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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Dec 27. 2019

"영화는 좀 잘 맞니?" 잘 맞는 일 하고 계신가요?

외전 2, 쇼핑가기 싫어요. 사람들 많단 말이에요

달력에 X자를 그어보니 12월 한 달 동안 딱 이틀을 쉬었다.    

  

나가는 날에는 학교부터 외부의 잡다한 스케줄을, 안 나가는 날에는 그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한 시나리오 수정, 후반 등등에 매달려 있었다. 첫째 주에는 ‘내 평생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다 외워본 날이 있었나’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두 번째 주에는 엄마 생신을 까먹어서(음력으로 쇠어서, 다음 주로 착각했다) 본가나 가려했으나 다음날 역시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 난생처음 꽃 배달을 시켜보았다. 셋째 주에는 세 번째 단편 영화를 결국 완성해냈고, 넷째 주, 마감을 끝냈다. 23일 밤, 겨우 한 시간 반 거리를 가뭄에 콩 나듯 오는 주제에 올 때마다 죽은 듯이 잠만 자는 내가 부모님은 참 서운했다고 한다.   

  

아무것도 안하고 팝콘에 티비만 봐도 이렇게 좋은데 왜 꼭 뭘 같이 해야해..?
동생은 남자친구랑 크리스마스 보내고 온다는데,
너는 기껏 와서 잠만 자니?    


혹시 죽었냐고 쿡쿡 찔러보시던 부모님이 안쓰러운 말씀에 한 마디를 하셨다. 그래서 대답했다. “엄마, 둘째 딸이 애인이랑 크리스마스 하니까 내가 가족이랑 크리스마스 하러 왔잖아. 즐겨.” 결국 다음날 등 떠밀려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 껍데기 같은 롱패딩 좀 벗으라시며. 코트, 니트, 다시 패딩, 이거 벗으면 저거 입고, 저거 벗으면 이거 입어보고. 매장언니가 “어머, 롱패딩에 덮여서 어깨가 좀 있으신 줄 알았는데…” 하는 얘기도 듣고 작은 사이즈로 바꿔서 또 입고…. 내가 보기에는 내가 이 여성스러운 코트를 몇 번이나 입을까 싶고…. 겨울에 치마 입으면 춥고. 지금 롱패딩을 벗어서 허리 밴딩이 있는 패딩을 입으면 이게 그렇게 큰 차이가 있나 싶기도 하고…(어차피 패딩은 패딩인 것, 꾸민 거라고 아무도 믿지 않을 거다), 55도 66도 팔이 짧아 보여서 별론데 엄마는 자꾸 사라고 하고….   

   

하하하하하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사지 않으니까 손을 또 잡고 나가셔서 편집샵에서 치마를 하나 사주셨다. 부들부들하니 예쁜 것 같긴 했다. 다음날은 다른 백화점을 가자고 하셔서 벌컥 화를 내버렸고, 오후쯤이나 되어 화해의 의미로 함께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혜원아, 넌 뭐 사고 싶은 거 없어?”
“음….
“보통 사람들은 내가 사고 싶은 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주고 싶은걸 사려고 일을 하거든.
너는 영화를 해서 돈을 벌면 뭘 사고 싶어?"
“서른 중반전에 한강 보이는 오피스텔. 꼭 욕조 있었으면 좋겠어.”     


머리를 감싸 쥐셨다. 그럼 서른 중반까지 너는 갖고 싶은 게 없을 예정이야?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작게 작게는 나도 사. 카드 내역에 커피부터 밥까지 자주 찍히잖아. 아니 크게크게. 네가 돈을 모아서 이거 사고 싶다 하면서 기다리는 거 없어? 맥북 프로? 그거 엄마가 사줄까? 아니, 나 그 정도 돈은 있어 사실. 근데 지금 맥북이 손에 익어서 걔가 좋아. 학교 나가서 편집을 해야 하면 그때 아이맥이나 하나 살까 고민 중인데…. 그럼 오늘은 뭘 좀 사고 싶어? 음... 몰라! 심즈4 확장팩...? 게임 말고. 와 돈 벌길 잘했다 싶을만큼 기쁘게 뭐 갖고 싶은거 없어?


영화는 너랑 좀 맞아?”

“응?”

“엄마가 보기에는 그 일이 너랑 안 맞아 보이는데, 힘들지는 않아? 넌 운동하는 것도 싫어하고, 무거운 거 드는 거, 뭐 하나하나 챙기는 거, 사람 많은 자리에 가는 거, 모르는 사람이랑 긴 시간을 보내는 거, 집 밖에서 자는 거, 다 싫어하잖아.”

“그런 거는 나만 싫어하는 게 아니라, 다 싫어해. 엄마”

“그래도 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있고, 더 받는 사람이 있다면. 넌 엄청 받아오잖아. 조금 더 안전한 일을 하면 어때? 안정적인 월급이 나오고, 일정이 네 의지대로 조정이 가능하고, 너 좋아하는 여행도 연차내고 슉슉 갔다 오고, 네가 불편해하는 것들을 조금 덜 해도 되는 일은? 엄마는 네가 회사원 해도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회사에 소속되는 일 중에 시간대가 조금 자유롭고 네 적성을 발휘할 수 있는 포지션도 있지 않을까?”     

