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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정 Mar 04. 2021

"네가 인생의 쓴맛을 몰라서 그래."

아메리카노를 못 마시던 제작팀 막내

영화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이유를 몇 가지 꼽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23살이었던 나는 아메리카노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 종류의 커피 중에서 내 의지로 마셨던 커피는 딱 한 가지였는데, 바로 믹스커피다. 믹스커피는 달달했고 맛있었다. 입을 텁텁하게 하는데도 자꾸 먹고 싶었다. 더위사냥을 녹인 맛이 나는 것은 물론이요, 과자를 푹 찍어 먹을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다. 하지만 영화사에서 일을 하게 되고, 사무실에 출근하니 내 상상과는 다르게 믹스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새까만 액체가 담긴 테이크아웃 잔만이 각자의 책상 위에 자리 잡고 있 뿐이었다.


내가 일 했던 곳은 높은 사람일수록 그 사람이 뭘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모니터의 위치가 권력의 상징이었다. 연하게도 막내였던 나의 화면은 사무실 안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출근한 지 한 달 여짓 된 나는 움직일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내던 의자에 앉아 따분함을 느끼곤 했다.  모두들 분주한데 나만 한가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침만 삼키고 있었다. 화면은 그저 상사가 찍은 촬영 장소 사진 한 장만을 띄워놓은 상태였다. 지나가던 상사가 내 모니터 화면을 보고 할 일이 없으면 다음 주에 있을 첫 회식 장소를 찾으라며 임무를 줬다.


회식 장소라... 내 눈에는 거기서 거기였다. 그냥 맛있는 곳으로 가면 안 되나? 싶었다. 하지만 배우분들이 비종사자분들의 시선을 받지 않는 룸이 있어야 하고, 우리 스태프들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며, 메뉴도 하나하나 다 따져야 했다. 전화를 돌려보면 메뉴도 좋고 식당도 넓은데 룸이 없거나 룸은 있는데 수용인원이 적은 곳이 허다했다. 조건이 한두 개씩 어긋나서 적합한 곳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어딜 가야 할지 식당 하나 찾지 못하는 나의 무능함에 멍하니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다 급기야 졸음까지 쏟아지는 상황 직면했. 때, 누군가 내 책상을 톡 하고 쳤다.


"커피 마시러 갈래?"


성격이 아주 쿨하셨던 최부장님께서 내게 약 다섯 번째로 건넨 말이었다. 우리 팀에서 여자는 최부장님과 나뿐이라서 잘 챙겨주셨는데, 내가 졸고 있자 잠시 카페에 가자고 하셨거였. 모든 행동과 말이 느린 내가 천천히 대답했다. "네에...."


나는 최부장님과 다른 상사분들을 따라서 사무실 근처 카페로 향했다. 처음 면접을 봤던 곳도 거기였는데, 메뉴가 아주 다양하고 음료 맛도 좋았다. 카페에 도착하자 최부장님이 먼저 운을 띄우셨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흘려 들었다. 나도 똑같이 아메리카노를 주문 할리 없었기에 어떤 생과일주스를 먹을지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상사분들의 말씀에 경악을 금치 못 했던 기억이 난다. 모두가 하나 같이 "나도." "저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저도 아아."라고 메뉴를 통일시켰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람이 8명인데 나 빼고 모두 아메리카노를 마신다고요?'


어떻게 입맛이 모두 똑같은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생김새도, 말투도, 성격도 다 다른 7명의 사람들이 모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는다는 게 신기했다. 이 수많은 메뉴들 중에서 가장 맛없는 아메리카노라니. 충격 먹은 마음을 가라 앉히며 나도 따라 말했다. "... 저도... 아이스 아메... 리카노요..."


