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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Feb 23. 2022

아빠는 왜 내 집에 불쑥 찾아올까

<음식남녀>(1994)


나는 어릴 때부터 '내 공간'에 집착하고(열 살 때부터 방을 혼자 썼는데도), 혼자만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내성적인 인간. 주변인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INFP라서 정이 없다고 다들 나를 비난하지만, 그럴 때마다 감성적인 전갈자리인 나는 얼마나 상처를 받는지...


비슷한 이유로 나는 단골 가게가 유명해지면 투덜대며 다른 가게를 찾는 타입. 언젠가 한 번은 너무 유명해져서 발길을 끊은 동네 술집 앞을 지나가다가 사장님과 딱 마주쳤는데, 사장님이 너무나 반갑게 인사를 하시길래, 다음에 꼭 방문하겠다고 하고는 다음 날부터 마주칠까 봐 다른 길로 돌아갔던 적도 있다. 이제 사장님네 가게는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잖아요! 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이런 찌질한 성격이다 보니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않다. 나름의 일정을 소화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려는 토요일 밤, 친구가 술 마시자고 나오라고 갑자기 전화를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나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몇 안 되는 내 주변인들은 급만남에 내가 응하지 않아도 그러려니 하고,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연락 없이 내 집에 불쑥 찾아오는 일은 없다. 딱 한 사람, 아빠만 빼고.


아빠는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경상도 아버지 캐릭터만큼이나(재미있게도 아빠는 전라도 출신) 아주 무뚝뚝한 남자. 나 역시 귀여움을 떨거나 듬직함을 뽐내는 아들은 아닌 그저 그런 게으른 남자. 그래서 우리는 둘이 있으면 한 시간 동안 말 몇 마디 할까 말까 하는 그런 사이다.


나는 중2 때까지 일요일마다 아빠와 목욕탕에 갔다. 같이 목욕을 하고 오는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1. 목욕? (아들아 목욕 가겠니? 하는 뜻)

     -RE : (고개를 끄덕)


2. 아직이여(사우나에서 탈출하려는 나를 붙잡으며)

     -RE : (뿌리치고 달아난다)


3. (이제 등을 밀어야 하니 돌아앉으라는 뜻)

    -RE : (말없이 돌아앉는다)


4. 우유?(바나나우유 사 줄까?)

    -RE: 네!


대부분 이렇게 넷.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정말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아빠와의 대화는 대부분 아빠가 술을 마시고 왔을 때 진행됐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아빠는 퇴근 후 술을 마시면 통닭을 들고 돌아와 자고 있는 자식들을 깨워서 먹이는 20세기 아저씨였다. 그때만큼은 재미있게 말을 많이 하고 엄마랑 만담을 하고 그래서 나는 아빠가 술 마시고 들어오는 게 좋았다.


그게 싫어진 것은 사춘기 이후, 내가 아빠와 목욕탕을 함께 가지 않게 된 이후부터다. 내가 술을 마시고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 그때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며 나는 상경해서 수도권 이곳저곳을 떠돌며 15년째 혼자 살고 있는데, 한 번씩 아빠가 술에 취해서 내 집에 불쑥 찾아온다. 서울에 일이 있었다든가, 지나가다 들렀다든가 하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물론 그때마다 나는 불같이 화를 내지만, 늦은 시간 찾아온 아버지를 밖으로 내몰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도 그래서 미리 전화라도 좀 달라고 했더니 그다음부터는 전화해서 "이십 분 뒤 도착" 한다.


내가 살았던 이곳저곳을 아빠는 그런 식으로 한 곳도 빼놓지 않고 다 왔다. 언제나 방에 마주 앉아 맥주 몇 캔을 마시며 실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다음날 아침엔 지갑에 있는 현금을 모두 꺼내 주고 대전으로 돌아갔다.


예전에 한 번은 술에 취해 내가 살던 고시원에 찾아왔다(강북에서 수지까지 택시를 타고 왔다). 관짝 같은 방을 보더니 아빠는 미안하다고, 네 엄마에게 돌아가야겠다고 했다. 나는 아빠를 좁은 방에서 주무시게 하고 만화방에서 밤을 지샜다. 나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아빠는 그게 인상적이었는지, 이후에도 여러 번 그 일을 이야기하곤 했다.


아빠가 내 집에 불쑥 찾아오지 않게 된 것은 내가 진지하게 만나는 여자 친구가 있다고 선언한 뒤부터다. 여자 친구에게 가끔 목욕탕 이야기 같은 아버지 토크를 하면 깔깔 웃으며 편하게 오시게 하라고, 둘이서 자주 시간을 보내도록 노력하라고 하는데, 그건 우리 부자 모두 딱히 원하는 상황이 아니다.


아마 아빠는 나와 술을 마시고 싶은 것 같다. 아빠가 아는 유일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자 함께하는 놀이는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요즘도 본가에 내려가면 그렇게 막걸리며 맥주며 잔뜩 준비해뒀다가 하나씩 꺼내서 마시자고 꼬드기는 것이다. 아마 엄마가 이 얘기를 들으면 술 마실 핑계도 가지가지라며 혀를 차겠지.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 때, 아빠와의 소통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 나를 몇 년간 바둑 학원에 보냈다. 엄마가 이창호 기사를 좋아하기도 했고. 그래서 아빠와 나는 매주 토요일 저녁(용돈 받는 날이었다) 아홉 점을 깔고 치킨 내기 바둑을 뒀다. 한 판을 두는 동안 오간 대화는,


1. 왜 여다 뒀냐?

     RE : 그냥


뿐이었다. 엄마의 계획은 실패했다. 결국 아빠는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술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나중에 자식을 낳게 된다면, 그 애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왜 우리 아빠는 집에선 맨날 누워 있으면서 자꾸 같이 나가서 놀자고 하지 짜증 나게? 내 아빠가 열여섯 이후의 나만 보면 술 마시자고 하던 것처럼.


그러나 타지의, 크게 반기지도 않는 자식의 방에 찾아가, 용돈을 한 움큼 주고 다시 집에 돌아가는 아빠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좀 미안한 기분이 든다.


술을 마시니까 자식이랑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야. 오래된 루틴이니까. 취하니까  마음이 절제가  되고 찾아간 거야. 아빠도 감성적인 전갈자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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