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실리테이터란 무엇인가
2017년에 고려대학교와 서울시립대학교 교육 프로그램에서 화두로 던졌던 한 문구입니다.
"삼성전자는 왜 시급 50만 원을 주고 퍼실리테이터를 고용할까?"
저도 2017년에 처음으로 퍼실리테이터 개념을 접하고 진로 분야에서 교육봉사를 하며 러닝 퍼실리테이션 경험을 쌓아왔는데 그 경험 때문일지 언젠가부터 퍼실리테이터로서 역할하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사내 에자일 코치나 사내 퍼실리테이터, 퍼실리테이션 역량을 갖춘 HRD 담당자를 두는 것이 좋은 조직문화를 가진 기업의 조건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역량의 트렌드와 역할은 Job description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2024년 상반기에 올라온 현대자동차 인재개발 JD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퍼실리테이터를 단순히 워크숍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역할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퍼실리테이터에게 워크숍은 일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워크숍은 조직의 변화나 혁신을 이끌고, 구성원 개개인의 전문성 개발과 일에 있어서의 효능감과 참여 동기를 유발하고, 조직문화를 내재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죠.
퍼실리테이터 Facilitate는 가능하게 하고 촉진시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동사에 들어가는 모든 게 퍼실리테이터의 일이 됩니다. 회의가 가능하게 하고, 아이디어가 촉진되게 하고, 전략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전반의 활동을 합니다.
따라서 퍼실리테이터가 수행하는 퍼실리테이션은 그룹의 구성원들이 효과적인 기법과 절차에 따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상호작용을 촉진하여 목적을 달성하도록 돕는 활동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과 교육학, 경영학 여러 분야에 대한 폭넓은 전문성과 인간 존중과 성장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갖고 이러한 퍼실리테이션 활동을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을 퍼실리테이터라고 합니다.
최근처럼 비즈니스가 역동적으로 돌아가고 한 사람마다 전문가로서 성장하여 조직에 기여하길 바라는 환경에서는 특히 유연하게 변화하고 진정성 있게 소통하기 위해 퍼실리테이터가 필요한 것이지요.
사내 퍼실리테이터의 혁신, KT의 사례
KT가 2013년, 2014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다가 업계 1등으로 다시 튀어 오른 때가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은 그 힘으로 1등 워크숍과 퍼실리테이터 양성을 꼽기도 합니다. 당시 위기를 겪으며 '소통' '협업' '임파워먼트'가 강조되었고 임원에서부터 어젠다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1등 워크숍]이라는 것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1등 워크숍은 직원들이 모여서 회사 내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아이디어 도출 등을 위해 끝장토론을 펼치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이때에는 '모든 문제는 현장에 있다'는 철학 아래 직급이나 부서에 상관없이 회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1등 워크숍의 힘은 무엇보다 그 실행력에 있는데요. 결과가 도출된다고 해도 실행이 없다면 그 과정이 무의미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1등 워크숍에서는 현장에 함께 한 임원이 그 자리에서 실행여부를 결정해 주니 실행까지 지체할 이유가 없습니다. 최근 조직에서는 사일로 silo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데 1등 워크숍은 특정 주제에 대해 관련 팀은 물론 그룹사 담당자들이 모두 모여 토론을 벌이기 때문에 부서 간의 벽을 허무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KT의 사내 퍼실리테이터들은 끝장토론의 진행자처럼 워크숍 진행을 맡습니다.
