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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룡 Jan 17. 2021

그녀의 목표는 정말 체스 챔피언이었을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퀸스 갬빗> 리뷰

한 소녀가 끔찍한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 들어가게 된다. 보육원에서도 또래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그녀는 우연히 지하실에서 건물 관리인과 체스를 두게 된다. 체스에 흥미를 느끼며 점차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는 소녀. 하지만 보육원에서 나누어주는 안정제에 중독되어 사고를 친 그녀는 더 이상 보육원에서 체스를 두지 못하게 된다.


몇 년 후, 청소년의 나이가 된 그녀는 운 좋게 양부모를 만나 입양된다. 이제는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여야 하는 보육원과 달리 부모님도, 그녀의 방도, 자유도 생겼다.


이제 이 소녀는 다시 체스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이 소녀는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본 리뷰는 드라마 <퀸스 갬빗>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나, 드라마 특성상 내용을 알고 보아도 재미를 크게 해지지 않습니다.


<퀸스 갬빗>은 1950년대를 배경으로 보육원에서 자란 불운한 소녀가 체스 세계 챔피언이 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넷플릭스 탑10을 기록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체스를 다룬 드라마이지만 체스를 심도 있게 다루기보다는 주인공인 베스의 감정선과 서사에 집중한다. 스포츠 드라마이면서 경기가 아닌 프런트 위주의 이야기를 다룬 우리나라의 <스토브리그>와도 닮은 점이 있지만, <퀸스 갬빗>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기보다는 계속해서 주인공 베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래서 체스를 전혀 몰라도 드라마를 보는 데 지장이 없다. 하지만 실제로 체스 그랜드마스터의 컨설팅을 받아 경기 장면을 구성한 덕에 조금씩 나오는 체스판도 매우 현실적으로 묘사되므로, 체스를 알면 조금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자극적인 드라마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퀸스 갬빗>은 다른 드라마들의 플롯과는 전개가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 흔한 악역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양어머니도 악역인가 싶더니 사실은 술에 빠져 사는 가여운 사람으로 그려지며 오히려 그녀의 죽음이 베스가 각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양아버지도 악역이라고 하기엔 잠깐 스치듯 등장할 뿐이다. 체스에 있어서 마지막에 넘어야만 하는 최종보스격인 보르고프도 주변 사람들이 베스가 고아라고 험담할 때 고아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표현할 줄 아는 젠틀한 신사로 그려진다.


극 전반에 걸쳐 갈등을 조장하는 악역은 없기에, 유일한 불안요소는 베스 자신이다. 베스는 어릴 적 보육원에서 나누어준 안정제 덕에 체스 실력을 빠르게 올리지만, 반대로 안정제에 중독되어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다. 성인이 된 후에는 양어머니처럼 술에 빠져서 하루도 술 없이는 지내기 힘들 정도가 된다.


안정제에 중독된 어머니(생모)는 결국 망상에 빠져 살다가 베스와 함께 동반자살을 선택했고, 양어머니도 고독 속에서 술에 빠져 서서히 간을 망가뜨리다가 생을 마감한다. 베스도 결국 약이나 술에 빠져 두 어머니처럼 무너져버릴지, 아니면 술과 안정제를 이겨내고 체스 세계 챔피언이 될지, 모든 것은 그녀에게 달렸다.




<퀸스 갬빗>은 얼핏 보면 주인공인 베스가 역경을 이겨내고 체스를 통해 세계 챔피언이 되는 성공스토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베스가 원하는 것은 정말로 세계 챔피언이 되는 것이었을까?


주인공 베스 하먼을 연기한 안야 테일러 조이는 감정을 크게 내비치지 않으며 눈빛으로 연기하기 때문에 그녀의 감정을 읽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주인공 베스 하먼을 어릴 적부터 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보다 그녀에 대해 잘 알 수 있으며, 악역이 없기 때문에 그녀의 감정선에 더 집중할 수 있다. 드라마는 부모를 잃은 불운한 소녀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면서 우리가 그녀의 행복을 계속해서 응원하도록 만든다. 결말에 다다랐을 때는 그래도 베스가 행복해 보이는데, 그녀는 과연 세계 챔피언이 되어 행복한 것일까?



베스는 성장 과정에서 안정제에 중독되고, 술에 빠져들며, 체스를 통해 승리에도 중독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스가 왜 체스를, 안정제를, 술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베스는 보육원에서 또래 친구들과도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모든 수업은 따분하게만 느껴질 때 관리인 샤이벨을 통해 체스를 처음 접한다. 체스는 따분하고 고독한 보육원 생활 속에서 그녀가 처음으로 호기심을 가지게 된 존재였지만, 체스를 통해 그녀는 자신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주는 샤이벨 씨와 소통하게 된다. 그리고 체스판 하나도 마음대로 만질 수 없는 통제된 곳에서 유일하게 체스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안정제에 취한 상태로 천장에 체스판을 그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체스와 안정제는 그녀의 고독함을 달랠 수 있는 하나의 탈출구였다.


베스는 양어머니인 앨마에게 입양되지만 앨마와 베스의 관계가 그다지 따뜻해 보이지는 않는다. 앨마도 피아니스트를 꿈꾸었으나 현재는 집에서 고독하게 지내고 있어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베스를 입양한 것인데, 베스와 앨마는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주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하지만 베스에게 앨마는 유일한 가족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해주지 못하더라도 앨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결국 미성년자였던 베스는 술에 빠져 살던 양어머니 앨마에 의해 술을 처음으로 접하고, 나중에는 혼자 있을 때면 엘마처럼 술을 마시는 것이 일상이 된다. 결국 체스도, 안정제도, 술도 처음에는 그녀의 외로움을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다.



