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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Mar 30. 2020

실패에 익숙해지기?  아니, 충분히 머물렀다 떠나기.

차기작 엎어진 소식, 그리고 그 사이에 마감 하나 해놓은 소식

그새 꽃이 찬란하게 피었다

또 한 달만인 것 같다.


그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일은 지난 브런치에서 소개했던 그 차기작이 한예종 전문사 장편 제작지원에서 보기좋게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번에는 후보군에도 선정되지 못했다. 그 정도로 부족한 작품이었나 하는 생각에 고통스러움을 참을 길이 없다. 한달을 넘기고도 나지 않던 발표에 내내 열병처럼 마음 졸였고, 탈락 소식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수료했기 때문에 개강을 하지 않는다) 개강일 저녁에 친한 동기에게서 탈락 소식을 전해들었다.


“아, 그렇구나. 누가 됐는데?”


다행이도 너무나 응원하던 동기였다. 아니었은들 내가 어찌할 수 있었겠냐만은 마음이라도 챙기려면 내가 응원하던, 늘 잘 되기를 바라마지않던 사람들이 잘되어 다행이라고 마음 먹는 것이 낫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며, 그제야 생각하는 것은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는 .


입학 당시 내가 세웠던 계획은 딱 세가지였다. 1, 적어도 앞으로 제작할 영화의 제작비 만큼은 내가 벌어쓰자. 2, 졸업하기 전에 딱 2개의 장편 시나리오를 가지고 나가자. 3, 어느 한 회사라도 나를 찾아주기를. 돌아보면, 내가 세운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셋다 결과적으로는 이뤄냈다. 아직 입봉과 거리가 가깝지 않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뒤덮는다. 이 슬럼프에 더 빠지기 전에 이 시나리오로 넣을 수 있는 새로운 제작지원을 찾고 앉아있으니, 가족이 묻는다. 왜 너는 슬퍼하는 법을 모르냐고. 네 최선에 충분히 아파해야 그 다음을 할 수 있는거야. 자꾸 어차피 떨어진 시나리오로 다른 제작지원을 노리려고 하지말고, 아 내가 부족했구나 슬퍼하며 하루 쉬어. 노트북 조차도 빼앗겨 가만히 앉아있으니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시 슬픔이 앞서고, 나는 이럴 때 마다 내 슬픔을 어찌할 줄을 몰라 당황스럽기만 하다.


잘 슬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 기뻐하는 일보다 몇 만배는 어렵고, 늘 인생의 고비마다 필연적으로 찾아오지만 기를 쓰고 피하게 되는 일인 것 같다. 이 늪같은 슬픔에 한번 빠져버리고 나면 다른 동앗줄이 내려오지 않을 것 같아서 슬퍼하기 보다는 다른 발로 또다시 늪을 걷는. 사실 나는 이럴 때마다, 유튜브에서 베어그릴스가 늪을 건너는 방법을 소개한 영상을 본 기억을 떠올린다.


죽은 양을 부목삼아 몸을 기대어 늪을 빠져나오는 영상이었는데, 자꾸 발을 딛으면 빠지니 몸에 힘을 풀고 양에 의지해 누운채로 몸을 끌어올리라고 했다. 내게 죽은 양이 될 존재가 과연 사람일지, 글일지 모르지만 어쩄든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몸에 힘을 풀고 누군가를 의지하며 몸을 부딪고 늪을 빠져나오는 것. 그래서 오늘도 브런치를 쓴다. 나처럼 실패한 누군가를 위해 우리 힘을 빼고 몸을 부딪히며 다시 마른 땅으로 걸어가자는 마음을 전하며.


이 영화를 꼭 찍고 싶었던 구절만을 여기에 남겨두고, 다시 다른 글을 써보려 한다.




면접관2   

그러니까 감독님 본인이야기네요?

수영  

 … (끄덕)

면접관2   

그럼 왜 이런 이야기를 썼냐 이런 질문은 크게 의미가 없어 보이고,

감독님 말따나, 돌멩이 하나 못 막아주고.

보증금 하나 마련해주지 못하는 사랑이야기를지금 이 시대에 하시려는 이유가 뭘까요?

수영  

… 그 동안 우리는 사실 사랑의 결속력에 대해서 말해왔던 것 같아요.

죽음을 뛰어넘는다거나, 신분을 뛰어넘는다거나.
그런데 진짜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 사랑은 아무것도 막지 못했거든요.

영화 하나 완성하지 못했구요.

친구가 될 뻔한 사람도 하나 잃었고.

… 헤어짐 하나도 막지 못했어요.


수영, 바깥을 본다. 어느새 늦봄이 완연하다.


수영 

바깥에는 새 계절이 왔는데, 아직도 나는 그 사람이 떠난 방 안에 멈춰있고…

그게 답답하고 억울해서 이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사랑은 조금 다른 의미가 아닐까 하구요.

면접관2

이를 테면요?

수영

이를 테면 이 시대의 사랑은 헤어짐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이런 거죠. 언제든 헤어질 수 있고, 너무 쉽게 서로의 소식을 모두 차단할 수 있는 이 시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찾아 다시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그 나약한 의지가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노리고 찍어 보려구요!

면접관3

…캐스팅은?

수영

(화사하게 웃으며) 당연히 그 사람이죠. …  캐스팅이 결국 바뀌었나보더라구요.

꼭 잘 되었으면 했는데. 지금쯤 많이 힘들 것 같아서 이 제작지원이 되면제가 먼저 손을 내밀 계획입니다.

우리 같이 졸업 작품을 찍자고. … 같이 다시 세상으로 나가 보자고.

면접관4 

만약에 안 되면요?

수영

(걱정) 이거 떨어지면요?

면접관4

아니, 이번에도 헤어지면요. 사실 한번 엎으셨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지난번처럼 외장하드 한강에 던지실 건 아니죠?

수영

… 그럼 헤어진 대로 찍을 겁니다.

세상에는 내가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사랑이 있더라.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하면서 보내야지요.




가수는 노래따라가고, 감독은 영화따라간다고. 수영이처럼 한 계절을 이 시나리오로 보냈고, 몇 계절동안 영화만을 생각한 밤이었다. 참 오래 머물렀으니, 이제야 한예종에서의 생활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며 보내려한다. 이 사랑이 안되었다해도 다른 사랑이 있다 믿는 것이 나의 힘이라 믿으며. 하루 술을 진탕 마시고, 다시 며칠 다른 제작지원의 마감기한에 맞춰 서둘러 기획안을 만들고 다시 제출하며 시간을 보냈다. 며칠만에 돌아온 집에서 몇년만에 이렇게 우리 집 앞 산책로가 예뻤나 하며 꽃 사진이나 찍고 거닐다 오니 드디어 마른 땅을 거니는 기분이 든다.


사실 새 계절을 맞아 꽤 행복하다는 일기를 전하며.


슬럼프를 겪는 모든 분들께 작은 위로를 전한다.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잃고, 지울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이렇게나 아파한다는 것은 반대로 그것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며,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잘 머물다 떠나야 한다는 말을 전한다. 당신에게도 곧 마른 땅이 닿기를 바라며. 이 브런치가 죽은 양 같은 부목이길 빈다.


다음번 글로는 뭘 또 사랑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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