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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May 08. 2023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때문에 내일은 행복할 거야

<와이키키 브라더스>(임순례,2001)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직업 적성 검사 비슷한 것을 했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울리는 일이 '카페 경영'과 '농업'이었던 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지나가던 친구가 흘깃 보더니 콜롬비아 가서 커피 농사 지어라, 며 정리해 주었다. 돌아보면 참으로 속 편한 시절이었다. 언제나 마음 한켠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미래의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한 적은 있나? 모르겠다.


몇 달 전, 평소처럼 회사에서 점심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창 너머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벌써 선거 운동을 하나? 창 밖을 내다보니 어떤 노조에서 시위를 하러 왔는지 다마스를 한 대 갖다 놓고 분주했다. 뭔가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다마스 위에 일렉 기타를 맨 아저씨가 서 있었다. 매드 맥스? 생각하자마자 기타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게리 무어였다. Parisienne Walkway.


추운 날이었지만 아저씨의 연주는 매끄러웠다. 한두 달 쳐본 솜씨가 아니었다. 업소에서 기타 연주를 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아마 선곡 때문이었을 것이다-.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두 시가 됐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저씨들 앞을 지나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누군가는 동영상을 찍고, 누군가는 우리 회사인지 확인하고, 다들 오랜만에 찾아온 이야깃거리에 들떠서 대박, 대박, 호들갑을 떨었다. 고등학생 때와 똑같이 식판을 들고 점심 배식 줄을 선 채, 나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생각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몇 번 보고 나면, 가장 슬픈 장면은 성우(이얼)가 업소에서 알몸으로 기타를 치는 장면도 아니고, 인희(오지혜)가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를 부르는 마지막 장면도 아니다. 세상에 떠밀려 결국 고향에 내려온 성우가 옛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송골매의 '세상만사'를 부르는 장면이다. 친구들은 고교 시절의 추억에 젖어 완전히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아직 '세상만사'를 살고 있는 성우의 표정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화면은 고교 시절 성우와 친구들의 공연으로 이어진다.


고등학생 성우(박해일)의 '세상만사'는 호기롭다. 마음만 먹으면 배철수도, 구창모도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듯한 싱싱한 얼굴이다. 만약에 안 되면 콜롬비아 가서 커피 농사짓지 뭐, 하는 것 같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배우들이 이름을 날리며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나는 올라갈 무대를 찾아 헤매고 또 헤맸다. 보이는 모든 곳에 오디션을 보고, 때로는 유랑단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수많은 연예인들이, 정치인들이, 교수들이 자꾸 나에게 힘들지 네 탓이 아니야, 하길래 그게 나한테 하는 말인 줄로만 알고, 마음껏 스스로를 동정하며 살았다. 지금 하루하루 바쁘니까 모든 것이 잘 될 줄로만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내가 올라가고 싶은 무대는 사실 연극 무대가 아니었을까? 공개 코미디가 더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내가 원하는 무대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탓이 아니라던 그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는 수많은 성우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무대에 올라가면 혼자 돋보이려 애쓰고, 자기 관리는 전혀 하지 못해서 약을 끊지 못하고, 결국 음악을 그만두는 강수(황정민)에 가까웠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모욕을 받을 때마다, 마치 스스로가 알몸으로 기타를 치는 성우가 된 것 마냥, 비참한 기분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애초에 기타 따위는 내려놓은 지 오래인데.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발버둥 치며 살아온 것도 아닌데.


강수는 버스 기사가 됐고, 그리고 나는 카페 사장도 농부도 아닌 평범한 회사원이 됐다. 여기보다 더 나은, 나만을 위한 무대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씩 강수에게 드럼을 가르쳐달라고 조르던 어린 웨이터 기태(류승범)를 생각한다. 나도 아저씨처럼 되고 싶다고 눈을 빛내던 기태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지금의 무대에 올라섰고, 이 무대에서도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다고. 여기가 나의 수안보이며, 언제든지 지방 주점의 오부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막막한 밤에는 옛 친구들을 만난 성우처럼 딱딱한 얼굴로 송골매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뜻대로만 되겠소만 그런대로 한 세상 살아가오.


생각의 끝은 언제나 마지막 장면, 다시 무대에 서서 심수봉의 노래를 부르던 인희의 모습이다.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그럼에도 삶은 아름답고, 세상만사 뜻대로 되지 않아도 그런대로 긴긴 낮과 긴긴 밤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다마스 위에 올라서서 게리 무어를 연주하던 아저씨는 한때 기타 좀 쳤던 노조원이었을까, 아니면 일을 도와주러 온 기타리스트였을까. 그게 끝내 궁금했다. 연주가 참 좋았고, 날씨가 너무 추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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