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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Mar 21. 2022

드라이브 마이 카. 상실의 시대에서.

하마구치 류스케,<드라이브 마이 카>(2021)

※ <드라이브 마이 카>의 결말을 포함한 내용이 있습니다.



1. 여전히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일종의 판타지다. 스파게티를 삶는 과정을 지루하게 묘사하고, 레코드가 바늘을 스치며 흘러나오는 곡의 설명과 주인공이 입고 있는 바지의 브랜드, 자동차 기종의 배기음까지 세세히 묘사함에도 하루키 월드는 이 세상과 조금 동떨어진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다. 그것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이며, '1Q84'이기도 하다. 아마 그의 생활밀착 에세이가 재미있는 것은 이 차이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원작으로 만들었다. 단편집 속의 다른 소설들의 이야기도 함께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 떠오른 소설은 <상실의 시대(원제 : 노르웨이의 숲)>였다. 상실의 아픔을 안은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미사키(미우라 토코)가 상실의 도시 히로시마에서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2. 가후쿠와 오토의 천일야화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인 가후쿠와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 부부는 어린 딸을 잃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딸을 잃은 뒤, 오토는 언젠가부터 오르가슴을 느낀 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식의 창작을 시작하여-하루키 소설에 자주 나오는 것처럼 이것은 불현듯, 어느 날 그녀의 몸속에서 뭔가가 팡 터진 것처럼 실행된다- 극작가로 활동한다. 부부의 섹스는 사랑의 표현임과 동시에 '이야기'의 창작 활동이기도 하다.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처럼 매일 밤 오토는 가후쿠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이 상실의 아픔 뒤 그녀에게 찾아온 변화이며, 어쩌면 형벌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가후쿠뿐 아니라 자신의 대본에 출연하는 남자 배우들과도 똑같은 일을 하며, 가후쿠가 그 사실을 알자마자 병으로 급사한다. 전생에 칠성장어였던 소녀가 등장하는 마지막 이야기를 끝내지 못한 채.



3. 가후쿠는 안약을 넣는 것처럼 담배를 피운다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직후, 호텔 방에서 혼자 담배를 피운다. 그 후 그가 혼자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없다.


아내가 죽고 히로시마에서 연극을 만들던 어느 날,가후쿠가 아무 곳이나 가달라고 하자, 운전기사 미사키는 평화공원으로 그를 데려간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을 학대하던 엄마가 산사태로 무너진 집에 깔려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할 줄 아는 것은 운전뿐이라 무작정 고향을 떠나 히로시마에서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가후쿠의 자동차를 몰며 이 자동차는 가후쿠 그 자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그녀는 자동차를 소중히 대하며,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것이다. 상실을 상징하는 평화공원에서 두 사람은 담뱃불을 나눈다.


그리고 다카즈키(오카다 마사키)가 가후쿠에게 자신의 상처를 직접 마주해야 한다고 말했던 그날, 두 사람은 가후쿠의 자동차에서 담배를 나누어 피운다.


처음으로 아내의 외도를 알았을 때, 가후쿠는 녹내장 판정을 받아 안약을 처방받고, 운전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으나 무시한다. 아내의 목소리로 녹음된 <바냐 아저씨>의 대사가 흘러나오는 그 자동차가 가후쿠 자신이기 때문이다.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에 집착했던 그가 다른 이에게 운전대를 맡기더니, 결국은 마음을 열고 자동차 안에서 담배를 피운다. 흐려지는 시력을 붙잡기 위해 안약을 넣듯이, 상처 입은 자신의 마음과 상실의 고통을 똑바로 마주하여, 결국 연기 속에 흘려보내기 위해서.



4. 다카즈키는 누구인가


마치 전생에 칠성장어였던 것 같은 이 남자. 말끔히 잘 생긴 얼굴에 이따금 섬짓한 미소를 띠는, 오토의 내연남이었던 다카즈키는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의 남편이 연출하는 연극에 지원서를 내서 히로시마까지 오더니, 가후쿠와 마주할 때마다 이상한 도발을 일삼는다. 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자신을 알아보며 귀찮게 하는 이들에게 분노를 뿜어내고, 가후쿠 앞에서 보란 듯이 동료 배우와 섹슈얼한 분위기를 만든다.