그룹 내 각 조직에서 지원 및 추천을 통해 선발된 퍼실리테이터는 짧은 시간에 효과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회의를 이끌어 나갑니다. 업무 외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하지만 회사 업무를 종합적으로 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워크숍 진행자로 느끼는 뿌듯함이 크기 때문에 퍼실리테이터는 매년 늘어가고 있는 상황이며 사내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은 1등 워크숍과 같은 문제 해결 워크숍뿐 아니라 성과창출, 아이디어 발굴, 전략 수립 등 다양한 워크숍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특히 MZ세대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퍼실리테이션은 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말이 등장했다는 건 중요한 가치관이나 일상의 변화가 왔다는 것이고, 기업에서는 MZ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이 퇴사하는 것이나 기존의 성과 내는 방식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성과나 가치를 두고 일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거든요. 아마 부장 세대, 낀 세대, MZ세대까지 회사에서 세대로 나눠 이 갈등을 다루고자 하지만 이는 본질 적으로 소통 문제 혹은 문화의 문제이기 때문에 퍼실리테이터가 필요한 현황입니다. 사실은 조직 내 문제가 MZ세대로 인해 완전히 새롭게 생긴 게 아니라 있었던 문제가 드러난 것뿐이거든요. 이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만 조직 구성원들의 조직몰입을 이끌 수 있고, 그렇게 몰입을 충분히 하는 구성원이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HDC현대산업개발그룹은 수평적 토론과 자발적인 회의 문화 구현을 위해 HDC퍼실리테이터를 선발·양성하기도 하고, 삼성은 에자일 코치를 전문적으로 키워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하거나 구성원 개개인의 전문성을 키우는 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 있습니다. 이러한 퍼실리테이션은 구성원이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기존 업무 성과를 개선하거나 추가적인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업스킬링과 기존 업무 외에 새로운 역할을 맡거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리스킬링을 통해 전문성을 개발하고 업무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직원들 스스로 성취감을 고취시킴은 물론, 조직 생산성 향상이나 업무 효율 개선에 있어서도 긍정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하지요. 퍼실리테이션은 시장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거나 지속해서 최신 기술을 익혀야 하는 산업군에 종사하는 경우 더욱 유용한 전략인데요. 이를 기업에 도입하는 이유는 이러한 활동이 기업에 있어서도 유능한 인재들을 유지하고, 시장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죠.
물론 무조건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퍼실리테이터만 노력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개개인의 셀프 리더십과 역량 모델링 지원해 주는 기업의 노력도 필요하죠. 단기적으로 본다면 사실 퍼실리테이션은 큰 효율성이나 효과성이 있는 전략은 아니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구성원의 힘에서부터 조직의 변화나 혁신의 힘을 이끌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이 갈수록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이런 점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사내 퍼실리테이터를 양성하겠다는 것은 해당 업무를 맡을 구성원에게 오히려 피로감이나 무력감을 주는 처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퍼실리테이터로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면 자신의 전문성을 가지고 같은 조직 내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크로스 스킬링이 가능해지며, 요즘처럼 급변하는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고, 기업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다재다능한 인력풀을 갖춘다는 점에서도 기업에 큰 의의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케터가 개발 지식을 습득하거나, 디자이너가 마케팅 업무를 익힐 때의 시너지와 비슷한 것이죠. 따라서 퍼실리테이터가 많은 조직일수록 직원 개인의 업무 역량을 확장시켜 조직에 대한 이해도를 높은 구성원이 많아지게 됩니다.
특히 UN에서는 국제회의에서 그래픽 퍼실리테이션 기법을 활용했는데, 이를 통해 여러 국가에서 온 언어가 다른 이들과 공용어인 영어뿐 아니라 그래픽 요소를 더하여 합의의 내용을 보다 시각적으로 잘 구성하였다는 사례가 재밌었습니다.
무엇보다 퍼실리테이터 과정을 하다 보면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퍼실리테이터는 비즈니스 환경에서 개인 차원이 아닌 조직 차원에서 변화를 만들어 내고, 구성원들의 합의를 이끌어 의사결정권자가 직접 실행할 수 있게 도와야 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의견을 균형 있게 듣되 결단력 있게 무언가를 결정하는 리더십도 필요하죠.
리더십의 요소로 학습력과 포용력, 유연성, 일관성을 말합니다.
