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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Apr 25. 2023

기한을 정한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

나는 수면 마취가 무섭다. '진짜 나'는 어떤 어둡고 깊은 무의식으로 가라앉고, 병원의 나는 껍데기만 덩그러니 남는 것 같아서. ‘진짜 나’는 검은 물 밑에 갇혀 흐릿한 지상을 올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다.(<겟 아웃>에서 무섭도록 실감 나게 표현해 주었다) 유년 시절에는 언젠가 내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워서 잠을 자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밤도 있었다.


이상하게 나는 이제 유행이자 상식이 돼버린 ‘멀티버스’를 보면 자꾸 수면마취 생각이 난다. 이승에서 정신을 잃은 나는 어딘가의 '저승’에서 또 다른 나로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 이것은 <인셉션>의 세계이기도 하며, <매트릭스>의 비주얼이기도 하다.


세상이 멸망하든 어쩌든 지금 너의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으라는 단순한 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재미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보는 사람의 정신도 분열됐다가 다시 합쳐질 것 같은 현란한 화면. 기어코 껴안는 엄마와 딸, 두 심장이 맞닿는 순간 다른 우주에서 일어나던 빅뱅. 세상의 시작. 영화의 끝, 딸을 품에 안고 함께 세무서를 찾는 양자경의 표정을 보며 나는 주성치의 <서유기>를 떠올렸다.



이런저런 일을 거쳐 손오공이 되기로 결심한 지존보(주성치)는 긴고아를 머리에 쓰며 그 유명한 대사를 한다.


- 인간사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후회요. 다시 만난다면 사랑한다고 말하겠소.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 년으로 하겠소.


손오공이 된 지존보는 사랑을 지켜낸다. 그러나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하는 순간 긴고아가 그의 머리를 조여오고, 그는 사랑을 놓친다. 속세에 미련을 가지면 긴고아가 그의 머리를 조여온다. 아마 그것은 후회할 수밖에 없는, 인간사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그래서 손오공은 다른 멀티버스에서 지존보와 그녀를 이어준다. 사랑을 확인하는 두 사람을 보며 뒤돌아서는 손오공의 쓸쓸한 눈빛.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도 서역으로 가는 길, 잠시 비를 피해 동굴에서 눈을 붙인 손오공이 꾼 찰나의 달콤한 꿈이었다. 잠시나마 자신과 일생의 사랑을 만날 수 있게 해준 관세음보살의 작은 선물이었던 것이다. 삼라만상은 내 안에 존재하며, 멀티버스니 뭐니 하며 우주를 넘나드는 것 같이 보여도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인 것이다.


수많은 ‘멀티 양자경’이 마치 한 명의 정신이 분열됐다 합쳐졌다 하는 것으로 보였던 이유도 알 것 같다. 모든 멀티버스는 양자경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잠시 다른 우주를 엿보게 해주어, 지금의 삶과 사랑을 잃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는 관세음보살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손오공처럼 지금의 사랑에 충실하지 못하고 나중에 후회하며 고통스러워하지 말라고. 나중에 가서 긴고아를 쓰고 후회해 봐야 이미 늦는다고.


바위로 변한 두 사람을 볼 때는 마치 <겟 아웃>의 그 장면을 보는 것처럼 잠시 숨이 막히기도 했다. 죽음이란 저런 것인가. 이승을 떠난다는 것은 저렇게 맨 정신으로 바위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의 예스마담은 바위가 되어서도 딸을 따라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결국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


불자는 아니지만 모든 우주가 내 안에 있다고 믿고 싶다.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라지고, 누군가는 멀어지고, 누군가는 영영 내 곁을 떠난다. 그러나 내 안에는 수면마취 대신 립밤을 깨물어 먹는 우주도,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는 우주도,  한화 이글스가 매년 우승하는 우주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떠나간 사람들은 각각의 우주 속의 올리브영에서, 낙원상가에서, 대전야구장 불펜에서 나와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 말할 수 있겠지. 나는 너를 만나, 지금 이 순간 너를 껴안아 주기 위해서 만 년 동안 우주를 건너 왔다고. 지금 우리가 하는 이 행위가 얼마나 위대하고, 역사적이며 우주적인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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