베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체스 챔피언이 되는 것보다는,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옆에 있고, 맛있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베스는 파리에서 보르고프와의 결승전을 앞둔 채로 친구 클레오와 술을 마시며 이렇게 말한다.

만약 내가 여기서 살게 되면 연극에 연주회도 보러 다니고 매일 새로운 카페에서 점심 먹을 거야. 옷도 여기 여자들처럼 입을래. 옷도 너무 잘 입고 헤어스타일도 완벽하잖아.


그동안 얼굴 속에서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던 베스였지만 이렇게 말할 때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움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체스 시합을 하러 미국에서 파리까지 왔는데, 그 중요한 결승전을 앞두고 술을 마시는 것은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다. 결국 클레오와 함께 마시기 시작한 한 잔의 술 때문에, 다음 날 그녀는 늦잠을 자고 술이 덜 깬 상태로 경기에 임하여 보르고프에게 완벽하게 패배한다. 그녀는 왜 술을 마시자는 클레오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을까? 그녀에게는 물론 승리도 중요하지만, 이 먼 곳에서도 먼저 전화를 걸어 술을 한 잔 하자고 하는 친구 클레오의 존재가 더 소중했는지도 모른다.



<퀸스 갬빗>을 보는 내내 주인공 베스에게는 여러 번 위기가 찾아온다. 베스는 그녀가 겪는 수많은 역경을 쉽게 이겨낼 정도로 멘탈이 강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몇 번이고 그녀가 이 역경을 이겨낼지 결국 무너질지 걱정하고 응원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다다를 때마다 그녀를 구제해준 사람은 모두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그녀가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 들어갔을 때 친구 졸린과 관리인 샤이벨 씨 덕에 보육원 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양어머니가 금전적으로 도와주지 않아 체스 대회에 나갈 수 없을 때도 샤이벨 씨가 돈을 보내 주고, 양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죽고 혼자가 되었을 때 먼저 전화를 걸어 그녀의 옆을 채워준 것은 친구 밸틱이었다. 파리에서 보르고프에게 패해서 잠시나마 폐인이 되었을 때 졸린을 비롯한 친구들 덕에 이겨내고, 졸린은 베스가 경비가 없어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경기에 참여하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학비를 선뜻 빌려주어 그녀를 도와준다.


한 때, 난 네 전부였어. 그리고 한 때, 넌 내 전부였고
우린 고아가 아니었어. 서로가 있었으니까.
난 네 수호천사도 아니고 널 구해주러 온 것도 아니야.
너한테 내가 필요하니까 여기 있는 거야.
그게 가족이야. 그게 우리고.


특히 보르고프와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친구들의 도움이 빛을 발한다. 러시아에서는 미국과 달리 팀으로 전략을 함께 짜기 때문에, 어드전으로 경기를 중단하고 다음 날 재개하기로 했을 때, 모든 것을 혼자서 연구해야 하는 베스는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 먼 곳에서 소식을 들은 베니와 밸틱을 비롯한 친구들이 밤새도록 모든 수를 연구하여 그녀를 지원해 준다. 이렇게 주변에 소중한 친구들이 있음을 느낀 순간, 그녀는 약과 술에 의존하던 그동안의 트라우마를 모두 이겨냈을 것이다. 그 덕에 다음 날 경기에서 친구들이 분석해 준 수와 다르게 경기가 흘러갈 때, 그녀는 안정제 없이도 천장에서 체스판을 그려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경기에서 승리한다.



세계 챔피언이 된 베스는 미국 대통령의 초청을 받는다. 세계 챔피언이 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면, 그녀는 그 영광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걷고 싶다며 공항으로 가는 차에서 내린다.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예쁜 공원을 걷고, 거리에서 체스를 두고 있는 노인들 사이를 걷는다. 그리고 그녀에게 체스를 가르쳐준 샤이벨 씨를 연상되게 하는 한 할아버지와 함께 체스를 두며 드라마가 끝난다.


베스에게 가장 큰 목표는 과연 체스 챔피언이었을까?

그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 함께 거리를 걷는 것은 아니었을까?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한 '퀸스 갬빗'은 체스 오프닝 중 하나로, 폰 하나를 희생하는 대신 체스판 중앙을 차지하여 경기 전반에서 이점을 가져가는 전략을 말한다. 마지막에 베스는 보르고프와 결승전을 치를 때 '퀸스 갬빗'으로 경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엔드 게임에서 그녀는 자신의 폰을 상대편 진영 끝까지 전진시켜 퀸으로 승진시키면서 승기를 잡는다.


이 마지막 경기는 드라마 전체를 커다란 은유로 보여 준다. 그녀는 불우한 고아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많은 희생과 역경을 견뎌야 했지만, 지금까지의 그녀의 인생은 '퀸스 갬빗'이었으며 그 덕에 이제는 자신의 인생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마지막에 그녀가 모스크바의 거리를 걸을 때 기다란 흰 코트에 방울이 달린 흰 모자를 쓰고 있는데, 마치 폰에서 승진한 백의 퀸처럼 보인다.


이제 그녀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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