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고 길었던 코로나의 터널을 잘 피해가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직업상 PCR검사를 수시로 받아야 했던 남편 또한 매번 음성이 나와서 우리 가족은 다행스럽게도 이대로 지나가나보다 생각했는데 역시 예외는 없었다.
4월 초 아이가 갑자기 목이 아프다고 하더니 열이 나기 시작했다. 집에서 한 자가진단 검사 결과는 음성으로 나왔지만 본능적으로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른 아이를 데리고 집 앞 내과로 향했다.
의사 선생님이 검사 전에 목 안쪽을 먼저 확인하시더니 "요즘 목이 이렇게 빨갛고 열이 나면 거의 코로나에요. 요 나이때 아이들 증상이 이렇더라고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진 신속항원검사 결과는 역시 '양성' .
"아이들은 거의 하루 안에 열이 내리고 그럼 바로 좋아집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걸리면 어머니들도 2-3일 안에 거의 옮아서 오시니 마스크 잘 쓰시고 조심하세요."
라고 선생님이 미리 주의를 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이만 잘 격리시키면 무사히 지나가지 않을까 했는데 오미크론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일단 자기 방에서 격리에 들어간 아이가 화장실을 오갈 때마다 방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고 문이야 내가 닫아준다고 해도 음식이나 약을 챙겨주고 열을 체크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아이와 접촉하게 되는 경우가 꽤 있어서 아무리 마스크에 장갑으로 중무장(?)을 해도 오미크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확진된 날 10시간 넘게 길게 자더니 다음 날 정상 체온에 말짱한 얼굴로 컨디션이 살아났다(고맙게도 목이 조금 잠긴 것 외에는 별다른 후유증도 없어서 격리 기간 내내 핸드폰으로 게임하고, 영화도 보며 매우 즐거운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문제였다. 의사 선생님의 예언(?)대로 3일째 되는 날 아침, 눈을 뜨니 목이 따끔따끔 아팠는데 예전에 걸렸던 목감기의 통증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후다닥 일어나 KF94 마스크를 챙겨 쓴 후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도 의사 선생님이 목을 먼저 보시더니 "코로나 같은데요."라고 말씀하셨고 이 예측 역시 맞아 떨어졌다. 역시 '양성'. 일주일 격리가 시작된 것이다. 그 순간머릿속으로 분주히 날짜를 계산했다.
휴-.정말 천만다행으로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격리해제일이 시험 며칠 앞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날짜가 해결되자 이번에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오미크론의 흔한 후유증이 후각과 미각 상실인데 이런 증상이 있을 경우 와인 테이스팅은 순전히 운에 맡겨야만 했다. 원래부터 테이스팅은 이론보다 자신이 없는데 냄새를 못 맡거나 맛을 느끼지 못하면 아로마와 산도, 강도, 알코올 정도, 타닌 정도 등등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 눈앞이 깜깜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준비한 시험인데, 치열하게 공부했는데, '아- 이렇게 실패하나, 불합격하겠는데' 같은 부정적인 생각만 떠올라 마음이 금새 무거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오미크론 증상을 검색해보니 많이 아파서 죽다 살아났다는 후기가 연이어 눈에 들어왔다. 시험이 코앞이어서 막판 스퍼트를 올려야 하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코로나가 정말 짜쯩나도록 미웠다.
그러나 이렇게 근심 걱정만 싸안고 있는다고 나아질 것도 없었다. 확진된 것은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니 최대한 잘 관리하며 집에서 공부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병원 처방약과 생강즙, 수프 등등을 챙겨 옆에 두고 다시 교재를 펼쳤다.
오미크론 따위에 질 수 없는데 코가 막혀 힘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증상은 매우 가벼웠다. 열도 없었고 기침도 많이 나지 않았으며, 목이 아프고 맑은 콧물이 나오는 정도였다. 제일 힘든 증상이 코막힘이었는데 콧물이 꽤 있어서 코끝이 헐어서 아플 정도로 티슈를 달고 살았다. 목도 3일 정도 지나니 통증이 없어져서 격리 기간 내내 공부하기에 나쁘지 않은 컨디션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D-DAY. 오후에 시험 시간보다 이르게 시험 장소 근처 카페로 향했다. 약간의 코막힘 외에는 증상이 없고 입맛도 없었지만 남은 약을 먹어야 했고, 빈속에 와인을 테이스팅 하는 것도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아 아침 겸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주문했는데, 트레이를 받아 온 순간부터 영 당기지 않아서 잠시 샌드위치와 눈싸움을 했다.
