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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different way Aug 10. 2020

무례함과 당당함의 사이...
나도 작가다 공모전

[나를 나답게 해 주는 것]

오래간만에 시부모님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어머님께서 평생을 working mom으로 사시면서 집안을 건사하셨기 때문에 일하는 며느리의 고달픔을 잘 아신다. 마음 같아서야 집에서 정성껏 차려드리고 싶지만, 부모님이 맛있게 드실 수 있는 맛집을 검색해서 사드리는 것으로 한국에서 며느리로 사는 정체성과 타협해 본다. 어머님은 오랜 시간 동안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시부모님을 모셨을 뿐 아니라, 아버님 아래 형제들을 경제적으로 다 건사하는 막중한 책임으로 한평생을 사셨다. 큰 음악학원을 운영하시면서, 대가족의 살림살이도 본인이 감당하셔야 했다고, 나에게는 그런 부담을 일절 주지 않으려고 하시는 정말 세상 cool한 시어머님이시다. 여느 할머니처럼 손주가 보고 싶고, 자주 만나고 싶어도 그 조차도 일상을 분주하게 사는 아들 며느리 내외에게 부담이 되실까 싶어, 전화도 자주 하지 않으시고, 집으로 찾아오시지도 않는다. 본인들 걱정일랑은 말고, 남편과 알콩달콩 잘 살고, 아이들 잘 키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해주셔서 어찌나 감사한지...


그런데 이렇게 세상 cool한 우리 어머님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다. 그건 바로... 우리 집 첫째 현민이이다. 어른들의 무의식 속에 잠식해 있으면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우리 세대(혹은 우리 자녀 세대)를 당황시키는 뼛속 깊은 아들 중심적인 유교문화. 맛있게 저녁식사를 하며 의례히 나눌법한 이야기들(아픈 데는 없는지, 학교를 잘 다니고 있는지, 코로나로 어려운 일은 없었는지 등등)을 하던 중에, 어머님이 우주의 중심(대부분의 시부모님들이 아들의 아들=친손주를 그런 존재로 여기실 것이다) 현민이를 언급하면서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신다. 현민이 이름만 얼핏 들렸는데, 나는 왜 얇게 구운 돼지고기에 매콤한 주꾸미를 싸서 입에 넣으려는 둘째 딸 규닮이가 의식이 되는 것일까? 규닮이가 먹기 좋은 크기로 주꾸미와 돼지고기를 잘라주면서도, 내 귀는 당나귀 귀처럼 커져서 어느덧 남편과 어머님이 나누는 이야기에 초집중하고 있다. 


"아유, 현민이 큰 것 좀 봐라. 애가 진짜 많이 컸다. 애들은 큰 김에 커야 돼. 엄마가 지난번에 OO고깃집에 갔는데, 그 집이 뭐 나오는 반찬은 다양하지 않은데, 고기랑 된장찌개가 아주 맛이 있더라. 현민이 고기 잘 먹는데, 쟤 고기 좀 사줘야겠다. 너(남편) 다음번에 현민이 데리고 우리 집에 와라. 거기 같이 가서, 애 고기 좀 먹이자."


두둥... 뜨아... 허걱... 

"아오, 우리가 충분히 사서 잘 먹이고 있어. 뭘 또 먹여. 현민이 쟤 지금도 많이 커서 괜찮아. 엄마나 아버지 모시고 가서 드셔. 우린 우리가 알아서 먹을게."

남편이 어머님에게 고기(?)를 사양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잘했어, 나이스!!! 남편은 아내인 나에게, 또 자녀들인 현민이, 규닮이에게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자상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다만 한국에서 아들로 자란 남편과 딸로 자란 나의 경험치가 다르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까지 그 생각이 미치지 못할 때가 있다. 남편이 어머님의 아들로서 살갑게, 1차로 완곡히 이야기했으니 두 번째는 내 차례이다. 


"어머니, 현민이 키가 170(cm)이에요. 몸무게 62(kg)에요. 매우 잘 자라고 있어요. 고기를 사주시려면 규닮이를 사주셔야죠. 규닮이는 5학년인데 키도 작고, 몸무게도 저체중이에요. 고기는 규닮이가 필요해요."

이 정도 말씀을 드렸으면, 며느리의 생각(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말아 주세요)을 간파하시고, 알았다 하시든지, 규닮이도 같이 사줘야지 하시면 좋은데, 어머님도 살아온 세월 동안 확고하게 다진 어머니 나름의 생각이 명확하시다 보니, 한 번에 며느리의 뜻에 수긍해주시지는 않는다. 

