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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현 Nov 29. 2019

[도서리뷰] 지평(L'Horizon)

'기억'과 '시간'을 이야기하다


'기억'과 '시간'을 이야기하다


201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 환상적이고도 깊이 있는 문장으로
지나온 시간, 과거,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다

저자 : 파트릭 모디아노

출판 : 문학동네

발매 : 2014.12.05

개인적 평가 : ★★★★★


 파트릭 모디아노의 '지평(L'Horizon)'.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그의 표현력에 홀딱 빠져서 서점에 갔다 보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구매를 한 책이다. 2014년에 구매를 해서 한 번 읽고는 새로운 책을 사고 읽고를 반복하다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꺼내 읽었다. 책을 읽으며 아니, 왜 이런 책을 2년간이나 책장 속에서 잠들게 놔 두었었지? 라고 나 스스로에게 묻기를 수십 번.

 나는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혹은 추상적이고 중의적인 표현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내가 글을 쓸 때도 글을 읽을 때도 멋진 표현이 나오면 그 부분을 몇 번이고 반복해 표현 속에 감추어진 감정을 읽어내려고 노력한다. 이 책은 그런, 정말 '환상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문장들이 글의 모든 부분에서 등장한다.


얼마 전부터 보스망스는 젊었을 적의 일화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어지지 못하고 덜컥 끊겨버리는 일화들을, 이름없는 얼굴들을, 스치듯 지나가버린 만남들을.
그 모두는 아주 오래된 과거의 한 시기에 속했으면서
그의 생애의 여타 시기와 연결되지 못한 채 영원한 현재 속에 유예되어 있었다.
그가 아무리 그것들에 대해 혼자 의문을 제기한들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기억의 파편들은 영원히 불가사의로 남을지도 몰랐다.
9 page

 글의 첫 시작은 보스망스의 현재로부터 시작된다. 보스망스는 간간히 남아있는 자잘한 기억의 조각들을 조금씩 끌어모아 하나의 큰 덩이로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이 책은 그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격정적인 로맨스도, 폭발적인 클라이막스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글을 이끌어가는 내내 너무 늘어지지도 않고 너무 타이트하지도 않게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이야기 속에 마르가레트의 이야기가 있고,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는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존재'에 대한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서로 공유하며 그 이야기 속에서 서로의 커다란 기억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조각이 되어간다.


명멸하는 빛이 너무도 희미한 까닭에
그는 전체를 재구성할 수 있는 소재가 될 만한 작은 실마리들을 찾기 위해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보았지만,
거기엔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뿐, 전체는 없었다.
그는 차라리 그 암흑물질 속에 몸을 담그고 끊어진 선들을 하나하나 잇고 싶었다.
그랬다.
뒤로 돌아가서 그림자들을 포착하고
그것들을 더 찬찬히 살피고 싶었다.
되지 않았다.
10 page


 기억나지 않는 기억들을 파트릭 모디아노는 '암흑물질'이라고 이야기한다. 드문 드문 떠오르는 기억들은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가 되고, 기억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후회가 '안타깝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의 글 한 글자 한 글자에서 아주 진하게 묻어난다. 되돌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후회'나 '슬픔'처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이 글을 읽는 내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마치 글을 읽는 내가 보스망스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현재는 흘러가고, 흘러간 현재는 과거가 되어 기억 저 뒷편으로 사라진다. 나는 가끔 눈으로 사진을 찍듯 보이지 않는 투명 사각프레임을 씌워 내가 보는 것들을 보곤 하는데, 그 때 느끼는 복잡하고도 가슴이 벅차오르며 무언가 텅 비어버리는 듯한 미묘한 감정들이 이 글을 읽으며 다시금 느껴졌다.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나의 지나간 시간. 잃어버린, 어쩌면 그냥 내가 고의로 잊어버린 걸지도 모르는 어렴풋하고 안개같은 나의 기억들. 보스망스처럼 소파에 누워 구름 모양의 기억을 머리 위에 동동 띄운 채 되살려 보려 애를 써 보기도 한다.


