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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정 Apr 08. 2021

8년 차 자취생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은 28세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같은 지역이지만 차로 1시간가량 소요되는 거리라 아침마다 등교하는 게 무리였을 뿐더러 우리 집까지 오는 스쿨버스도 없었다. 그리하여 반 강제로 들어간 기숙사의 첫 입실 날이 명확하게 기억나는데, 너무 두려워서 벌벌 떨었었다. 친구들과 친해지기도 쉽지 않은데 같이 살라고? 나에겐 엄청난 형벌과도 같았다.


엄마는 입실 한 달 전부터 짐을 싸주셨다. "이것도 가져가라, 저것도 필요할 거다." 하며 들고 가지도 못할 만큼 짐을 챙겨주셨다. 그럼 나는 '저게 왜 필요하지? 저건 안 가져가도 될 것 같은데.' 하며 구시렁댔다. (나중에 생활하면서 다 필요한 것들이라는 걸 느끼고 엄마 말을 잘 듣기로 결심한 계기가 됐다.)


예술고등학교라서 그런지 학교는 아주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빠 차인가 엄마 차인가를 타고 산 옆에 자리 잡아 한기가 도는 길을 따라 쭉 들어가니 아주 멋진 외관의 형태를 띤 학교가 보였다. 심장이 쿵쾅 거리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친구들과 친해지는 방법을 검색했더니 '마이쮸를 나눠줘라, 새콤달콤을 줘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면 된다.'라고 지식인이 알려줬다. 그래서 사온 새콤달콤을 손에 꼭 쥔 채로 기숙사에 들어섰다. 방으로 들어서자 현관 겸 신발장, 오른쪽에는 화장실이 보였다. 그곳을 지나쳐 안쪽으로 더 들어서면 2층 침대 두 개와 좌식 책상 하나가 보였다. 매사에 서둘러 준비하는 부모님 덕에 내가 첫 입실자였다. 엄마 아빠와 한 번씩 진한 포옹을 하고 짐을 정리했다.


다행히도 친구들과는 지식인이 알려준 대로 새콤달콤을 나눠주자 금세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친한 친구들과 사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나의 열일곱은 부모님이 필요했다. 정서적으로 불안을 자주 느끼던 때라 정신과 약을 먹기도 했고, 안 좋은 생각도 많이 하던 시기였다. 정서적인 것만이 문제가 아닌 게 더 문제였다. 나는 세탁기를 돌리는 법조차 모르는 아이였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이 부모님을 도와 집안일을 할 때 아마도 나는 방 안에서 손목을 긋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룸메이트 친구들에게 세탁기 돌리는 방법을 물으니 질타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나는 상상력이 과한 편이라 작은 불이라도 켜놓고 자야 했는데, 나를 제외한 세 명의 룸메이트들은 불을 꺼야 잠이 들었다. 새벽 3~4시경 온몸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으로 이불이 젖을 만큼 무서운 가위를 눌리고 나서야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엄마는 한 번도 나무라지 않고 내가 잠들 때까지 오래도록 나와 이야기를 나눠 주셨다.


3년간 기숙사 생활을 마치고 서울 소재 대학에 합격하여 부모님과 물리적 거리감은 더 멀어졌다. 이제 고작 20살이 된 나는 부동산의 '부'자도 몰랐고 매매가 뭔지 , 전세가 뭔지, 월세가 뭔지 몰랐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이때로 돌아가서 아파트하나 샀을 것이다. 서울 집값이 이렇게까지 오를 줄 몰랐다.) 그냥 대충 신입생 환영회인가를 가서 학교 정문 앞 대문짝만 하게 걸린 '원룸 있습니다.' 현수막을 보고 찾아갔다.


처음에는 혼자 사는 것이 마냥 좋았다. 밤새 동기들과 실기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술을 마시고,  데이트를 했다. 아무도 관여하는 사람이 없 진짜 어른이 된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독립은 또 다른 시작이 아닌 고생의 연속이었다. 난생처음 바퀴벌레를 보았고, 같이 살 수 없어 잡아야 했다. 스스로 청소를 하고 밥을 해 먹고 이불을 빨아야 했다. 어쩌다 한 번씩 죽을 것 같이 아플 때면 이대로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생활력이나 삶의 지혜 같은 것들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은 틀림없지만 나중에 알았어도 될 것들이었다.