근데 그 회사 입장도 들어봐야 하는거 잖아..

글쎄, 있을 수 있겠지.      


사실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무조건 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크지 않다. 누군가는 열정과 끈기라고 말하겠지만, 단적인 예를 들어 근래 개봉한 <엑시트>를 살펴보자. 만약 미래에서 온 내가 “혜원아, 이 영화가 개봉을 하면 900만 정도의 흥행을 하게 될 텐데 글 쓰는 데만 7년이 걸릴 거야, 제작에 2년 더! 그렇지만 900만!!! 9년을 견뎌서 신인감독이 이루기 어려운 엄청난 흥행을 얻을 수 있다면 너 할래?”라고 물으면 자신이 없다. (엑시트의 감독님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900만 너무 부럽다. 영화도 재밌었다. 다만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     


9년은 너무 긴 거 아닌가. 7년도 사실 너무 길다.       


요새 영화가 너랑 맞는 것 같냐는 말을 많이 듣는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세요.” 이정표처럼,

애정을 가진 많은 분들이 걱정을 담아 묻는다.     


사실 잘 모르겠다.     


사람에 치이고, 내가 해야 하는 선택이 너무 많을 때, 그 하나하나가 또 다른 선택을 부를 때 미칠 것 같다.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과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할 때. 그리고 그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할 때. 실패했을 때. 피해서 돌아갈 집이 없을 때. 하나하나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상대가 내 마음을 몰라줄 때. 나도 상대 마음을 도저히 모르겠을 때. 그게 결과로 돌아올 때. 체력적으로 지칠 때. 굳이 듣지 않아도 되는 말이나 상황에 노출될 때. 싫다고 말하기 어려울 때 그리고 겨우 이런 일로 매번 그만두면 나한테 남은 일이 없을 거야 하면서 무뎌질 때. 그럴 때 이 일이 정말 나랑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는 마치 부둣가에 혼자 안 팔리고 남겨진 물고기가 된 거 같은 기분이다. 제 처지를 모르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물고기에게는 닫을 눈꺼풀이 없고. 오가는 사람들은 차갑고, 공기마저 비리고 쓴 느낌.      


그러나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를 팔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나 생각해보면, 없다는 것.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시간과 에너지를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지 않은가. 감정을 다루는 이 직업에서 내 감정과 에너지가 자본으로 치환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다른 걸 파는 것보다는 즐겁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내 기준에 그렇다는거다. 어차피 스탯에 체력과 민첩이 없는걸..)


쓴다는 것은 내게는 바다 같은 일.      


끔찍하게 우울해서 바닥까지 가라앉다가도, 무엇이든 쓰고 있으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제야 보이는 것은 그때의 내 감정. 생각. 기분. 이 정서들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극을 쓴다.      


여러분도 이런 날이 있지는 않으셨는지.

이런 상황이라면 이런 정서를 느끼시지는 않으실는지.     

우리 서로, 각자
절대 내 얘기 아니라고 믿으며,
정말 내 얘기 같은 얘기를
한번 만들어 보면 어때요?     


같이 보고 싶은 것을 만들고, 찍는다. 영화감독은 내 목표가 아니라, 수단인 셈이다. 누군가와 하루를 나누고자 한다면, 내게 편한 방식은 영화라는 것. 그래서 7년은 길다. 한 이야기를 하고 잘 마무리 짓는데 적합한 시간이 얼마라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한 마스터피스를 위한 장인보다는 여러 영화를 통해 성숙해가는 이야기꾼이고 싶다. 세상에 수다 떨어볼 만한 아이템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

나는 그 변화가 보이는 감독이고 싶다.     


가령, 53년을 “나는 케이크도 너무 달고, 꽃은 안 좋아해.” 하며 매 해 딸이 꽃을 사가도

화병을 사지 않던 한 여자가,

문득 53번째 생일에 배달 온 꽃과 화병, 그리고 케이크는

딸 없이도 무척 좋았다는 이야기처럼.     


사랑하는 남편이 사 온 케이크와, 딸의 케이크,

먹지도 않는 케이크를 두 개나 두고도

아까움 없이 ‘오래 꽃봉오리를 피워놓는 법’을 검색해서

물에 설탕을 탔다가 꽃이 그만 시들어버려

내내 아쉬웠다는 얘기처럼.       


내 삶의 어제와 오늘이 반영되는 감독이기를 꿈꾼다. 그냥 쉽게 자주 찍고 싶다는 뜻이다. 겨우 3년 걸어본 이 길이 나의 바다라 단언할 수 없지만, 지금 흘러가는 이 물결이 이렇게 흐르다 보면 깊어지리라 믿는다. 잘 맞는 것 같은 일은 아니나, 잘해보고 싶고 즐거운 일임에는 확실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나를 위한 무엇을 사볼까나.     


해피 뉴 이어.     


다들 겨울에는 꽃을 사보시라.

어떤 꽃이 어울리는 사람인가 생각하는 그 마음부터

예쁘고 찬란하고 피어있는 매 순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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