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위한 치킨 수프, 백숙
사랑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닭고기를 좋아한다. 튀긴 닭이든, 삶은 닭이든 굽든 찌든 모든 닭요리를 가리지 않고 먹는다. 먹는 부위도 대체로 호불호가 적다. '닭'이란 동물의 살은 어쩌면 지구 상에서 가장 흔한 동물성 단백질일지도 모르겠다. 세계적으로도 닭 요리가 없는 곳은 드물고(아마 닭을 잘 키우지 않는 사막지역 정도가 아닐까?) 종을 놓고 봤을 때도 닭고기를 주식으로 할 수 있는 생물이 꽤 많다. 반려동물 사료시장에서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닭고기에서 나오는 단백질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가끔 닭고기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에게 나는 현대인의 필수품을 먹지 못한다는 동정심을 가지기도 한다. 대체로 매우 쓸데없는 동정심이다.
한국에서 통닭(Chicken)은 튀긴 닭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이지만, 굳건히 닭 요리 세계의 정점을 차지하는 요리가 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보양식으로 사랑받는 닭백숙이다. 이 글에서는 '백숙'으로 줄여 부르겠다. 삼계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두 음식은 대체로 근본은 같으나 크기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닭의 크기다. 뚝배기 하나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은 닭(주로 한 달 정도 크기의 영계)을 사용한다. 크기가 크기이니만큼 죽을 따로 끓이기 번거로우니 닭 안에 찹쌀과 약재를 채워 넣고 통째로 삶는 식의 조리를 한다. 백숙에 사용되는 닭은 일단 크다. 서너 사람이 둘러앉아 먹을 정도로 국물도 넉넉히 넣는다. 닭이 크니 살이 질겨 오래 삶아야 하고, 닭의 잡내를 잡고 몸을 보하기 위해 약재도 들어간다. 닭을 푹 고아서 만드는 곰탕이라고 할 법하다. 닭고기를 먼저 먹고, 남은 국물에 죽이나 칼국수를 끓이는 것이 보통 백숙을 먹는 순서다.
삼계탕을 만드는 집은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백숙은 좀 다르다. 일단 '예약 필수'인 곳이 많다. 닭의 살이 연하게 찢어질 때까지 푹 끓여야 하고, 약재의 성분도 우러나야 하니 2시간이나 3시간 전 예약을 해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후루룩 국밥 먹듯 먹고 떠날 수 있는 삼계탕에 비해 백숙은 고기도 뜯고, 국물도 먹다가 죽이 끓는 것, 국수가 익는 것도 보고 배가 빵빵하게 되어 가게를 나선다.
그래서 집에서 백숙을 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적어도 내게 백숙은 그런 음식이다. 나 홀로 먹는 거라면 몰라도, 여럿이서 약속을 잡고 만나는 것이라면 더더욱. 들어가야 할 재료도 많고 손질도 쉽지 않다. 쌀과 녹두도 불려놓아야 하고, 야채도 썰어놔야 한다. 닭은 약속시간 한참 전부터 물속에서 끓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양을 맞추는 것도 큰일이다. 보통 여름에 먹는데 특히 복날에는 유난히 더운 것이 고생을 더한다.
사실, 그럼에도 백숙이 먹고 싶었다. 복날 보양식을 챙기는 것이 큰 의미 없는 행사라지만 제대로 만든 백숙이 그렇게나 먹고 싶었나 보다. 며칠 내내 노래를 부르는 철없는 친구에게 요리 대장 친구 하나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손맛이 늘 좋은 친구라 그날 먹은 백숙은 인생 백숙이 되었다.
사실 백숙은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 사람들의 소울푸드 인 치킨 수프가 있다. 닭고기 뼈를 진하게 고아서 만들어 낸 그 수프는 지역마다 특색이 조금씩 다르고 어떤 곳에서는 고기를 넣는다거나 그림이나 우유를 더 진하게 끓이기도 하는 음식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닭고기로 만든 수프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고기인데 그런 반면 맛은 깊어 전 세계가 사랑하는 음식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자주 여행을 가고 출장을 갔던 내게도 입맛이 없을 때는 어느 나라에나 있는 닭고기 수프를 찾게 되었다. 백숙은 아니지만 백숙의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음식들이 꼭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지금은 이미 찬바람이 불고 있지만 찬바람이 불어서 오히려 백숙은 더 먹고 싶은 음식 중에 하나다. 굳이 복날에 보양식이라고 할 것도 없다. 백숙만큼 '이런 날씨'가 아니라도 어울리는 음식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언젠가는 집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푹 고은 닭백숙 한 그릇을 함께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 서로 간에 눈만 보고 대화를 해야 할 때도 몇 년째 만나지 못해도 따뜻한 백숙 한 그릇으로 마음이 녹고 기운을 충전해 갈 것이다. 정성이 들어간 맛있는 음식이란 그런 것이니까. 좋아하는 사람들과 먹는 음식이란 그런 것이니까.
사진출처; pixabay @ceg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