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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현 Dec 12. 2019

우울을 옅게 하는 법 - 4

떠나야 하는 순간을 결정하는 것

 떠난다는 말은 무척이나 많은 의미로 변모할 수 있다. 나에게서 네가 떠난다, 나는 이 곳의 모든 걸 그만두고 떠나겠다, 나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떠나겠다…등등.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선택이라는 것은 바로 '순간을 결정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것'인 거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들은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걸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그러면 그 뒤에 반드시 따라오는 감정은 내가 부유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함과 막막함이다. 마치 민들레 홀씨와도 같은 삶이, 어느 곳엔가 자리를 잡고 튼튼한 뿌리를 내려 올곧고 예쁘게 자라나 꽃처럼 활짝 피어 반짝이고 후회 없이 아름답게 져 가고 싶은 마음. 누구나 저 사람은 잘 사는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예쁘게 정돈된 길 위의 삶,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남들은 다 그렇게 살아가는데라는 열등감과 초라함, 소외감.


 이전에 말했듯이, 솔직하게, 그런 감정을 단 하루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누군가보다 더 그 길에 가까이 서 있다는 생각이 들면 괜스레 '난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더 잘 살고 있을 거야'라는 근본 없는 우월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 감정들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수증기에서 물로, 물에서 얼음으로 변할 때 열이 빠져나오듯, 부정적인 감정의 형태가 변화하면 그 상태에 존재하던 감정들이 빠져나와 우울이나 슬픔, 자괴감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이 자주 일어날수록, 우리는 점점 더 긍정적인 감정들이 빠져나와 차지할 마음의 공간을 잃어가게 된다.


 떠나고 싶다면 망설이지 마라. 지치고 힘들 때, 떠나라. 떠나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떠나가길 부추기는 안개 같은 무리들의 말들과 흔들리는 마음에 모든 걸 다 뒤로 하고 떠나고 싶을 때, 나는 정작 떠날 수 없었다. 그것이 어느 자리든, 어디로 가기로 마음먹었든 간에 나도 모르는 새 내려진 뿌리를 잘라낼 수 없었다.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에 그랬지, 당연히 그러고 싶은데 말이야 쉽지. 갖은 핑계로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꿋꿋이 땅을 파고 들어간 뿌리를 감싸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나는 현실을 깨달은 사람이고, 이상이나 꿈만 좇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자신을 철이 든, 현실주의적인 어른인 마냥 포장했다. 현실을 위해 그 정도는 속이 쓰려도 미뤄둘 수 있고, 속 쓰린 건 어릴 적 보았던 어른들 마냥 소주 한 잔에 웃고 털어 넘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인 마냥 나를 꽁꽁 둘러맸다.


그러던 내가 비행기표를 결제한 건, 어느 추운 늦가을 새벽, 보일러를 미약하게 튼 방 안 컴퓨터 앞이었다. 그때 나는 아주 유명하고 오래된 걸그룹 모 양의 첫 솔로곡을 듣고 있었다. 베란다를 통해 전해져 오는 늦가을-초겨울의 찬 새벽이 정수리를 타고 머릿속을 맴맴 맴돌았다. 당장 어떻게 갈지, 어디를 갈지, 얼마나 갈지.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결제하고 났을 땐 기간이 거의 한 달 정도로 맞춰지긴 했지만, 출국일부터 귀국일까지 나는 그저 비행기표가 저렴하게 나온 날짜를 선택했다.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결제까지 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일을 언제 그만둘지, 여행 경비나 다녀와서 일은 어떻게 다시 시작할지,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4개월 후의 비행기표부터 덜컥 결제한 것이다. 평소에도 늘 하고 싶던 떠나는 일을, 나는 5분이 채 안 되는 노래를 듣다가 성공하고야 만 것이다.


 평소와 달랐던 건 단 한 가지였다. 어제보다 조금 더 추워진 날씨에 손끝이 얼자 새벽에 내려앉는 공기처럼 내려앉아있던 나의 기분과 그 아래의 우울의 표면이 살짝 얼어붙어, 비치지 않던 내 모습이 살짝 비쳤다는 것. 가라앉은 나의 기분과 내가, 내 손가락 끝과 모니터 사이의 거리만큼 살짝 멀어졌다는 것. 바로 그거였다. 기분이 좋아서, 이제쯤 떠나야 할 것 같아서? 글쎄, 누군가는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만성적인 우울과 피로감에 시달리던 나는 아니었다. 내가 떠나야 할 시기를 결정한 건, 아주 살짝 그 몸살과도 같은 우울과 거리를 두었을 때였다. 아, 우울하다... 인 때가 아니라, 아, 내가 우울한 걸 느끼고 있구나... 인 바로 그때. 그때가 내가 떠나야 할 시기였고, 그 시기를 정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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