혹자는 대가리꽃밭이라고 하겠으나 더는 스스로가 만들어 낸 불신의 덫에서 고생하고 싶지는 않다. 뭣이 중헌디. 행복한 게 중허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