오토가 죽기 전의 다카즈키와 히로시마의 다카즈키는 마치 다른 사람 같다. 그는 가후쿠가 끝내 듣지 못했던 오토의 마지막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며, 끊임없이 가후쿠를 번뇌에 들게 한다. 히로시마의 다카즈키는 등장부터 퇴장까지 너무 부자연스러워서, 마치 죽은 오토가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가후쿠에게 보낸 사람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카즈키는 뜬금없이 연습 중이던 극장에서 상해치사 혐의로 체포된다. 마지막으로 가후쿠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떠나더니,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카즈키가 말해주는 오토의 마지막 이야기. 사람을 죽였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바뀐 부분인 감시 카메라에 대고 내가 죽였어! 를 외치는 소녀의 이야기는 오토 자신의 이야기로 보인다. 가후쿠가 아내를, 미사키가 엄마를 죽였다고 하는 것처럼, 오토는 딸을, 혹은 남편을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5. 집이 무너지고, 가족이 죽어도, 그래도 살아간다.


가후쿠는 가족을 잃었고, 미사키는 가족과 고향을 잃었다. 같은 아픔을 가진 두 사람은 결국 미사키의 고향을 찾아가, 무너져버린 집터에 담배 공양을 하고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 순간 둘은 부녀가 됐다.


무너진 집터 앞에서 서로를 의지하는 가후쿠와 미사키를 보며 나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생각했다. 기타노 다케시가 말했었다. 2만 명이 죽은 사건이라고 생각하면 피해자를 이해할 수 없다고. 사람이 죽는 일이 2만 번이나 벌어진 거라고. 집이 무너지고 가족을 잃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어떠한가. 가후쿠와 미사키의 표정은 언제나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한국인 부부의 집에 초대받아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은 흥미롭다. 집은 아늑하고 대화는 따뜻해서, 가후쿠는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고, 미사키마저 밝은 얼굴로 강아지와 놀며 시간을 보낸다. 이것은 텅 빈 가후쿠의 아파트와, 무너져버린 미사키의 집에서는 느낄 수 없다. 마치 외국인 가정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6.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을 살아가는 거예요


가후쿠가 소냐의 이 대사를 듣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오토의 죽음을 발견하기 직전, 자동차 안에서 마치 눈물을 흘리듯 안약을 넣은 채로. 두 번째는 영화의 마지막, 연극에서 유나(박유림)가 수어로 해주는 대사로. 마지막 소냐의 대사로 마침내 가후쿠는 구원받는다.


세 시간짜리 영화를 관통하는 이 대사가 나는 "서로 대화하며 살아가는 거예요"로 들렸다. 영화에 등장하는 유일한 따뜻한 공간은 한국인 부부의 집이다. 유나는 말을 못 하지만, 문제 되지 않는다. 남편 윤수(진대연)가 그녀의 언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다양한 언어가 부딪히는 가후쿠의 연극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언어를 몰라도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후쿠와 오토는 그러지 못했다. 딸을 잃고, 오토는 몇 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문득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대화라기에는 마치 천일야화 같다. 이야기가 끝나면 스스로를 없애 버리는 세헤라자데 같다. 그래서 미사키의 무너진 집터 앞에서 가후쿠는 스스로 얼마나 상처 입었는지 봤어야 했다며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는 것이다.



7. 상실의 시대,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나


소설 <상실의 시대>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다.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아무 데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상실의 시대>를 관통하는 문장은 "죽음은 삶의 반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주인공 와타나베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자살하거나, 죽거나, 그를 떠난다. 그래서 1968년의 와타나베는 별로 살아갈 생각이 없다.


그러나 2020년의 가후쿠와 미사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어린 딸이 죽고, 아내가 외도를 하다가 죽고, 학대한 엄마가 죽고, 집이 무너져도,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죽음은 삶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냐 아저씨> 속 소냐의 대사처럼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을 살아나간 뒤의 일이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어떻게든 자신의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밟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미사키는 한국 마트에서 익숙한 한국어로 장을 보고, 한국인 부부의 집에 있던 강아지를 태운 채 가후쿠의 자동차를 운전한다. 차선이 반대니까 일본에서와 반대로 달린다. 지금까지 달려온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들의 물건을 가지고 달려가는 것일까.


와타나베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끝내 몰랐지만, 미사키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마침내 알게 된 것 같다. 길의 끝에는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좋은 드라이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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