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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리케인봉 Feb 09. 2022

우리들만의 넷플릭스 올림픽

<지금 우리 학교는>(Netflix,2022)


※ <지금 우리 학교는>의 결말을 포함한 내용이 있습니다.




1. <#살아있다>(조일형,2020)가 넷플릭스 순위 1위를 했을 때부터인것 같다. 넷플릭스를 국가별 컨텐츠가 맞붙는 올림픽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빌보드 차트처럼, 넷플릭스에서 순위에라도 들면 아주 떠들썩하다. 시골 마을에서 명문대 입학생이 나왔다고 현수막 걸고 잔치하는 느낌이다. 요즘은 어지간한 시골에서도 그렇게까지 안 한다.


올해 첫 금메달은 <지금 우리 학교는>이다. 메달 순위 집계가 매일같이 이어지고, 외국인(물론 백인과 흑인이며, 가끔 친한파 일본인이 등장한다) 리액션을 찍은 유튜브 영상이 올림픽 하이라이트만큼이나 많이 재생된다. 그리고 <지금 우리 학교는>의 금메달 획득은, 어느새 생겨난 '넷플릭스 K-컨텐츠'라는 장르 자체의 성공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좀비물은 특히 잘나가니까, 올림픽 종목으로 치면 양궁 정도 되겠다.



2. 드라마의 배경은 경기도의 가상도시 효산. 드라마 속 지도로 보나 뭘로 보나 안산이다. 좀비에게 점령당한 효산고등학교에 갇힌 학생들은 손을 맞잡고 서로를 위로하며 애타게 어른들의 구조를 기다린다. 교장 선생님을 포함한 학교의 어른들은 학생들의 구조나 사태의 해결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유일하게 학생들을 구조하려 했던 담임 선생님은, 꼭 살아남으라는 말을 남긴 채 좀비의 파도에 휩쓸리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은 깨닫는다. 어른들은 우리를 살리는 일에 관심이 없다. 

학교 선생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고, 구조하러 왔던 군인은 '어른의 사정'으로 미안하다는 말만 남긴 채 아이들을 학교에 버려두고 떠난다. 이제 학생들에게는 스스로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 좀비와 맞붙어 살아남는 길만 남았다. 이 드라마는 노골적으로 국민 모두의 트라우마가 된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킨다.



3. 학교에 갇힌 학생들을, 좀비에 점령당한 효산시를 구하려 하는 어른도 있다. 학교에 갇힌 딸을 구하기 위해 소방관 아빠는 초인적 작전능력으로 효산고 잠입을 시도하고, 최초로 좀비를 만든 선생을 추궁하던 형사는 뜬금없이 영유아들을 구출하며 탈출극을 시작한다.


그러나 시리즈 내내 펼쳐지는 이들의 목숨을 건 작전은 딱히 이야기 진행에 영향력이 없다. 형사는 보이는 모두를 구출하겠다며 어설픈 코미디를 가미한 탈출극을 펼치다가 힘없이 퇴장한다. 좀비 사태의 연구일지가 담긴 노트북이 학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태의 해결에 큰 역할을 할 만한 캐릭터임에도.


소방관 아빠는 결국 학교 잠입에 성공해서 딸과 친구들을 만난다. 이 장면에서 나는 이런 식의 이야기의 원형일 소설 <파리 대왕>을 떠올렸다. <파리 대왕>의 마지막, 자신들을 구하러 온 해군 장교를 본 소년들은 그동안의 야만성과 잔인함이 무색하게 모두 엉엉 울며 다시 순수한 소년으로 돌아간다. 그 어른들이 전쟁을 일으켜서 바깥 세상은 이미 박살났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소방관 아빠는 딸을 만나자마자 좀비에게 당한다. 학생들의 담임 선생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학생들을 위해 희생하며 그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준다. 망가진 학생들의 영혼은 어른의 등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효산고등학교는 청춘 캐릭터만 살아남는 곳이다. 순수함을 잃고 '파리 대왕'에게 홀린 학생은 좀비가 된다.



4. 좀비의 바다 한복판에 고립된 학생들의 캐릭터가 부딪히고 갈등이 해결되는 방식은 간단하다. 그룹의 결속을 해치는 행동을 한 학생은 좀비가 된다. 이기적으로 굴거나, 우정의 순수성을 의심하거나 하는 행동이다. 돌연변이 좀비가 된 반장을 믿지 못하겠다고, 무리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한 학생은 잔혹하리만큼 홀로 남겨져 좀비에게 물어뜯긴다. 모두가 말리는 내부 분쟁을 일으킨 지능 캐릭터 학생도, 뒤틀리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친구를 좀비로 만들어버린 학생도, 심지어 별다른 이유 없이 그룹과 떨어져 혼자 남은 양궁부 후배 학생도 '좀비형'을 받는다. 이 형벌은 이야기의 마지막, 남자 주인공이 자신을 희생해서 빌런이 된 좀비를 처치하고 나서야 끝난다. 이것은 굉장히 새로운 형태의 청춘물이다.



5. 연상호 감독이 세계인을 울린 아포칼립스 가족극도 빠질 수 없다.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에다가 첫사랑, 남매의 우애까지 추가했다. 시리즈 막바지에 양궁부 누나의 품에 안겨 좀비가 되는 학생은 오직 한 장면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로 보인다. 내내 쿨하고 듬직했던, 공격력까지 가진 양궁부 학생이 좀비가 되어가는 동생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내 동생 죽이지 말라고 애원하는 장면.