친구가 응원차 보내 준 쿠폰으로 산 샌드위치여서 결국 한 조각 먹었다. 커피는 기꺼이 클리어.
시험은 2시부터 5시까지 였는데, 테이스팅 30분 후, 2시간 30분이 이론 시험 시간이었다. 테이스팅은 정말 그 순간의 감을 믿으며(이날까지 코가 막혀서 아로마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고, 코가 막히니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아서 더욱 집중해야 했다)신중히 맛을 보았고, 객관식은 20분 정도 안에 다 풀었던 것 같다.
서술형은 특정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연결시켜 그 지역의 대표 와인 품종을 설명하는 유형의 문제들이 나오는데 한 문제는 내가 많이 보지는 않았던 부분에서 출제되어서 순간당황했지만 생각나는대로 일단 다 쓰고 나왔다. 글씨를 오래써서 오른팔이 뻐근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시험장을 나서는 순간, 하루종일 긴장되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더니 테이스팅의 불안감보다 후련함이 가득 찼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시음만 PASS를 받으면 최하 등급을 받더라도 합격은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결과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 마냥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시험은 끝났다! 오늘은 그만 생각하자. 난 최선을 다했고 이제는 기다림의 시간이니까.
결과는 시험지들이 영국 WSET 본원으로 보내진 후 채점이 진행되기에 3-4개월 후에 나올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계속 불안해 하며 지낼 수는 없으니 이제는 털어버릴 수밖에!
초초함이 사라지자 그제야 허기가 느껴졌다. 후다닥 우리 동네로 와서 단골 카페에서 맛있는 스콘과 홍차로 소박하게 자축한 후 남편이 퇴근하자 함께 단골 치킨집으로 향했다.
와인 시험을 본 날 당연히 축하주는 와인으로 해야 분위기가 살겠지만, 격리가 풀린지 얼마 안 되어서 컨디션 조절을 위해 알코올 도수가 낮은 맥주로 대신했다. 사실 치맥은 언제 먹어도 맛있지 않은가. 평소 맥주보다는 와인이지만 이날만큼은 시원한 생맥주가 수험생(?)의 고단함을 단번에 날려주었다.
이 날 마신 맥주는 어느 때보다 시원하고 상큼했다.
이렇게 나의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WSET 시험이 마무리 되었다.
그럼 결과는 어떠했을까. 정확히 3개월이 지난 7월 15일 저녁 무렵 '띠링'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아! 합격했다! 예상대로 테이스팅은 높은 점수는 아니었는데, 난 PASS를 받은 것만으로 날아갈 만큼 기뻤다. 게다가 최종 합격 등급이 예상보다 높게 나와서 더욱 놀라고 행복했다. 책과 씨름하며 지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던 듯 하여 스스로를 토닥토닥 칭찬했다.
그리고 한 달여 후 인증서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 8월의 어느 더웠던 날, 더위를 뚫고 인증서를 찾아왔다. 이 분야에서 일할 것도 아닌데 정말 이게 뭐라고 그렇게 마음 졸이고 동동거리며 공부했나 싶기도 하지만 내 이름이 쓰인 인증서를 받으니 아직까지는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기에 늦지 않은 것 같아서 뿌듯했다.
L3 배지. 지갑에 넣어서 항상 갖고 다닌다.
사실 이 도전에 실패했어도 나는 변함없이 와인을 마셨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을 통해 얻게 된 최고의 성과는 조금 더 수월하게 나에게 맞는 와인을 고를 수 있고, 지인들이 부탁할 때 예전보다 더욱 다양한 와인을 추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더욱 풍요롭고 슬기로운 와인 생활을 하고 있다.
너무 당연한 얘기이지만 와인을 책으로 공부했다고 와인 맛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앞으로의 나의 와인 라이프가 더욱 기대된다. 내가 만나보고 싶고, 즐기게 될 미지의 와인들이 흘러 넘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