대학교 3학년쯤 되자 급기야 서울에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들이 미웠다. 이들은 전생에 무슨 공을 세웠길래 서울 땅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나. 보증금도 필요 없고 월세도 필요 없고 밥값은 물론이요 집도 넓으니, 그게 괘씸했다. 나는 좁은 원룸 방에서 혼자 라면 먹고 밤새 설사했는데, 학교에 오지 않으면 대화할 사람도 없는데. 서울에서 친한 친구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집에 들어갈 때마다 부모님한테 절 하면서 들어가!"라며 소리치기도 했다. 


 20대 초반의 나는 어떤 집이 좋은 집인지 몰라 1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다. 집을 볼 때 어떤 것들을 눈여겨봐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햇볕은 얼마나 드는 게 좋은 건지, 수압의 정도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엘리베이터의 중요성이 어떠한 건지. 모두 여러 집을 거쳐서야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다.


7번의 이사를 거친 나는 집을 보러 가면 더 이상 쭈뼛거리지 않는다. 창문 밖의 풍경은 어떤지, 변기는 잘 내려 가는지, 보안은 철저한지, 햇볕이 잘 드는 남향인지, 교통편은 어떤지 등 여러 가지 사항들을 체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또한 불을 켜지 않고도 혼자서 잠에 들 수 있고, 가위 눌리면 짜증 내면서 다시 잠에 들 줄 알며, 혼자서 빨래는 물론 밥도 맛있게 할 줄 안다.


이렇듯 11년간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며 터득한 삶의 영양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사실이다. 한데, 대부분의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방법을 알게 되고 해결하거나 무뎌졌지만 여전히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혼자 사는 공간에서는 늘 부모님의 온기가 그립다. 이 문제는 나아지기는커녕 더 짙어져 나를 짓누른다.


물론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마냥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 또한 고향에 내려가면 금세 지쳐 다시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수많은 잔소리와 간섭, 밖에 있으면 21시만 돼도 걸려오는 전화, 도와드리지 않고는 마음이 불편한 집안일 등이 아주 괴롭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혼자 있는 달콤한 시간들보다 부모님과 함께 먹는 달콤한 과일들이 나는 더 좋다.


며칠 전 부모님 집에 갔을 때, 냉장고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거트가 20개나 있었다. 정황을 파악해보니 엄마와 아빠께서 각자 나를 위해 10팩짜리를 하나씩 사 오셨던 것이다. 엄마는 아빠가 사 오는 줄 모르고, 아빠는 엄마가 사 오는 줄 몰라서 발생한 일이었다. 자취방에서는 내가 사지 않으면 그게 무엇이든 절대로 먹을 수 없다.


예상치도 못 했던 냉장고 속 나를 위한 두 번의 사랑에 크게 감동했다. 요거트에 크게 감동하는 나를 보던 엄마께서 본가로 돌아오라고 하셨다. 이런 것 하나에도 동요하는 연약한 청년으로 자랐다면 서울에 있는 친구들과 일을 모두 포기하고 내려오라는 소리였다. 본가에 며칠 있다 보니 정말로 그러고 싶었다. 서울에서는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배가 고팠다. 반면 엄마가 해주신 든든한 밥 한 끼면 하루 종일 배가 불렀다. 그것은 곧 건강과도 직결됐고 경제적으로도 그랬다. 자취하면 하루에 만 원 이상은 기본으로 쓰는데, 본가에서는 일주일에 만원을 쓸까 말까 했다. 그 생각들이 뒤섞이자 본가에 있는 내 방 인테리어와 가구 배치를 머릿속으로 새로 그려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을 혼자서, 서울에서 보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엄마 아빠를 그리워하며 7번째 자취방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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