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놀이 붐이다
슬램덩크가 붐이다. 지금은 90년대가 아니라 2023년인데 말이다. 주변 친구 중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안 본 사람을 찾기 어렵고, 그렇게 알파벳으로 묶기 좋아하는 MZ세대에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장르는 슬램덩크다. 1월 4일 처음 개봉한 뒤 일주일 정도나 알음알음 소문이 돌았지 이제는 농담이 아니라 대화에 끼기 위해서라도 이 영화를 봐야 한다. 더현대에서 열렸던 슬램덩크 팝업스토어는 터져나가는 인기와 업자들의 싹쓸이로 인해 조기 품절 사태를 빚었고 하다못해 영화관에서 상영 후 제공하는 특전까지도 프리미엄을 붙여서 팔려는 사람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업자가 붙었다는 이야기는 그만한 수요가 예측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슬램덩크 만화책은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하면 2주 이상 기다려야 받아볼 수 있고, 만화 카페에 가도 슬램덩크 책은 이미 다 빼가고 없을 정도다. 덕후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트위터에는 슬램덩크 관련 2차 창작이 폭포처럼 쏟아내려져 온다. 그야말로 슬램덩크의 재림이라고 볼 수 있다. 슬램덩크가 2023년 한국을 그야말로 강타한 이유가 뭘까?
첫 번째 이유는 재밌어서다. 산왕이라는 강팀을 이기기 위해 한 시합 내내 노력하는 북산 친구들을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고, 그 사이에 다케히코 이노우에가 빚어 놓은 캐릭터들의 매력이 빛나는 이야기는 혼을 빼앗아 놓을 만큼 재밌다. 농구도 슬램덩크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재밌는 이야기다. 그동안 주인공이었던 강백호 말고, 조명되지 않았던 송태섭이라는 인물의 성장기도 눈가를 촉촉하게 만들 정도로 감동적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응원해 주고 싶어 한다. 성장 서사가 주는 카타르시스가 엄청나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북산이 어떻게 마지막 산왕전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 마음이 어떤 결과 만들어내는지, 몰입해서 볼 수밖에 없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나온 젊은 세대는 20여 년 동안 쌓여온 슬램덩크의 족적을 파헤친다. 작가의 인터뷰, 성우진의 역사, 슬램덩크 원작 만화, 슬램덩크 애니메이션을 보고 조던 신발이나 등장인물의 유니폼을 사기도 한다. 누군가를 응원하고 싶다는 마음은 그들을 팬덤화 시키기에 충분하다. 이야기의 힘은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사람들은 잘 만든 이야기가 들리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시대가 되었다.
과연 이게 다일까? 과거에 흥했던 이야기가 다시 지금도 흥한다는 보장은 사실 어디에도 없다. 트렌드가 그 어느 때보다 빨리 변화하는 현대에 과거의 얘기가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왜 20년도 더 된 슬램덩크는 오히려 힙한 이야기처럼 느껴질까?
그건 아마 우리가 회빙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달픈 인생을 외면하고 현실을 다시 살고 싶은 MZ 세대의 욕망에서 비롯된 흥행이라고 일컬어지는 회귀∙빙의∙환생 줄여서 회빙환은 어느 플랫폼에서나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화산귀환이나 재벌집 막내아들이 처음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나름 신선한 소재였으나 지금은 웹 콘텐츠를 거의 지배하고 있다. 이미 한 번 인생을 경험한 주인공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주인공이 과거의 지식을 바탕으로 위기를 격파해 내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회빙환에 해당되는 재벌집 막내아들이 최근에 드라마화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어떤 식으로든 아주 강한 능력을 보유한 인물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독자는 쉽고 빠르게 위기를 이겨나가는 걸 즐긴다. 그게 슬램덩크랑 무슨 상관이냐고? 슬램덩크는 지금 흥행하는 이 모든 코드를 뒤엎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슬램덩크에는 탈인간급으로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농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수백 번 수천 번 연습한 고등부 농구 선수가 나올 뿐이다. 천재라고 불리는 선수들도 모든 경기에서 이기면서 격파하듯이 성장하는 게 아니라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뼈아픈 깨달음을 얻는다. 하물며 제게 필요한 경험을 달라는 에이스에게 패배를 안겨준다.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반칙하는 것처럼 모든 답을 꿰고 있지 않고 그저 정공법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밀고 나간다. 캐릭터들 또한 이 시대 콘텐츠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운동밖에 모르는 순박하고 정직한 청년들이다. 이미 웹 콘텐츠의 공식처럼 자리 잡은 정답을 알고 있어 빠른 속도로 위기를 해치우는 이야기 말고, 느려도 힘들어도 노력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인간적인 성장은 새롭고 또 힙한 이야기가 된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던 독자에게 신선한 자극과 감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까지 인기일까? 하고 묻는다면 시대가 지나면서 멸종되어 버린 이야기와 캐릭터에게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이건 새로운 이야기를 원한다는 대중들의 증명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재밌는 이야기를 원한다.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가 인기를 끌까? 우리는 이미 하나의 답을 만났다. 노란색 공을 수 백번 드리블해서 성장하는 이야기, 노력으로 땀으로 성공을 만들어 내는 이야기. 적어도 지금 남들과는 다른 이야기, 그게 20년 전에 유행했던 이야기일지라도 요즘 세대에게 새로운 이야기. 그건 확실하다. 독자는 늘 새롭고 힙한 콘텐츠를 찾아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더욱더 유행을 좇지 않고 남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주목받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먼치킨물이 인기인 세상에서 수천번 농구공을 튀기는 이야기가 주목받은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