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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특한 버라이어티 Sep 18. 2021

존재. 그 자체

Just because

I don't react does not mean

 I didn't notice.


인연과 조건에 따라  그저 인연 생 인연 멸, 오는 것을 그저 오는 줄 알고 가는 것은 그저 가는 것을 알아 거기에 어떠한 시시비비 분별없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해탈이다.

좋고 싫음을 분별하는 마음으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밴드에 올린 영어 한 문장으로 얼굴도 모르는 분과의 대화가 이어지게 되었다.







그분은 보고 있는 자가 불편하다 하였다.

에고는

좋고 나쁜 분별의 대상이 아닌데

그분의 그런 불편한 마음이

스스로 무엇을 추구하는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보고 있는 자가 왜 불편하지요?


방금 말했듯이 체험 이후로 없어져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어요.


혹시 그 자리는 확인하셨나요?


한 달 전인가 이 자리는 이미 확인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근데 제가 워낙 못 믿는 게 뿌리 뽑히지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무엇이 불편하신 건지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인식 주체라고 했던 그것을 바라보는 눈.  이것이 우리가 몰랐던  눈.


나라는 상, 아상, 보고 있는 놈. 이게 있는 게 맞는 건가요?


아, 잠깐이요 전혀 다른 거예요. 그 자리는 분별 이전의 자리이고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전부 분별 이후의 자리입니다.


그럼 제가 계속 분별 이후의 것들을 놓고 씨름하는 거지요?


그렇지요.


습의 무서움이로군요.


어떤 감정이 올라오지요?


네.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화난다 하는 것이 그렇게 분별한 이후의 자리이고요.


. 동일시하는 것. 순식간에 그렇게 동일시되어버립니다.


그리고 화나는 감정을 분별하기 이전의 자리.   


네.


그게 다 그래요.

그렇게 미세 번뇌에 현혹되어서 순식간에 동일시되어버리는데 거기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감정은 내가 아니니까.  영원하지 않잖아요.

 금방 사라지잖아요


네, 깨달음에 대한 고정관념이 정말 강하고 무섭네요.


네, 그래서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말고 흘려보내라는 것. 분별하지 말고 그러다 보면 그 분별하지 않는 것이 시간이 자꾸 길어진답니다.

 그 자리 확인 후 공부 시작이랍니다.


네, 한꺼번에 녹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녹아들겠지요.


저도 감정이 올라오는데 그것이 올라오면 바로바로 알아차리고 있어요.

아, 내가 이런 감정이 지금 올라오는구나 하고..


그러니까 나라는 생각도 화라는 감정과 똑같다는 말씀인 거지요?


현재 있는 이 순간만 나라고 인식하는 것이지 실제 나의 것은 없다.

다 분별망상입니다.


아, 정말 눈물이 날 것 같네요. 없다 이거 자체가 다 드러난 인식 작용이군요.


그렇지요.

눈물이 날 것 같지요?

이미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도 마음 장난, 깨닫지 못한 것도 마음 장난.


계속 확인해야 할 것 같아요. 이렇게 너무 뿌리가 깊어서.. 그래도 이렇게 확인했으니...

지금 이 자체 인식 작용, 의식 작용은 다 알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난 대상들이고 이 인식, 의식은 알 수 없음을

절대 알 수 없어요.

그러므로 그냥 인식, 의식 작용만 있는 게 맞아요.

 부분은 봤기 때문에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근데 이게 일상으로 녹아들지 않아서 문제인가 봅니다.


알 수 없는 곳이라는 것도 다 마음의 산물입니다.

존재하는 동안에는 인식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거고 인식 때문에 또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고.


대화가 깊어져서 1:1 채팅으로 넘어왔습니다.

갖고 계신 의문도 제가 헷갈렸고요. 아무래도 챗이 바로바로  빠르니까.


네,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아비달마에서는 마음의 형태를 현상계의 요소를 구분하여 나누는데 75가지로 나누었다 합니다.

애증, 집착. 분노. 아상등등... 그것을 더 세분화하면 백가지도 팔만 사천가지도 된다 하였습니다.

다 분별망상입니다.


아, 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생겼네요.

절대 알 수 없는 . 이게 저도 무슨 장소 같은 거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절대 파악이 안 되어서 제가 이 알 수 없음도 대상으로 잡고 있었나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 자리가 확인하신 그 자리일 겁니다.


네. 그 자리는 는 것 같아요. 다 들어봐도 다른 말하시는 분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좀 더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하는 자리가 있지요?


하하 미치겠네요.  네, 계속 속아요.


그 생각, 분별을 떠올리기 이전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어디입니까 하는 자리요


그 분별 이전의 자리.


네.

네 하는 자리. 아 제가 자꾸 도망가네요. 이 자리에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저도 끄달리는 중생이라.

이게 글로 풀이하기에는 한계가 있네요.


네, 맞아요


저도 이 자리 확인한 지는 얼마 안 되었습니다.

다만 확인 이전에도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진 이후로 계속 공부를 하고는 있었고요.

다른 분확인시켜 드리기엔 너무 공부가 없고요. 다만 공부를 같이 나눈다면 얼마든지 감사합니다.


에고는 지금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저는 요즘 그걸 보고 있는 중이에요.

지금에 있는 것을 두려워 하는 구나.

그래서 항상, 과거 미래의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그래요.

저도 과정 중에 있어요

지금에 있는 훈련, 지금 소리, 지금 감각, 지금 생각.


과거는 없어요. 미래도 없고요.

내가 지금 보는 것이 전부, 지금 듣는 것이 전부, 오감을 통한 맛, 냄새, 감촉 생각하는 모든 것의 전부.

여기서 일어나는 이것이 전부.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경험 이전의 자리.


그런데


에고를 없애는 것이 가능할까요?

생각, 감정은 다 에고가 하는 것.

없어지면 나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가 아니라

나라는 개체는 항상 있는데

두 가지가 같이 존재하는 듯합니다.


한 폭의 그림인데 그냥 그 안에 내가 같이 있어요.

바라보는 게 아니라

 판단 없이 그냥 있어요. 

배경처럼.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창문 밖 그림 속 풍경이

어둠과 교회지붕위 십자가와 나무와 별과 밝아오는 여명임을 알고 그같이 구분하는 자리.


전혀 이질적인 그 두 가지가 함께 있어요.

두 가지가 같이 양립합니다.

입자이면서 파동이듯이.


우리가 판단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판단을 하는 것이 가능한  같아요.
그래서 풀이가 가능하다.

분별 이전의 그 자리

삼라만상이나 그저 그렇게 있을 뿐.


에고가 없어지면

 나라고 표현할게 아무것도 없구나.

 말할 것이 없구나가 아니고.
나라는 개체는 항상 있는데 그래서.


비상비비상처


상이 없어요.

하지만  또 상이 없다는 비상을 부정하는

비비상이

그 말이

아닌가.

행간의 의미를 잘 보아 보세요.
의미 없는 체험이 아니고 좀 더  자리가 밝아집니다.
사띠.


        비상비비상처는 깨달음의 끝자리가 아니라

윤회의

마지막

자리이니



사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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