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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으로 Jan 31. 2023

발렌타인 데이를 위한 와인들

겨울에는 이 와인을-3

고대 로마의 군인들이 직업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최고의 고충은 금혼령이 아니었을까?

말 그대로 그들은 제대를 하는 40세가 될 때까지는 결혼할 수 없었다. 클라우디우스 2세가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군인들에게 금혼령을 내렸던 것이다. 물론 암암리에 애인도 만들고 동거도 하는 등 다 알아서 연애를 했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법률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들을 모아 놓고 꽃피는 청춘의 연애를 금지하다니. 너무 가혹한 악법이지 않은가! 이런 마음을 시대를 뛰어넘는 듯 싶다. 그때에도 나처럼 이들을 애잔하게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발렌티노 주교였다. 그는 현재 이탈리아 움부리아 주에 있는 '테르니'시의 주교였는데 사랑하는 연인들이 남몰래 마음 고생하면서 만나는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을 몰래 결혼시켜주었다. 연인들에게는 구원자였지만 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엄중한 국법을 어긴 범법자였기에 이 사실이 발각되자 그는 결국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도 몸둥이로 맞아서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사랑하는 이들을 맺어준 대가치고는 너무나도 혹독한 형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2월에 마시기 좋은 와인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고 왜 갑자기 로마의 국법 얘기를 하는 것일까. 이미 짐작한 분들도 계실 듯 한데 바로 발렌티노 주교가 발렌타인 데이를 탄생시킨 분이다. 그 분의 축일이자 순교일이 2월 14일이었기에 이 날이 발렌타인 데이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초콜릿과 성 발렌티노 주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이것은 초콜릿 회사의 성공적인 마케팅과 결합되어 '초콜릿을 주는 날'로 인식되고 있다.

그 유래가 어떠하든 현재 발렌타인 데이는 모든 연인들을 위한 로맨틱한 날의 대명사이다. 이날의 주인공은 초콜릿이지만 와인 역시 그 존재감이 만만치 않은 씬스틸러라 할 수 있다.


그럼 본격적으로 와인 이야기를 풀어보자. 사랑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이 날에 딱 맞는 와인을 먼저 소개하면, 바로 이탈리아의 대형 와인 그룹인 에티케의 '아마미 프리미티보'와  '아마미 몬테풀치아노 다부르쪼'이다. 이 와인들을 왜 발렌타인 데이에 소개하는지는 사실 설명이 필요없다. 레이블을 보면 '그냥' '누구라도', '바로', '직관적으로' "아!"하고 바로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왼쪽의 노란 하트가 몬테풀치아노이고 빨간 하트가 프리미티보이다.


커다란 하트 모양의 도자기 공예품으로 장식된 와인은 말 그대로 '하트 하트'하다. 눈에 확 들어오는 강렬한 하트 장식만으로도 충분한데 와인의 이름마저 사랑 고백에 최적화되어 있다.  'Ama mi' 는 이탈리아어인데 'love me', 즉 '저를 사랑해 주세요.'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보다 더 이날에 기막히게 잘 맞는 와인이 있을까. 그래서 이 와인은 '고백용 와인'으로 입소문이 꽤 났고, 그 가격조차 매우 합리적이어서 더욱 좋다.  여담으로 (발렌타인 데이와는 상관없지만) 이 와인들은 2009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G8 정상회담 때 각국의 정상들에게 선물한 와인으로 그 유명세가 더욱 높아졌다.


 빨간 하트 와인의 주품종인 프리미티보는 미국에서 많이 생산되는 '진판델'과 같은 품종인데 색이 잉크처럼 진하고 강한 탄닌, 높은 알코올, 블랙 체리, 자두, 견과류의 풍미가 나며 잔당감도 꽤 있는 편이다.

 노란 하트 와인의 주품종인 몬테풀치아노는 겨울 와인 두 번째 글에서 짧게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탈리아 아부르쪼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레드 품종으로 진한 루비색과 라즈베리, 딸기 같은 붉은 과일향이 풍부하고 꽤 높은 산미와 탄닌을 보인다.

 둘 다 드라이한 레드 와인으로 토마토 소스의 이탈리아 요리나 오일 파스타 등과 함께 하면 더욱 맛있게 즐길 수 있다.