학습력은 구성원들의 의견을 이해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이며 이 의견에 대해서 충분히 함께 들어보고 소통할 수 있도록 촉진하며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포용력이 필요하죠. 또한 모든 사람의 의견을 다 듣되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과정이 운영될 수 있도록 유연성을 발휘해야 하며, 기분과 에너지의 변덕을 잘 관리하여 즉각적인 대처를 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하죠. 퍼실리테이터로서 저는 제 중요한 역량으로 경청을 생각했는데, 경청을 잘하려면 나 스스로가 누군가의 의견에 나의 자아를 투영하거나 나의 트라우마를 발동하지 않도록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경험과 성찰, 반추를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잘 들여다봐야지만 대상자의 마음을 백지처럼 잘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심리학자가 가져야 할 소양이 필요하고, 누군가를 바꾸기 위해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교육자의 소양이 필요하고, 기록을 잘해 모두가 같은 역사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점에서는 역사가의 소양이 필요했습니다. 때로는 마케터나 에디터의 글솜씨나 말솜씨가 필요했고 소통과정을 설계하고 교육자료를 만들면서는 의도대로 표현하기 위한 디자이너로서의 역량을 발휘해야 했습니다. 설계한 대로 잘 진행하기 위해서는 주를 잘할 수 있는 지휘자와 감독의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기존에 하던 일에 더해 퍼실리테이터로 일하기 위해서는 백지화시키는 작업과 Job Crafting을 통해 경험을 재구성하는 일을 했습니다.
1. 과업 설정하기(Task Crafting)
과업의 범위를 정하는 과정에 개인의 책무에도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기존에 수행하던 업무 내용을 확인하면서 본래 업무를 대체하거나, 새로운 업무와 직책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2. 관계 만들기(Relationship Crafting)
관계 형성을 통해 직장 내에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식에 변화를 줄 수도 있고, 클라이언트와의 관계에서 보다 리더십 있게 과정을 끌어가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대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 타인과의 소통 방식에도 변화를 줄 수 있기 때문인데요. 신규 입사자와의 관계 형성 도중, 비공식적인 멘토 역할을 맡는 것도 대표적인 관계 형성 사례입니다.
3. 인지변화 만들기(Cognitive crafting)
인지 변화의 핵심은 직업에 대한 개인의 마인드셋 변화에 있다고도 하는데요. 이 같은 인지 변화는 일과 일의 목적성에 대한 관점을 바꿀 때 가능해집니다. 단순히 맹목적으로 일을 하기보다는, 일을 통한 긍정적 영향력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실 미화원을 예로 들어본다면, 자신의 업무가 단순 청소라는 생각을 넘어, 해당 공간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퍼실리테이터를 하면서는 6 HAT 이론을 알고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는데요. 상황마다 기업마다 사람마다 모두 가진 상황이나 마음이 다르고, 어떤 때 어떤 모습을 꺼내서 보여줄지를 계속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저는 직책상의 리더가 아니더라도 퍼실리테이터라면 자신이 변화를 이끌어야 하거나 도와하는 부분에서는 리더십을 강력하게 발휘해야 한다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느껴보고 있습니다.
퍼실리테이터는 과정의 전문가라고도 합니다. 프로세스 이코노미라는 말처럼 갈수록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퍼실리테이터는 과정을 가장 잘 알고 그 과정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과정에 참여한 모두에게 쥐어준다는 점에서 가장 멋진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참여자가 많아진 과정은 더 힘을 얻을 수 있죠. 퍼실리테이터의 일은 이런 과정을 모두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로 나온 것을 실행까지 옮기는 데에서 끝납니다. 단순히 과정이 좋았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이 임팩트 있게 연결될 수 있게 돕는 역할이지요. 어떤 점에서는 잡음 속에서 신호를 찾고, 감각하지 못하는 것까지 촉각을 곤두세워 감각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퍼실리테이터가 현재 높은 가치를 가지는 건 개개인의 가치를 증진하고 그 가치나 힘이 조직에 모이게 해서 중요한 변화를 만들기 때문이 아닐지요. 한 명의 힘으로 일 하나를 하면 한 부분만 변화되겠지만 여러 일을 연결시키고 그 일 모두가 잘되도록 돕는다면 전체가 잘되지 않을지요. 전체주의가 아닌 개인에서 시작하는 문제 해결방식인 퍼실리테이션이 조금 더 많은 영역에서 쓰이길,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조직 내에서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