우리가 그날그날 겪는 모든 일에는 현재의 불확실성이 그 흔적을 남긴다.
...
하지만 멀찍이 떨어져 세월이라는 거리를 두고 보면
우리가 현재 느끼는 불확실과 근심은 사라진다.
마치 라디오에서 나오는 깨끗한 음악을 못 듣게 방해하던 전파 잡음이 사라지듯.
그렇다,
지금에 와서 그 때를 생각하면 꿈속과 꼭 같았다.
투명하고 가없는 빛 속에 서로를 마주하고 앉아있던 마르가레트와 나.
55 page


 누군가에게 보스망스의 마르가레트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그리고 또 누군가 나의 마르가레트가 되어주기를, 내게도 마르가레트 같은 사람이 생긴다면. 기억 속에 남은 아름다운 과거의 운명이 끊어진 듯 현재로 건너뛰어와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의 흔적을 찾아낸다. 글을 읽으며 떠올려보았다. 나의 마르가레트는 누구인가, 나의 기억 속에 아련하면서도 애틋한, 깊은 상처로 남은 만남의 조각이 별의 파편처럼, 부스러기처럼 남아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몇 사람을 떠올려보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 건 내가 아직 '현재'의 보스망스만큼 살아보지 못 해서 일까.


긴 밤이 온전하게 그의 것이었다. 그는 그 구역에 더 머물고 싶었다.
그는 생의 한 교차로에, 보다 정확하게는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한 경계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미래.
그리고 또 하나의 단어, 지평.
그 시절의 저녁, 그 구역의 조용하고 텅 빈 거리들은 모두 미래와 지평으로 통하는 탈주로였다.
91 page


 글 속에서 '지평'이란 단어를 보자마자,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책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지평'으로 향한다. 지평은 미래이자, 과거와 현재를 통해 맞이하게 되는 마지막이자, 인생의 어떤 변화에 대한 경계였다. 눈 앞에 커다란 지평선이 보이는 듯 했다. 붉은 노을이 펼쳐져 있고, 더 붉게 물들어 해그림자가 지는 거친 땅에 두 발을 딛고 내가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두근거림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눈을 따갑게 하고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모래같은 불안을 가득 품고 있었지만, 눈을 감지 않고 시선을 지평선에 고정시킨 채 곧게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호텔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시절 이후 오랜 세월을 그는 삶의 일상사에 실려왔다.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과 우리사이의 차이를 없애는,
그리고 사람들이 세월이라 부르는 일종의 안개,
그 단조로운 흐름 속으로 서서히 섞여드는 그런 일상사들에.
그는 그 무감각 상태에서 퍼뜩 깨어난 느낌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저 복도를 따라 프런트까지 가서 마르가레트의 객실 호수를 묻기만 하면 된다.
이 호텔과 주변거리들에 그녀의 왕래가 남긴 파장이, 그 메아리가 분명 남아있을 것이다.
93 page


 글의 마지막에서 나는 한번 더 감탄했다. 마르가레트의 흔적을 찾아낸 보스망스의 마지막을 파트릭 모디아노는 열린 결말로 장식했다. 마르가레트를 만났다는 이야기도, 심지어 마르가레트를 만나러 서점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에게서 '서점은 밤 늦게까지 열려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로 끝을 맺는 부분에서 쓰나미같은 감동이 밀려들었다.

 정말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것 없는 책이다. 원서를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한글로 표현이 잘 되어있는 문장들도, 글의 진행속도나 인물들의 관계, 진행 과정들이 모두 다 멋지다. 소로우의 '월든'을 언제나 인생의 책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니는 내게 큰 동요를 일으키는 책이었다. 어떤 책을 추천하겠냐 물으면 가차없이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을 추천할 수 있을 정도. '기억의 연금술사' 파트릭 모디아노의 '지평'. 노스탤지어의 감성과 기억에 대한 슬프고도 깊은 아름다움을 그 어떤것보다 잘 표현해낸 환상적인 책이다.



오랜세월 그는 마르가레트가 벌써 죽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럴리가 없다.
그래, 그럴리가 없다.
우리 둘이 태어나던 그 해, 이 도시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잔해더미에 불과했던 그 해에도
공원 저 구석 폐허 사이에서는 라일락이 꽃을 피웠다.

너무 많이 걸었더니 피로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평온한 느낌과 함께, 그가 어느날 떠나온 그 장소 그 지점으로
같은 시간 같은 계절에 돌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시계의 두 바늘이 정오가 되면 하나 되어 만나는 것처럼
그는 공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외침소리와 옆에서 들리는 나직한 대화 소리에 몸을 실은 채,
반은 깨고 반은 잠든 듯한 상태로 부유하듯 걸었다.
저녁 일곱시다.
로드 밀러는 서점 주인이 밤늦도록 문을 열어둔다고 했다.
184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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