  이 와인들에 장식된 하트는 이탈리아 아말피 해변 마을인 비에트리 지역의 전통 공예인 '비에트리 세라믹'을 가공해 와인병에 부착한 것이다. 특허까지 취득한 이 와이너리만의 디자인으로, 흔하지 않아서 더욱 특별하다. 그래서 나에게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때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딱 알맞다. 너무 떨려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도 발렌타인 데이에 이 와인을 테이블에 올려놓는 순간, 이미 상대방은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않겠는가. 설령 고백을 받는 사람이 마음을 드러내는 어떠한 신호와 암시도 읽지 못할 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센스가 둔한 사람이어도 이번만큼은 바로 눈치챌 것이다.

 

 두 번째로 소개할 와인은 발렌타인 와인으로 예전부터 너무나도 유명한 프랑스 보르도의 '샤또 깔롱 세귀르'이다. 오래전부터 발렌타인 데이의 대표 선수였던 와인이다보니 너무 뻔하다 싶어서 소개를 하지 말까 생각도 했는데 그런만큼 살짝 언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오늘 소개하는 와인 리스트에 넣기로 했다. 유명 와인 만화책인 '신의 물방울'에서도 하트 모양의 레이블 덕분에 발렌타인 와인으로 유명하다고 말할 정도로 '발렌타인 데이'하면 딱 떠오르는 와인이다. 다만 가격이 (판매처마다 다르지만) 대략 20만원대 중후반으로 상당히 비싼 편이어서 가까이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는 와인이기도 하다.


 1800년대 샤또 깔롱의 주인이었던 세귀르 후작은 이미 보르도 와인의 최상위 등급인 샤또 라투르와 샤또 라피트를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내 마음은 깔롱에 있다." 라고 말해 샤또 깔롱 세귀르의 명물인 하트 레이블이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샤또 깔롱 세귀르는 보르도 대표 레드 품종인 까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메인으로 하고 그 외 까베르네 프랑, 쁘띠 베르도를 소량 첨가한 보르도 레드 블렌드 와인이다.  검은 과일향과 오크 숙성된 와인 특유의 향들, 즉, 나무, 견과류, 다크 초콜릿 등 풍부한 아로마를 품고 있는 매력 넘치는 와인이다. 긴 숙성력을 가진 와인인만큼 이 와인을 함께 마시는 애인과의 사랑은 어쩐지 길게 길게 이어질 것만 같다.  


사실 보르도 와인들의 레이블은 그 표기법에 대한 엄격한 법률과 등급 조건 때문에 호주나 뉴질랜드, 혹은 칠레, 아르헨티나 같은 신대륙 와인들에 비해 복잡하고 어려워서 그리 재미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와인의 터줏대감을 자처하는 지역이다 보니 딱딱하고 중후한 느낌이 강한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랑말랑한 느낌의 보르도 와인 레이블이라니. 보르도 와인이 한결 젊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독일의 유명 와인 생산지인 모젤의 리슬링으로 만든 '하트 투 하트' 역시 이날에 참 잘 어울린다. 이 와인은 100% 리슬링으로 만들었으며 세미 스위트 정도의 당도를 갖고 있는 화이트 와인이어서 너무 드라이하거나 떫게 느껴지는 레드 와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 드시기에 알맞을 듯 싶다. 또한 청사과, 파인애플, 복숭아 같은 과일향이 주를 이루고 있고 알코올 도수도 10.5%정도로 와인 중에서는 낮은 편이므로 술에 약한 분들도 너무 많이 마시지만 않는다면 편하게 즐길 수 있다.  


 모젤 피스포트 마을의 '라인홀트 하트' 와이너리에서 만든 이 와인은 오너 가문의 성인 'HAART'와 발음이 비슷한 'HEART'를 재치있게 연결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Heart to Heart'의 '마음을 터 놓고, 숨김없이'라는 의미 덕분에 사랑을 고백하거나 프로포즈 할 때 많이 사용된다고 한다. 발렌타인 데이처럼 내 마음을 숨김없이 터 놓기에 더 좋은 날이 어디 있겠는가. 고백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용기를 갖고 이 와인을 그 사람 앞에 살며시 내어 놓아보자.

   

이제부터는 발렌타인 데이의 주인공인 '초콜릿'에 조금 더 집중하여, 초콜릿 느낌이 물씬 나는 와인들을 소개할까 한다. 와인에 관심이 꽤 있는 분들이라면 이미 몇 가지 와인을 떠올렸을 텐데 여기에서 소개하려는 와인은 그 이름에서 부터 벌써 초콜릿 냄새를 뿜어내는 '초콜릿 박스'와 ' '섹슈얼 초콜릿'이다.


