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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Mar 06. 2022

변성현은 포스트 허진호가 될 것인가?

<킹메이커>(변성현,2022)


1. <킹메이커>는 멜로 영화다. 그리고 <나의 PS 파트너>(2012), <불한당>(2017)에 이어 변성현 감독의 영화를 세 편째 보고 나서 나는 확신했다. 변성현은 어둠의 허진호가 될 작정이구나. 이 사람은 변태다.



2. <나의 PS 파트너>의 현승(지성)과 윤정(김아중)은 폰섹스로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에 뮤지션 남자 주인공이 임자 있는 여자와 사랑한다면 하이라이트에는 무조건 그녀를 데려오는 노래가 나와야 마땅하다. <웨딩 싱어>(1998)의 법칙이다. 이 영화도 그 법칙을 따라, 현승이 윤정의 결혼식에 난입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데, 이 세레나데라는 것이 "니 팬티를 내게 보여줘"라며 울부짖는 노래다(신해철이 만들었다).


영화 마지막, 남자는 "지금 무슨 팬티 입고 있어요?"라며 사랑을 고백하고, 여자는 "분홍색 레이스. 백업 스퀘어"라며 마음을 받아들인다. 세상에 이렇게 로맨틱한 변태들이 다 있다.



3. <불한당>은 느와르 영화 주제에 전작보다 더 깊은 사랑 얘기다. 현수(임시완)를 보는 재호(설경구)의 눈빛은 사랑이다. 재호의 손에 죽어가면서도 정신 차리라고, 너 그 애에게 홀려서 정신이 나간 거라고 호소하는 병갑(김희원)의 눈물도 사랑이다.


현수의 마음도 사랑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이의 손에 죽는 재호는, 마지막 순간에 그깟 사랑 하나 때문에, 탄식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병갑의 호소를 떠올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4. <킹메이커>는 김대중과 엄창록의 실화를 각색했다. 시대가 시대다 보니 박정희도 나오고 김영삼도 나오고(유재명이 등장하자마자 김영삼! 하고 속으로 외쳤다) 이철승도 나온다. 역시 화면 때깔이 남다르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우리 모두 아는 그 이야기이고 정치 영화인데, 묘하게 멜로 영화로 보인다. 꽤 절절하고 투박한.



5. 서창대(이선균)는 김운범(설경구)을 존경한 나머지, 그의 정치 행보에 도움이 되고 싶어 그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의 사무실에 찾아간다. 그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며, 그때 김운범은 서창대가 보내왔던 절절한 편지(당신과 함께하고 싶다는)를 꺼내며 여기 같이 넣은 꽃이 뭐냐 묻는다. 서창대는 어물어물 답한다. 애기똥풀이라는 것인데, 독이기도 하지만, 독을 치료하는 데도 쓰인다고. 그는 김운범에게 애기똥풀 한 송이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누군가의 꽃 한 송이가 되고 싶다는 그 마음. 이 정도면 러브 레터다. 정치란 원래 이렇게 로맨틱한 것인가.



6. 주변인의 방해가 빠지지 않는다. 박 비서(김성오)는 이북 출신 아웃사이더이자, 김운범의 다크나이트를 자처하는 서창대를 언제나 조롱하고 견제한다. 그러나 서창대는 굳건하다. 중정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해와도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중정 사람들이 서창대를 회유하기 위해 그의 집에 찾아왔을 때, 서창대의 어깨너머로 책상 위에 놓인 김운범 사진 액자가 보인다. 김운범은 서창대에게 종교인가? 나는 잠시 의심했다.



7. 신앙이 아니라 사랑임을 깨달은 것은 서창대의 얼굴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최고에 달했을 때, 김운범과 포옹을 나누는 서창대의 감격과 수줍음이 섞인 그 표정. 그리고 두 사람이 헤어지던 순간, 자세히 말하면 김운범이 서창대에게 이별을 고하던 순간 서창대의 표정은 사랑을 잃은 남자의 얼굴이다.


저 표정을 어디서 봤더라, 하고 생각하다가 곧 깨달았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2007)에서 자신을 떠나겠다는 여자 친구를 붙잡던 그 표정이다. 다 큰 어른이 애처럼 길가에 서서 가지마! 가지마! 소리 지르던, 금세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던 그 얼굴.



8. 6월 항쟁 이후에도 김운범은 선거에서 졌고, 머리가 하얗게 센 두 사람은 추억의 장소에서 재회한다.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난 두 사람. 각자의 선택으로 흘러가버린 정치사도, 두 사람의 관계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소회는 깊다.



9. 서창대가 떠나고, 김운범은 서창대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보냈던 편지를 다시 꺼낸다. 말라비틀어진 애기똥풀 꽃은 금세 부스러질 듯 애처롭다. 애기똥풀의 꽃말은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몰래 주는 사랑'이다.



10. 유재명이 연기하는 김영삼을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1. 설경구의 연기는 언제나 무시무시하지만, 김대중 역할은 안 어울렸다. 김대중 역할은 좀 더 뜨겁고 파워풀한 이미지의 배우가(최민식이나 이병헌 같은), 엄창록 역할은 좀 더 차갑고 날카로운 이미지의 배우가(한석규나 조우진 같은) 더 어울렸을 것 같다.


그러나 김운범과 서창대 역할에는 설경구와 이선균, 두 사람이 아주 적격이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정치 영화와 멜로 영화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감독 탓을 하지만 진짜 변태는 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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