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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Jan 01. 2024

부지런함은 세상을 구할 수 없다

엄태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대지진으로 서울(부동산 얘기니까 서울인 것으로 하자)이 초토화됐다. 한국인의 꿈과 희망, 모든 것인 아파트가 다 무너져버리고 오메, 오래된 복도형 아파트 한 동만 남았다. 그러니까 황궁 아파트 주민 빼고 다른 사람들은 벼락 거지가 된 거다. 진짜로 이런 일이 다 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황궁 아파트에 투자하셨어야지. 개꿀 투자였는데 그걸 몰랐으니 벼락 거지 되어도 싸지 뭐.


여하튼 그러다 보니 거지들(영화에서는 바퀴벌레라고 표현한다)이 아파트 화단이라도 한 번 밟아 보겠다고 물밀듯이 밀려오는데, 아무나 다 살면 그게 아파튼가? 임대 주택이지. 입주민들이 힘을 합쳐 아파트를, 이 자랑스럽고 귀중한 자산을 지켜낸다. 니네 동네로, 니네 나라로, 니네 수준에 맞는 곳으로 돌아가라! 이곳은 아무나 사는 그런 곳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황궁 아파트에 사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여럿 본다. 그들은 자신의 성취에 깊이 몰입해 있고, 자가 아파트가 없는 이들과 언제나 선을 그으며, 호의를 바탕으로 ‘무아파트자‘를 가르치려 든다. 부동산에 넣을 기초자산이  없는 이들(대부분 젊은)도 부지런하다. 코인을 사고, 주식을 산다. 돈이 있건 없건 모두가 부지런하게 자신의 위치에서 부자가 될 수 있도록 열심인 것이다.


현실 속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자신의 영민한 행위에 잔뜩 취해 있다. 나는 부자가 되기 위해 부지런하게 사는 거야, 최면을 건다. 그래서 그들은 있는 힘껏 위악을 떨면서 천박하게 굴고,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니냐며, 노력하지 않는 놈들이 멍청한 거지 나는 아주 부지런한 거라며 잔뜩 거드름을 피운다. 오메, 경제 유튜버들 하는 말을 보니 이게 정치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제 세상에 대한 눈이 좀 트이는 것 같다. 게으르고 멍청한 놈들은 자가 아파트를 갖지 못하고, 기어코 벼락 거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도 재난도 없는 나라에 벼락 거지 같은 것은 없다. 가랑이 찢어져 피 철철 흘리면서도 박 사장님 리스펙! 외치는 뱁새들만 있을 뿐이다. 놀라울만큼 종교적이고, 놀라울만큼 사회주의적인 뱁새들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IMF, 아니 대지진이 지나가고, 한번 무너진 아파트를 입주민들이 다시 열심히 보수 작업을 해서 일으켜 세웠다. 그러는 사이 입주민들의 DNA는 바뀌었다. 아직 바뀌지 않은 입주민은 색출 작업으로 모두 골라내졌다. 그들은 인민 재판을 거쳐, 반복적인 자아 비판을 하고 나서야 겨우 용서받고 함께 살 자격을 부여받았다. 게으른 반동분자여 우리와 함께하여 광명을 찾으라.


부지런함으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쏘주와 농담이며, 옆으로 쓰러져 누운 아파트에 들어가 "층고가 높네" 하며 그냥 살 수 있는 사람들, 살아 있으면 그냥 같이 사는 거죠,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명화(박보영)의 마지막 대사처럼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사람을 잡아먹는 그런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 그렇다.


"누구 덕에 니가 먹고 사는데"를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복종하지 않는 자식에게, 연예인에게 악플 달 때, 공무원 욕 하고 싶을 때 자주들 쓴다.

내가 아버지를 좋아하는 것은, 아버지가 지금껏 그런 비슷한 얘기 한 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맨몸으로 상경해서 노동하고, 결혼해서 혼자 처자식의 밥을 벌고,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자식 학비에 결혼 비용까지 대면서 그러기 쉽지 않다.


그리고 아마 아버지는 그것을 아무것도 없는 도시에서, 집이 옆으로 누워있든 흔적도 없든 일단 들어가 살았던 ‘어른들의 시대’에서 배운 것이리라. 그 어른들이 나이를 먹고, 도시는 커지면서 수많은 황궁 아파트가 지어졌을 것이다. 폐허 속에서도 꽃을 피워낸 수많은 어른들의 마음 속에도 콘크리트 가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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