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회사의 제안 실책 2. 템플릿
광고계에 몸담은 지 오래되다 보니, 중요 폴더에 여러 광고회사의 제안서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습니다. 모든 제안서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머릿속에 강력하게 각인된 웰메이드 제안서는 소수 존재합니다. 특정 광고회사가 특출나게 잘 썼다기보다는, 아마도 해당 제안에 참여한 PM의 역량이 뛰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웰메이드라 여겨지는 제안서는 광고 바닥에서 조용히 떠돌아다니며 바이블처럼 여겨진다는 것이죠.
광고회사에는 다른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문화가 존재하며, 이를 기반한 정서가 고스란히 제안서에 반영되는데요. A광고회사는 전반적인 비주얼에 신경 쓰는 반면, B광고회사는 숫자에 집착하고, C광고회사는 디깅에 집중하며, D광고회사는 콘셉이나 테마에 집착하는 형태입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회사마다 고유한 스타일이지만,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체계가 녹아들게 되니... 이는 템플릿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템플릿은 정형화를 뜻합니다. 제안서 페이지마다 무엇을 넣을지 프레임을 정해두는 것이죠. 이는 제안서의 흐름이나 페이지마다 디자인 고민을 크게 줄여준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광고주 등 외부인에게 스타일을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고유한 콘셉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기억에 남을 만큼 긍정적으로 귀감이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중요한 건 내용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경쟁 PT에서 상대 광고회사에게 패를 까는 것과 다름없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어렵고, 광고주에게 기대감을 심어주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회사의 스타일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해관계 속에서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웰메이드 제안서는 어떻게 탄생할까요? PM의 역량이 중요하겠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큰 프레임 안에서 유연한 생각
광고업계에서 웰메이드 제안서라 여기고, 개인적으로도 생각하는 웰메이드 제안서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분명히 제안서 전반의 느낌은 특정 광고회사의 스타일이 느껴지지만, 페이지 하나씩 보면 작성자가 광고주 과제에 따라 흐름을 새롭게 구축한 것이 보입니다.
쉽게 말해, 큰 프레임은 유지하되, 연결되는 흐름이나 핵심 장표에 들어가야 할 요소를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이는 그저 작성자의 고집이 아니라, 광고주 과제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또는 강하게 어필하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기획/제작/미디어/프로모션을 나누어 키메시지를 제안하는 템플릿에 익숙한 광고회사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광고주는 24년 하반기 디지털 마케팅 제안을 요청했습니다. 내용을 보니 이미 전반적인 방향성과 핵심 콘셉이 담겨있네요. 그렇다면 이를 또 설명하기 위한 큰 틀의 기획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획 파트를 없애는가? 그건 옳지 않습니다. 저라면 제안서 전반을 제작물을 위한 크리에이티브 기획서로 만들고, 프로모션도 광고주가 생각한 방향과 콘셉에 해당하는 것으로 아이디어를 짜볼 것 같습니다.
이렇게 광고주의 과제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광고회사가 자신들이 만든 프레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그 틀을 마땅한 이유도 없이 고집하기 바쁩니다.
광고주는 과거와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많은 글에서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상호존중 없이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장황하게 교육하는 광고회사를 원하지 않습니다. 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의도를 이해하는 광고회사를 파트너로 두고 싶어 합니다. 이제 광고주 내부에도 실력 있는 마케터 분들이 많이 존재하니까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프레임 안에 유연함을 갖기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연함을 원하는 사람은 특정 사람이나 프레임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얽힌 아집이란 문화와 관성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웰메이드 제안서는 바로 이 부분에서 탄생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