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물의 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Z Nov 10. 2023

걷고 있는 것뿐이다

지팡이를 짚은 사내를 앞에 두고 있다. 열심히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그를 멍하니 보고 섰다. 지팡이에 몸을 의탁한 채 한쪽 다리에 힘을 주었다가 빼기를 반복하며 나아가는 모습이 발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지팡이는 바닥을 찍어 누르고 한쪽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고 다른 한쪽 다리를 잃은 바짓가랑이는 바람에 속절없이 흩날리고 있다. 

날리는 바짓가랑이를 보며 생각한다. 달리고 있는 것이라고. 느리게 걷고 있는 듯 보이지만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사실은 달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에 잠겨있자니 두 다리로 가만 서 있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속으로 힘내세요,라는 말을 내뱉는다. 

그러다가 그러고 선 나에게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불편함을 느낀다. 언어로 형상화할 수 없는 그 감정을 마주하기가 버거워 나도 모르게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다. 내가 뭐라고 다와 다름에서 ‘힘듦’이라는 감정을 읽어내고 그의 삶을 측은한 시선으로 보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인 까닭이다. 

강박증이 심해서인지 차이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그 순간의 낯섦을 깊숙이 받아들이는 순간이 많다. 공이 즉 색이고 색이 즉 공이라는 염불도 자주 외고 매일 같이 기도를 다니는데도 다름을 감지하고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그 다름에 차이 둬 버리고 마는 순간은 아무래도 잘 없어지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차이로 단정되는 낯섦을 느낄 때면 내 속에서 나도 모르게 방지턱을 넘어설 때의 덜컹거림과 같은 자극을 남기고는 한다. 찰나이기는 하나 그 순간의 마음의 이지러짐을 마주하는 게 편치 않다. 다름 속에서 넘어설 수 없는 차이를 보는 내 시선에서 견딜 수 없는 폭력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힘을 가진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을 나누고 충만과 결핍을 분류하여 타인의 삶 자체를 재단해 버리는 것일까. 두 다리로 허리를 곧추세워 걸을 수 있다는 게 결핍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텐데 나는 왜 정신적 결핍은 보지 못하면서 보이는 것이 다르다고 하여 그러한 상황을 ‘힘듦’, ‘괴로움’과 같은 단어에 연결해 버리는 것일까. 

눈을 감은 채 생각한다. 외다리로 힘들게 걷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목표지점을 정해두고 그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뿐이다고. 그러니까 내가 눈앞의 그에게서 읽어내야 할 것은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고. 지팡이니 휠체어니 하는 것은 출발 지점과 결승 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지 그 과정 중에 눈에 담아야 할 것이 아니었다고.

눈을 뜬다. 저 멀리 한 사내가 보인다. 어딘가로 가고 있는. 그가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과 바람이 그를 감싸주고 있다는 것과 해가 지고 있다는 것만 느껴질 뿐, 다리가 둘인지 하나인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에게서 등을 돌려 선다. 그와 다르지 않게 나도 내가 가야 할 곳을 향해 발을 옮긴다. 노을이 진다. 길 위로 두 개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René Magritte_La Décalcomanie_1966


매거진의 이전글 꽃다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