"얘들은 크는 김에 먹어야 한다니까. 현민이 더 커야지."

"현민이는 이미 고기가 넘쳐요. 충분히 먹고 있어요."

어머님과 두어 번의 티키타카가 오가는 중에,  남편도 내 말에 힘을 보태어주니, 어머님도 결국 항복했다는 듯이 웃으시면서 남편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그래, 현민이 데려올 때 규닮이도 데려와라. 같이 고기 먹으러 가자."

현민이만 사주겠다는 어머님의 마음을 돌려놓기는 했지만 나는 여전히 고민이다. 현민이 고기 먹으러 가는 길에 규닮이를 끼여 보내야 할까, 말까... 오늘 규닮이는 할머니와 엄마가 나눈 이야기의 속뜻을 알아챘을까? 혹시 이해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차라리 주꾸미에 집중해서 안 들렸으면 좋았을 텐데... 규닮이에게 물어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는 한국에서 무례한 며느리이다. 손주만 사주시겠다는 어머님의 뜻을 꺾고 기어코 규닮이도 같이 사주겠다는 내 의지를 관철시키는 며느리이다. 어머님은 이와 비슷한 경우를 여러 차례 겪으셨기 때문에 이미 나를 잘 알고 계신다. 끝까지 현민이만 사주겠다고 하신다면 현민 이조차도 보내지 않으리라는 며느리의 한 성깔(?)을 아시기 때문에, 못내 아들 며느리 뜻에 수긍을 해주신 것이다. 체면과 남의 시선이 중요한 한국에서, 남과 조금 다르게 나답게 사는 건... 너는 참 별나다... 너는 참 까칠하다... 참 예민하게도 군다... 그냥 좀 적당히 맞추어 살지... 이런 비난과 시선을 언제든지 견뎌내야 하는 삶이다. 브런치에서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라는 주제를 보고,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니, 위에서 언급한 형용사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나를 수식하는 형용사들"예민한, 까칠한, 한 성질하는, 평범하지 않은..." 


작년에 학교 도서관에서 큰아이 현민이가 읽으면 좋을 책이 뭐가 있을까... 중학교 서가 쪽을 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 있었다. "나다운 페니미즘" 귀여운 앞표지에 사실 매료되어 책을 꺼내 들었는데, 전 세계 44인의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경험담을 써서 묶은 책이었다. 

[나다운 페미니즘_홍보 문구 중에서...]

우와!!!! 나 아니야? 나? 삐딱하게 생각하고, 사려 깊게 행동하는... 책을 읽다 보니 44인의 작가들 중에 한국인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44명 중에 한국 사람이 있다니...로 마음이 끌렸다가, 정세랑 작가가 쓴 글에 격하게 공감이 되어(아무래도 비슷한 한국 문화에서 자랐다 보니)이 되어 더더욱 끌렸다. 


"여자 아이들은 희고 무른 석고 인형으로 태어나 세상을 마주한다. 매 순간 자신에게 흠집을 내려하고 하고 깨부수려고 하는 외부 환경에 대항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나도 당신도 석고 인형으로 태어났다. 우리를 해치려고만 드는 세상에 스스로를 보호할 방도 하나 없이 던져졌다. 폭력이 우리의 인격을 조각했다. 당신이 인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은 크든 작든 폭력을 경험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폭력은 우리를 부수기도 하지만 우리의 인격을 더 정교하게 만들기도 한다. 폭력을 손잡이를 쥔 그들보다, 우리가 정교하다...."

[나다운 페미니즘_정세랑 씨의 글 중에서...]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이 희고 무른 석고인형으로 태어나 세상을 마주한다는 문장에 쉴 새 없이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보다 더 적절하게 여자아이를 표현한 단어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친정아버지의 고향은 경남 함안이다. 집성촌이라 아버지 친인척들이 아직도 거기에 많이 살고 계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나를 너무 사랑해주시는 당숙부, 당숙모가 계셔서 함안은 나에게 참 따뜻한 곳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참 따뜻한데 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유교는 참... 잔인하다. 


