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대 아이돌이 보여주는 길
아이돌 컨셉은 쉽게 납작한 말 안에 갇히곤 한다. 청순, 청량, 걸크러쉬같은 단어가 컨셉을 한마디로 정의하곤 했지만, 최근 4세대 아이돌은 다르다. 누가 더 확실한 정체성을 자리 잡느냐에 아이돌의 성공이 달린 시대가 왔다. 어떻게 하면 남들과는 다른지, 그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설득할 수 있는 아이돌이 성공한다. 그중에서도 하이브가 선보이는 아이돌은 조금 다르다. 하이브 레이블 산하 소스뮤직 소속 아이돌 르세라핌이 어느 길로 걸어가는지를 보면 그들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다.
르세라핌 허윤진은 최근 'Raise y_our glass'라는 자작곡을 발표했다. 데뷔 백일과 팬덤명 발표에 맞춰 팬을 향한 마음을 담은 곡을 냈다.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이돌, 그것도 여자 아이돌로서는 확실하게 다른 행보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 아이돌이 자신의 자작곡을 사운드클라우드로 공개한 경우는 거의 없다. 보통 이 시기에는 회사가 제안하는 컨셉에 맞춰서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멤버들이 프로듀싱에 처음부터 참여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자작곡을 선보일 기회가 많지 않다. 그렇기에 이 곡의 포인트가 '솔직함'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주목할 만 하다. 적재와 함께 만들어낸 이 노래는 마냥 밝지 않다. 허윤진이 이 곡의 포인트는 진솔함이라고 꼽았을 정도다. 담담하게 두려움이 없지만(I’m fearless) 여전히 나는 두렵다고(but I still fear) 말한다. 이 노래는 단순히 단어를 차용하지 않고, 데뷔 앨범에 흐르는 정서와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데뷔 앨범 FEARLESS에 담긴 다섯 곡의 노래는 같은 결의 파도를 일으킨다. 내 흉짐도 나의 일부라며, 겁이 없다고 말하는 ‘FEARLESS’, 왕자는 필요 없으니 목소리를 포기할 바에는 나로 살겠다며 인어공주 이야기를 비틀어버리는 ‘The Great Mermaid’, 호기심과 욕망을 따라 푸른 불꽃을 태우겠다는 ‘Blue flame’, 3개 국어로 꺾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인트로 ‘The World is Great Oyster’, 갖지 못하는 사랑은 신포도와 다름없으니 필요 없다고 말하는 ‘Sour Grape’까지 모두 당당하게 욕망을 말한다. 주체적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할 테니까 들어보라고 선언하는 어린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르세라핌의 자체 컨텐츠 인트로가 ‘The Great Mermaid’의 “난 신경 안 써.”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것도 꽤나 상징적이다. (원 가사: I don't give a shit! No love, no golden prince 그런 뒤틀린 사랑 나는 필요 없어)
아이돌의 기본은 팬덤이다. 아이돌이 어떤 메시지를 말하는지도 누군가 스스로를 팬덤으로 정체화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멤버들이 어떤 캐릭터인지 파악한 뒤에 이 앨범이 내 취향인지, 내가 이 앨범을 노래하는 가수를 지지하고 싶은지도 생각하게 된다. 때문에 납작한 말 아래 가둔 컨셉보다 더 뚜렷한 정체성을 말하는 그룹에게 눈이 갈 수밖에 없다. 이목을 끌고, 그 이목을 팬덤으로 만드는 데까지는 단순히 경탄을 일으키는 퍼포먼스나 노래를 넘어 아이돌의 정체성이 큰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관 이해가 어렵다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소속사들이 잠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깊숙히 끌어들이기 위해서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이돌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 세계관 구축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하나의 정서다. 그룹을 관통하는 정서. 우리는 두렵지 않다는 르세라핌의 정서처럼 말이다.
하이브 레이블은 르세라핌이 음악적으로 목소리를 낼 기회를 제공한다. 앨범을 통해서도, 자작곡을 통해서도, 브이로그를 꾸준히 업로드하면서도, 멤버들이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지, 그게 음악과 어떻게 맞닿는지 보여주면서 그룹의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때로는 두렵지 않다고 말하고 때로는 두렵다고 말한다. 그들의 목소리는 진솔하게 들린다. 밝든 밝지 않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르세라핌이 다음으로는 세계에 어떤 파도를 일으킬지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