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내 핏줄, 건이 오빠.
밖에 나가면 우리 둘밖에 없어!
“시의원 당선됐어?”
오랜만에 간 본가의 화장실에서 나온 내게 친오빠가 물었다.
“당선됐어. 시이의원~하다~”
오빠의 물음에 내가 흔쾌히 대답했다. 이건 우리 둘만 아는 개그다. 시원하게 볼 일을 봤으면 시의원에 당선된 거고, 그렇지 못하면 선거에서 떨어진 것이다.
건이 오빠는 나보다 세 살이 많고, 나보다 딱 세 배 어른스럽다. 나는 아들 같은 딸이었고, 오빠는 딸 같은 아들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
어릴 적부터 유별났던 내 성격과 다르게 오빠는 순한 양 같았다. 오빠는 실제로도 양띠고, 나는 개띠라 좀 개 같았고 여전히 개 같다.
8살인 오빠는 5살인 내가 귀엽다며 볼을 살짝 꼬집는 습관이 있었다. 볼을 만지고 귀엽다며 하루 종일 금이야 옥이야 예뻐해 줬다. 그 무렵 나의 하루 일과는 보통 오빠와 놀다가 그의 얼굴을 할퀴거나 꼬집거나 팔을 무는 것이었다. 아빠가 찍어주신 필름 카메라에 담겼던 우리의 모습은 보통 울고 있는 나를 달래주는 오빠 혹은 인상 쓰고 있는 나와 활짝 웃고 있는 오빠가 있었다. 엄마 아빠 혹은 지인들과 친척들은 우리를 볼 때마다 오빠를 안쓰럽게 봤다. 동생한테 너무 잘해줘서 동생이 이겨먹으려고 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간이 지나도 여느 오빠들과는 다르게 나를 끔찍이도 아껴줬다. 진짜 남매, 실제 남매 이야기처럼 싸우거나 맞거나 하는 이야기는 나와 동떨어진 얘기들이었다. 그렇다고 나를 위해 져준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 너무나도 당연하게 내가 이기는 존재. 너무나도 당연하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 그런 유년기를 보내고 오빠에게도 사춘기가 왔었다. 오빠는 중학생이 되자 내게 말조차 걸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오빠를 꼬집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고 마주 앉기만 해도 어색한 사이였다.
그런 청소년기를 보내고 우리는 나란히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고 자연스럽게 같이 살게 되었다. 부모님 없이 둘만 사는 것은 처음이었다. 20년간 한 집에서 살았으니 별 다른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 어떻게 그간 한 집에서 같이 살아왔는지 의문이었다. 같은 부모님 밑에서 자란 형제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오빠와 나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생활습관이 달랐다. 나는 밥을 먹으면 바로 설거지를 해야만 했고, 오빠는 다음 끼니를 먹을 때 설거지를 했다. 나는 주로 밤을 새우고 학교를 갔고, 오빠는 오후 11시만 되면 잠에 들어야 했다. 나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듣거나 놀았고, 오빠는 집에서 잠자고 밥 먹는 시간 빼고 공부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연애 또한 짧게 짧게 만나는 타입이었고, 오빠는 2~3년은 거뜬히 장기 연애를 했다.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던 우리 남매는 맞춰가는 방법을 몰라서 어린 마음에 ‘시발년’ ‘시발놈’ 하며 싸우기도 했다.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서로를 향해 내리꽂았다. 나는 자주 소리를 질렀고, 울었다.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쏟아내는 막말들을 받아내지도, 막아내지도 못해 내내 괴로워했다.
결국 우리는 함께 산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서로에게 질릴 대로 질린 부부 마냥 더 이상은 함께 못 살겠다며 부모님께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나 진짜 더 이상은 오빠랑 같이 못 살겠어. 나랑 너무 안 맞아.”
“아빠, 나 진짜 더 이상은 오빠랑 같이 못 살겠어. 나랑 너무 안 맞아.”
엄마와 아빠는 수화기 너머 나의 목소리를 듣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나의 계속되는 어리광에 두 분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
“그래도 사회 나가면 너희 둘밖에 없어. 서로 이해하고 잘 보살펴라.”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시나 싶었다. (부모님 죄송합니다.)
사회에 나가면 왜 나 혼자야? 남자 친구도 있을 테고 친구들도 많은데 왜 오빠밖에 없다는 거야?
다행히 계속되는 갈등 속에서 우왕좌왕했던 우리는 시간이 약이라고 점차 서로를 이해 하기 시작했다. 규칙을 세우고 별 거 아닌 일로 상처 주지 않는 법을 배웠고 실천했다. 게다가 오빠는 내 개그코드를 정확히 알고 있어 하루 종일 나를 웃게 했다.
그러기도 잠시 오빠가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본가로 내려갔고, 나 혼자 서울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정말로 사회에 나가보니 친오빠밖에 없었기에 한동안 미친 듯이 마음이 공허했다.
부모님 말씀처럼 중요한 순간에는 결국 다 남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석하게도 오빠만큼 나를 아껴주는 친구는 없었다.
오빠는 한국외대, 나는 경희대를 다녔는데 자취방은 우리 학교 앞이었다.
오빠는 구옥을 싫어하는 나를 위해 좁은 신축을 택했고, 내게 넓은 방을 내줘야 했다.
오빠도 벌레를 싫어했는데 나를 위해 언제든 대신 잡아줬다.
오빠는 늘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메뉴로 택해줬고, 늦게 자는 나를 위해 귀마개를 끼고 자야 했다.
오빠는 자주 우울한 내 기분을 맞춰줘야 했고, 혹시라도 내가 죽어버릴까 봐 항상 조마조마했다.
건이 오빠는 그랬다. 자기가 오빠라서 그랬다.
내가 자기 동생이라서 아껴주고 참아주고 맞춰줬고, 그랬다는 걸 나는 이제야 알게 됐다.
며칠 전 고등학교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본가에 다녀왔다. 오빠는 내게 분위기 좋은 카페를 소개해 주고 싶다고 했다. 그곳에서 나는 아이스 라떼를, 오빠는 바나나 쉐이크를 주문했다. 각자 주문한 음료들을 시음하고 인상을 썼다. 우리는 곧바로 서로의 음료를 바꿔 먹었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쿵짝이 참 잘 맞는 남매다. 마음과 다르게 오빠를 만나면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이 마구 뒤섞여서 괜히 심통을 부린다.
그래도 오빠는 여전히 나를 보며 활짝 웃으며 “정풀아(애칭)” 하고 다정하게 불러준다.
그럼 나는 대답한다. “뭐. 왜.”
내가 개떡같이 대답해도, 오빠는 알 거라 믿는다. 내 마음은 사실 "뭐. 왜."가 아니라는 것을.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평생 우리 오빠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