여섯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 친인척 어른들이 나를 두고 가장 많이 했던 말이... 하나 달고 나왔어야 했는데... 였다. 엄마는 서른두 살의 나이로 미망인이 되었고, 아홉 살, 여섯 살 두 딸과 함께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런데 서른두 살의 엄마가 남편 없이 딸 둘을 데리고 이 각박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보다는,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 지내 줄 아들이 없는 것이 집안 어른들의 큰 근심거리였다. 어린 나이에도, 할머니와 엄마가 제사를 두고 소리 높여 말다툼을 하시는 장면을 자주 봐왔었다. 아들 많은 집에 아들 하나를 데려와 양자로 들여 아버지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게 할머니의 주장이셨고, 당장 산 사람 먹고살기에도 바쁜데 죽은 사람 제사 때문에 남의 집 아들을 어떻게 양자로 들일 수 있냐는 게 엄마의 주장이었다. 엄마가 뜻을 굽히지 않으니, 늘 아버지의 제사는 집안 어른들의 근심이 되었고, 외모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많이 닮은 내가,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어른들의 안타까움이었다. 나는 왜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도 지내주지 못하는 딸로 태어나게 되었을까... 어린 나이에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어른들의 안타까움이 어린 나에게도 전이된 까닭이었나 보다. 


정세랑 씨의 글을 읽기 전까지는 내가 아들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안타까워하셨던 어른들의 눈빛, 말투, 표정이 나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는데... 무른 석고 인형이라는 표현에 일렁이는 내 감정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무른 석고인형이었구나... 긁으면 긁히고, 힘을 주어 움켜잡으면 깨지는 그런 존재였는데... 그게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내가 아들이 아니어서 엄마가 어려움을 겪는다는 생각에 혼자 숨죽였던 어린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게 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딸을 키우는 엄마가 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타고난 성별이 아들이 아니어도, 집안에 아들 노릇을 해야 된다는 어른들의 무언의 압력을 계속되었고, 아들 같은 딸이 내 정체성이었기 때문에, 하나 달고 나왔어야 한다는 말은 사라진 지 오래였어도, 집안의 든든한 기둥으로 자라야 한다는 강박에서는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과거에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던 어른들의 시선이 덜 느껴지는 어른이 되고 나니(결혼하고, 남편이 생기고,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나는, 내 정서적인, 심리적인 안전을 지나치게 과하게 추구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내 마음의 공간에, 물리적인 공간에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와서 헤집어 놓는 사람들로부터 나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기제가 남들보다 200% 더 작용하는 그런 어른이 되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내 성별마저도 어른들의 근심이 될까봐 조바심을 냈던 무른 석고인형 같은 과거의 나를 이제야 돌아보며, 그것이 얼마나 나에게 큰 폭력이 되었는지를 정세랑씨의 글 속에서 깨닫는다.  


재작년, 6학년 학생들과 함께 졸업여행을 가는데(나는 초등학교 교사이다) 졸업여행 가서, 우리가 꼭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더니, 우리 반 아이들이 만든 포스터들이 가관이다. 내 캐리커쳐를 크게 그려놓고, 캐리커쳐 말풍선에 "강영수 선생님이 쳐다보고 있는데 정말 뛰시렵니까?" 그 포스터에 모든 아이들이 박장대소했다. 복도에서 달리다가 서늘한 시선을 느꼈다면 그건 나의 눈빛이고, 뛰는 아이들을 복도에 주르르 세워놓고, 사진촬영(담임선생님께 보낼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또한 나이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나의 안전과 타인의 안전을 위해서 복도에서 걸어다녀야 한다는 훈육을 단 한번도 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또한 나이다. 가장 나다운 그림과 말풍선에 아이들 모두가 빵터진 것이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통합교육을 추구하는 학교로 각 반에 비장애 아동과 통합이 가능한 장애아동이 함께 수업을 받고 있다. 자폐와 정신지체와 같은 발달 장애인들도 있지만 휠체어를 타거나, 편마비로 보행이 불편한 장애인 학생들도 꽤 있다. 내 시선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들보다는, 늘 아픈 아이들, 약한 아이들에게 먼저 가 있다. (안전사고에 노출이 되어 있는 학생들 쪽으로...) 복도에서 걸어야 한다는 학교의 규칙에는, 나의 안전과 함께 복도라는 공간을 공유하는 다른 이들의 안전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신체 건강한 아이들이 복도에서 달려 누군가와 부딪혔을 때, 골절 정도로 끝날 수 있지만 장애가 있는 학생들은 더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될 수가 있다. 의도가 없다 해도(복도에서 달리는 어떤 아이들도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협하려는 의도는 없다) 누군가의 공간을 침해하여 그 사람의 안전을 뒤흔드는 학생들에게 나는 단 한 번의 예외도 주지 않는다. 그 단한번이 누군가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이 워낙 큰 이슈가 되고 나서, 학교 현장은 은밀히 보이지 않게 폭력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직업적 특성상, 아이들이 주고받는 말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관찰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학교 폭력 이슈가 아니더라도, 내가 있는 공간이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 안전해야 한다는 내 가치관 때문에 나는 아이들이 주고받는 말을 흘려듣지 않으려고 한다. 갈등이 일어나는 조짐이 보이고, 힘을 가진 누군가가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누군가에게 말로 폭력을 휘두르는 순간..."OO이랑 OO이 나와봐. 선생님이 할 이야기가 있어."로 귀결이 된다. 상처 받은 누군가를 위해, 상처 준 누군가를 윽박지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상처 받은 누군가의 안전한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중재해주는 것이 내 역할이라 생각하여, 각자에게 안전한 선이 어디인지, 어느 선을 넘지 말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가르쳐주고 있다. 다만 문제는 이 안전한 선이, 사람마다 각기 다르기 때문에 교실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 살고 있는 모든 학생들에게,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각기 다른 안전한 선을 쉬지않고 끊임없이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이 함정이다. 아... 교사의 고달픔... 직업적 비애...ㅜㅜ 결국 숱한 경험과 중재와 통해 아이들은, 서로에게 안전한 선이 어디인지를 깨닫게 된다. 