 '초콜릿 박스'는 호주의 유명 와인 산지인 '바로사 밸리'에서 생산된 와인으로, 레트로한 핀업걸을 테마로 만든 레이블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총 네 종류로 만들어졌다. '초콜릿 박스 다크 초콜릿(쉬라즈 100%)', '초콜릿 박스 트러플 초콜릿(까베르네 소비뇽 100%)', '초콜릿 박스 체리 초콜릿(그르나슈 53%, 쉬라즈 30%, 마타로 17%), '초콜릿 박스 스트로베리 초콜릿(쉬라즈 100% 스파클링 와인)' 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통적으로 다크 체리, 바닐라, 베리류 향과 무엇보다 초콜릿 풍미를 느낄 수 있으므로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 대신으로 혹은 초콜릿과 함께 하기에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특히 스파클링 와인인 '초콜릿 박스 스트로베리 초콜릿'은 압도적으로 화이트가 많은 스파클링 와인 시장에서 보기 드문 레드 스파클링이기에 새로운 와인 경험을 연인과 함께하는 추억을 쌓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다만 네 가지 모두 알코올 도수가 14-16%에 이르기 때문에 달콤한 느낌에 취해 조절하지 않고 마실 경우 다음날 와인 숙취를 경험할 수 있으니 자신의 주량에 맞게 즐기는 것을 잊지 말자.


자, 어느새 발렌타인 데이를 위한 마지막 와인을 소개하려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섹슈얼 초콜릿'이 그 주인공인데 이 와인을 만든 와인 메이커들의 스토리가 꽤 흥미롭다. 브랜드 알렌과 그의 친구인 보는 대학 신입생 때 와이너리 투어를 다녀온 후 자신들만의 와인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기숙사에서 나름대로 가내 수공업으로 와인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판매했는데 제법 인기를 끌자 아예 양조장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와인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두 젊은이가 열정과 패기로 도전하여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진판델과 쉬라즈를 최상의 비율로 블렌딩한 '섹슈얼 초콜릿'을 만들어낸 것이다.


진한 자주빛에 다크 체리, 레드 체리, 초콜릿, 향신료 향을 가진 이 와인은 특유의 진한 바닐라 향 때문에 호불호가 나누어지기도 하는데,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분들은 재어두고 마시고, 산미있고 깔끔한 스타일의 와인을 좋아하는 분은 피하는 편이라고 하니 자신의 입맛에 따라 선택할 것.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덧붙이면 이런 것은 와인의 품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와인은 정말 지극히 '취향'을 심하게 탄다. 즉, 자신의 입맛이 맞는 '스타일'에 따라 선택하는 것일 뿐 누군가 별로라고 했다는 이유로 그 와인을 직접 마셔보기 전에 미리 제쳐둘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설령 그 사람이 와인을 많이 마셔본 소위 '와인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사람마다 '짜다', '달다', '맵다'도 느끼는 기준이 다 다르듯 와인도 그 사람의 입맛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고 호불호가 나눠질 뿐이다.  


다시 '섹슈얼 초콜릿'이야기로 돌아가면 이 와인의 레이블도 톡톡 튀는 젊은 감성이 그대로 담겨있는데 언뜻 보기에는 참 성의없이 만든 레이블 같기도 하다. 낙서를 한 듯한 손글씨가 빼곡하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단순한 끄적거림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이 와인의 히스토리와 어떤 이들과 어떻게 즐기면 좋은지, 그리고 언제든지 전화하라며 자신들의 연락처를 남긴 친절한 와인 안내서이다.

 진판델 특유의 잔당감과 강렬함, 그리고 바닐라와 초콜릿 아로마는 이 와인의 섹시한 이름과 더해져 발렌타인 데이를 더욱 로맨틱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왼쪽 위부터 '하트 투 하트', 초콜릿 박스 시리즈(레트로한 레이블이 특징적이다), '섹슈얼 초콜릿'의 친근한 느낌을 주는 레이블


발렌타인 데이는 분명 연인들의 날이다. 초콜릿 회사의 마케팅이라는 쓴소리도 있기는 하지만 이런 특별한 날, 요란하지는 않아도 진솔한 마음을 담은 작은 선물을 주고받는 순간이 살아가는 재미와 행복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지금까지 함께 만나 본 와인들을 곁들인다면 더욱 잊지 못할 특별한 발렌타인 데이가 될 것이다.

자, 이제 곧 3월이다. 꽃피는 봄, 부드러운 봄바람은 어떤 와인으로 나를 이끌어줄까. 벌써 그 순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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