나는 그날 카페에서 생애 처음으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모두들 커피가 나오자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듯 허겁지겁 빨대에 입을 댔다. 쪽쪽 빨아 당기다가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 입을 벌리고 "햐~"를 외쳤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지금껏 마신 아메리카노가 아닌가? 싶어서 나도 한 입 쪽 빨았다. 그러자 쓰디쓴 액체가 차마 목젖을 지 못하고 입 안을 맴돌았다. 너무 써서 사약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져 인상이 써졌다. 이걸 어떻게 맛있게 마시는지 도통 의문이었다.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인가? 말로만 듣던.... 마조히스트?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고통은 촬영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촬영 전에 직급에 상관없이 가위바위보를 한 후 진 사람이 커피를 샀다. 나는 주로 이기는 편이었는데, 차라리 지고 싶었다. 지면 내가 사는 거니까 내 메뉴도 스스로 택할 수 있었다. 한데, 상사가 지면 막내인 내가 비싼 음료를 고를 수 없어서 가장 싼 아메리카노를 억지로 골라야 했다. (그것도 억울했다. 아메리카노는 비싸 봤자 5천 원이었고 다른 메뉴들은 싼 게 7천 원 축에 속했다. ) 그런 날이면 내 커피는 항상 남았다. 여름이라 무조건 아이스였는데, 얼음이 다 녹아 미지근 해질 때까지 커피는 줄지 않았다. 가끔 미치도록 더운 날에 얼음 탓에 농도가 연해지한 모금씩 마는 식이었다.


그렇게 기미상궁처럼 지내다가 수 훈이 오빠에게 들키고 말았다. 같은 차를 단 둘이 타고 다녀서 마시지 않는 음료를 늘 버려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너 커피 못 마시지?"


나는 대답했다. ".. 네에.... 저 커피 못 마셔요..." 훈이 오빠에게 (커)피밍아웃을 하자 한결 수월다. 다른 상사들이 졌을 때 나를 위해 훈이 오빠가 주스를 시키고 바꿔준 경우도 많았다. 나보다는 성격이 유하고 능청스러운 편이라 상사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그러다 훈이 오빠가 로케이션 헌팅을 가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한 번은 용기를 내서 다른 메뉴를 시켰지만, 상사가 눈치를 줬다.

"그냥 싼 거 마셔!" "네에..."


촬영 중후반쯤에는 내가 아메리카노를 다 마셨는지 확인하는 상사까지 생겼다. 사줬는데 다 비우지 않는다는 명분이었다. 써서 마시지 못한다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네가 인생의 쓴 맛을 몰라서 그래. 이 맛있는 걸 왜 못 마셔?"


맛없는 걸 억지로 먹으면서까지 예쁨을 받고 싶진 않았지만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못한다는 이유로 면박을 당하니 서러웠다. 그래서 인터넷에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방법에 대해 검색도 해봤다. 별 다른 방도는 없는 것 같았다. 누가 좋은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좋아하는 이유가 없었다. 그냥 좋으니까 좋은 거랬다. 솔직한 나는 결국 싫은 걸 좋아하는 방법에 대해 찾지 못했었다. 그렇게 아메리카노를 못 마시던 23살의 첫 영화는 막을 내렸다.


그다음 작품을 할 때, 그 다다음 작품을 할 때도, 몇 년 동안이나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려고 노력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누군가가 아메리카노를 사주면 가짜 웃음을 지으며 감사하다고 거짓말을 쳤다. 그리고 몇 모금 마시는 척하다가 하수구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버리는 것도 일이어서 날이 갈수록 지쳤었다. 그리고 나는 왜 아메리카노가 맛이 없는지, 다른 사람들과 입맛마저 섞이지 못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기호에 맞지 않은 것뿐이었는데, 결국 내 탓을 했던 것이다.


첫 작품으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메리카노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 되었다. 딱히 큰 계기는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메리카노 외의 음료는 부담스러워졌다. 단 음료가 당기지 않는 데다가 아메리카노를 하루라도 거르면 몸과 정신이 피곤다. 내게 인생의 쓴 맛을 모른다던 당시 그 상사의 나이가 딱 지금 내 나이다. 상사의 말대로 인생의 쓴 맛을 보고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만 아메리카노가 . 심지어 이제는 어느 카페의 원두가 맛있는지까지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제 카페에 가면 어깨를 으쓱대며 이렇게 말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



상사분들. 잘 지내시나요?
5년이 지나 제가 28살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메리카노 없어서 못 마셔요.
커피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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