몇 해 전, 우리 반 털털한 여학생이 울고 있었다. 원래 울음을 터뜨린 이유는 잘 설명이 되었는데, 그 이후에 이야기는 모두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나는 울 때, 누가 와서 더 위로하거나 하면 더 마음이 힘들어. 그냥 나를 울게 내버려 둬. 한동안 울고 나면 스스로 마음을 추스를 수가 있어. 친구들이 와서 자꾸 위로하니까 마음이 더 힘들어서 울음이 잘 안 그쳐졌어." 여전히 물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그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놀랐다. 반 아이들 모두가 평상시 그 친구가 워낙 유쾌한 스타일인 것을 알기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순간... 그 친구와 가까이 지내던 어떤 여학생이 조용히 다가가더니, 털털한 여학생 옆에서 다시 울기 시작한다. "OO아, 미안해. 나는 내가 울 때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으면 그게 너무 속상해서, 더 눈물이 나거든. 니가 혼자 내버려 둬야 마음이 진정되는 걸 몰랐어. 아까 내가 너무 내 방식대로 너를 위로한 것 같아서 내가 더 미안해." 속상함과 위로에 대해 서로 다른 기준을 말하며, 사랑하는 친구가 원하는 방식의 위로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더 많이 우는 그 여학생이 그렇게 기특하고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펑펑 같이 우는 두 여학생들을 두고, 나머지 반 아이들은 이 상황이 황당하기도 하고 너무 따뜻하기도 해서 나와 함께 웃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아이들을 중재하는 나를 두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 지나치다... 애들이 다 싸우면서 크는 거지...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다. 반복되는 언어폭력에 휘두르는 학생의 학부모님께 연락을 드려, 피해를 당하는 아이 입장을 설명해드리면, 이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그만한 일로 내가 당신의 아이를 훈육했다는 사실에 불쾌해하시는(지나치다는 입장에서) 하시기도 한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나는 가족을 포함하여 내 일터에서 관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까칠하고, 예민하고, 기준이 높고, 호락호락하지 않고, 때로 서열이 높은 사람들의 눈에는 무례한 사람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이러한 나다움을 포기하하고 싶지가 않다. 내 까칠함이, 내 예민함이, 내 무례함이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이나 관계 속에서 뭔가 주춤거리게 하고, 주저하게 하고, 더 나아가서,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언제든 무례하게 살 마음이 있다. 한국적 정서에서 지극히 무례함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나의 안전을 지키는 당당함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나를 알아온 사람들은, 내 겉모습 속에 감추어진 내 속내를 발견하고 나서, 나에게 따뜻한 손을 건네어 준다. 그 진심을 보았고, 발견했고 위로를 얻었다고... 뒤늦은 감사를 전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감사를 받기 위해 날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 보호받지 못해 웅크렸던 내 어린 날을 기억하며,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져버렸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나다움을 포기해도,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울타리 안에서 그 안전함을 누릴 수 있을까? 우리 부모님세대가 지나가고, 또 내 세대가 지나가면... 내 자녀들에게는 훨씬 더 안전한 삶의 울타리를 남겨줄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세상에는 각자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정서적인 공간, 물리적인 공간이 그 각자의 기준에 맞추어 잘 보호받고 존중될 수 있기를, 그것이 그 사람이 별나서 까칠해서 예민해서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기본적인 권리가 있음을 경험으로 깨닫고, 타인의 안전의 공간을 지켜줄 수 있는 품위있는 사람들로 가득차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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