6. 계엄 사령관은 결국 효산시를 폭격하기로 결정 한다. 시리즈 내내 그는 원칙에 철저한 군인으로 보이기도 하고, 시민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관심없는 냉혈한으로 보이기도 한다. 효산시를 폭격한 뒤 그는 모두 자신이 지시한 일임을 영상으로 남기고 권총 자살한다. 죽은 그의 휴대폰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는 또다시 한국인들에게 끔찍한 트라우마를 남긴 과거의 사건을 떠올렸다. 그리고 계엄 사령관이 자신의 폭격 지시를 인정하고 자살로써 책임지는 부분에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7. 한국 사회에 대한 고발과 풍자도 넷플릭스 K-컨텐츠의 필수요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TV 환경에 비해 표현 수위가 자유로운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심야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성인 영화를 방영할 때 폭력 살인 욕설 음주 마약 장면은 내보내면서 흡연 장면은 굳이 지우고 내보내는 것이 현재 TV의 '기준'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도 적나라한 표현으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려 시도한다. 드라마 시작과 동시에 높은 수위로 묘사되는 학교 폭력은 결국 모든 사태의 원인이다. 원작 웹툰-세월호 참사 이전에 연재됐다-에서는 좀비 바이러스가 괴생명체에서 시작되지만, 드라마에서는 효산고 교사가 학교폭력 피해자인 아들을 위해 직접 만든다.


학교 폭력이 사태의 원인이며 세월호 참사까지 가져왔지만, 감정적으로 이를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 학교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 둘 다 돌연변이 좀비가 되었다면, 그리고 좀비 사태 이전에 그 폭력을 자극적으로 묘사했다면, 나중에 두 돌연변이가 싸워서 한 쪽이 죽거나 둘 다 빌런이 되는 쪽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가해자는 주인공이 목숨을 버려서 처치하는 최종 빌런이 되고, 좀비 사태는 결국 계엄사령관의 폭격으로 정리된다. 학교폭력 피해자 캐릭터는 오직 잔혹한 장면만을 위해 소모된다.



8. '넷플릭스 K-컨텐츠'의 과감한 수위는 사회 고발용이 아니라 자극을 위한 것이거나, TV 환경의 제약에서 벗어난 기쁨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오징어 게임>처럼 철저하게 장르적 쾌감을 위한 피칠갑을 보여주는 것이 더 솔직해 보인다.



9. 이 드라마에는 지금껏 우리가 '넷플릭스 K-컨텐츠'에서 봐온 모든 것이 다 있다. 세월호 참사를 모티브로 한 좀비들의 열연, 잔혹한 학교폭력 묘사로 보여주는 사회 고발성 메시지, 십대들의 첫사랑과 엇갈리는 미묘한 감정, 죽음 앞에서 애끓는 가족 신파, 그리고 공무원(경찰,소방관,교사,군인)의 직업의식까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높은 분' 캐릭터도 빠질 수 없다. 대중가요로 치면 '백화점식 앨범'이다. 분명히 재미있고, 세계인이 보기에도 재미있다.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말하자면(당연하지만) 이건 넷플릭스 금메달을 노리고 열심히 훈련해서 출전한 드라마다.



10. 그럼에도 <지우학>이 신선하고 재미있는 점은, 이 드라마가 좀비 액션물이 아니라 틴에이저 청춘물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서 가장 감정적이며 공들여 연출된 부분은 학교폭력에서 시작한 거대한 재난에 희생되는 학생들과 이를 애써 '해결'하려 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아니라 학교에 갇힌 학생들 사이의 감정선이다. 화면에 클로즈업 되는 것은 좀비와의 사투가 아니라 학생들 사이의 풋풋하고 불안정한 감정이다. 어떤 학생은 소꿉친구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 기계로 살던 학생은 재앙이 닥치고 나서야 첫사랑과 친구를 얻는다. 이들은 함께하는 순수한 우정과 계산 없는 연대만이 생존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햇살이 비치는 교실 안에서 손을 꼭 맞잡는다. 그래서 방송실에 갇힌 학생들이 캠코더에 대고 한 명씩 마지막이 될 자신의 이야기를 녹화하는 장면은 사뭇 감동적이다.



11. 이전에 <백두산>(이해준-김병서,2019)의 혹평을 보며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유명 액션 영화와 재난 영화 스토리를 무성의하게 반죽해 놓고 익숙한 배우의 매력과 화려한 볼거리로 대충 때우는 영화라는 얘기였다. 20세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욕하던 사람들의 말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넷플릭스 K-컨텐츠'는 이미 K-POP이나 K-DRAMA같은 장르가 됐다. 그리고 넷플릭스 공개를 줄줄이 앞두고 있는 국산 컨텐츠들의 면면을 보면 분명 더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며, 아마 크게 성공하는 사례가 또 나올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1등 좀 했다고 마을 입구에 현수막 걸고 호들갑 떠는 일은 조금 자제해도 좋을 것 같다.


오리콘 차트 1위 하면 국위 선양이고, 신문 1면에 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오리콘 차트 순위로 올림픽 하는 사람은 없다. 한국 아이돌이 오리콘 차트 1,2위 하는 게 당연한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들만의 넷플릭스 올림픽도 이제 끝내고, 모두가 즐기는 파티를 시작할 때가 된 것 같다.


https://youtu.be/AdnPmkFwrl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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