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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Apr 19. 2021

영화 <아무도 없는 곳>

죽음과 삶 사이에서 결국 ‘이야기’라고 말하는 김종관의 공간

<아무도 없는 곳>

2021, 김종관 감독



일상의 풍광과 함께 마주하는 김종관의 이야기는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틀 또는 그와 맞물려 돌아가는 연출 자체가 흥미로운 것도 있겠지만, 감성적인 이야기를 더 깊게 만드는 서사의 구조나 공간적인 선택이 바로 그것이다. <최악의 하루>(2016) 속 두 남녀가 겪는 각자의 이야기와 남산이라는 공간이 그렇고, <더 테이블>(2017)의 네 가지 이야기와 그 공간이 되는 카페가 그렇다. 덕분에 인물이나 공간의 감정은 하나로 수렴하지 않고, 결말은 과정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김종관의 공간


김종관 작품 속 공간이라 했을 때, 카페나 남산 등 일상과 가까운 공간이 떠오르는 이유는 연출자만의 취향 또는 작품의 예산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특정 감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언급한 일상의 공간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감정으로만 표현될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회상의 공간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하루를 직면하기 직전의 공간이 되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백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어떤 감정이든 존재할 수 있는 일상의 공간이기에, 단순하지 않은 김종관의 이야기 역시 그 장소와 함께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따라서 그의 어떤 작품 속 서사적 구조는 쉽지 않게 느껴질 수 있지만, 마주하는 작품의 분위기나 그 감정이 갖는 힘은 어느 순간 명확한 위치에 놓여있다.


최악의 하루(왼쪽), 조제(오른쪽)


그런 점에서 그의 전작인 <조제>(2020)는 앞선 그의 작품들 중 가장 돌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김종관의 몽타주는 이어지는 장면 속 공간의 일상적인 요소와 감정의 기반을 마련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일 텐데, <조제>의 시작과 그 중간에 삽입되는 몽타주는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일상의 공간이 아닌, 작품 속 특정한 인물(들)만의 공간이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로 인해 인물이 겪고 있는 갈등이 필요 이상으로 뚜렷하게 펼쳐지며, 몽타주와 함께 쌓여가는 감정의 속도는 서사의 그것보다 더 가속되어 이야기의 후반은 과잉된 상태로 이어진다.


물론 그것이 흔히 말하는 ‘상업영화’ 또는 ‘장르영화’의 방식이다. 그러나 김종관의 연출은 점점 커지는 갈등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이야기와 함께 천천히 매듭지어가는 방식이기에, <조제>와 같이 비교적 명확한 감정이나 갈등이 드러난 상태의 장르적 서사에서는 그 전작들과 같은 효과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결국 일상의 공간과 몽타주가 서와 함께 어떤 구조와 감정을 만들어내는지를 보는 것이 김종관의 이야기가 잉태되는 세계를 마주하고 이해하는 기본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무도 없는 곳>의 공간 역시 일상의 일부이며, 쌓여가는 감정은 단순히 ‘슬픔’이나 ‘위로’ 같은 단어로 설명하기는 한계가 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또한 겉으로 드러나는 구조를 보았을 때 전작인 <더 테이블>과 같이 일종의 에피소드 형식의 작품으로 보이기 쉽다. <더 테이블> 속 공간인 카페는 시간과 인물의 변화만 있을 뿐 공간은 그대로이다. 그리고 각기 다른 인물의 대화와 그 이야기를 통해 한 공간을 다층적인 감정의 공간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나 각 이야기의 완성도와 흥미에 따라 관객들로 하여금 줄 세우기를 할 정도로 네 개의 이야기의 독립성이 강하다. <아무도 없는 곳>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 같지만, 이는 결국 창석(연우진)의 이야기이자 감정이며, 글을 쓴다는 설정과 ‘이야기’라는 요소를 통해 흥미로운 서사적 구조가 발생한다.


죽음과 이야기


창석은 이 이야기에서 죽음(들)을 마주하는 인물이다. 그것은 후반부에서 여실히 드러나듯 창석 본인이 느끼는 죽음의 불안함이 그 중심에 위치한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인물 모두가 전부 죽음과 관련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덕분에 앞서 언급했듯 에피소드 형식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이야기는 죽음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서사적 균형을 이어가고, 더 나아가 마지막에 글을 쓰는 창석의 모습과 함께, 어쩌면 그가 만난 모든 이들이 작품의 제목(아무도 없는 곳)과 관련된 위치에 놓인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즉 창석이 만난 대부분 인물이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것인데, 작품의 마지막에서 흑백으로 전환되는 순간과 함께 다시 보게 되는 ‘혼잣말 사람’(김금순)의 모습을 포함한 요소들이 그 추측에 힘을 더한다. 그런 구조적인 특징 역시 분명 <최악의 하루>와 같은 김종관의 작품의 연장선에서 보는 흥미로운 특징이리라. 그러나 그런 특징을 차치하고도 이 작품이 강조하는 ‘이야기’라는 단어는 이 작품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말한 것처럼 창석이 마주하는 인물들은 죽음과 가깝거나, 가까워진 죽음을 목격하거나,

아니면 죽음이라 불리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마주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창석과 대화한다. 그런데 그 대화에서 죽음이라는 요소가 가진 막연한 불안함이 대화의 막바지에서 큰 존재감을 발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해당 요소가 창석이 만나는 인물들과의 대화와 분위기를 이끌어낸 것은 맞지만, 점점 그 단어가 가진 불안과 부정적 의미들이 뭔가에 희석되어 가며 본래의 힘을 잃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분명 그것은 ‘이야기’ 때문이다. 창석이 미영(이지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성하(김상호)와 유진(윤혜리)이 창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그리고 주은(이주영)과 창석이 교환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들의 어느 지점부터 우리는 ‘죽음’이 그저 그 대화의 시작을 알리는 재료였을 뿐,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작품에서 이야기는 죽음과 대비되는 일종의 희망이다. 말한 것처럼 죽음이라는 단어가 있기에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지만, 이야기를 통해 오히려 그것을 잠시라도 잊게 된다. 미영은 사실 창석의 어머니이다. 현재의 자신을 잊고 과거의 자신만을 기억할 정도로 죽음에 가까워진, 그리고 남편의 죽음에 영향을 받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그게 단순히 가짜라서가 아니라 이제 희망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몸짓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창석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곧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결국 그녀는 죽음 앞에서 과거에 가장 좋았던 시간에 머물며 현재의 아픔을 잊으려는 인물인데, 창석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직접 이야기로 만들며 무기력함을 회복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렇게 이야기의 힘은 또 다른 이야기 또는 희망을 만들어낸다.


유진과의 이야기 역시 비슷할 것이다. 어둠이 깔린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하는 두 사람. 이때 그녀는 과거에 낙태한 경험을 말한다. 빛이 없어 두 사람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 순간과 함께 그 ‘죽음’은 무기력하게 침잠해가는 두 사람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이 피우는 담배 타는 소리와 대화의 끝까지 각자의 손에 있는 담뱃불을 통해 이것은 절망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결국 그럼에도 ‘이름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나 ‘달로 가는 것보다는 귀환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끝난 것처럼 보이는 것의 이후의 순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대화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마찬가지로 카페에서 만난 성하의 이야기는 직접적인 죽음으로 이어진 듯하나 갖고 있던 청산가리를 잊고 가는 순간을 만들어내고, 바에서 만난 주은이 마지막에 녹음하는 모습은 (다소 노골적인 게 사실이지만,) 이야기를 통해 오히려 삶의 의지를 갖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렇게 ‘이야기’는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들 것 같던 죽음을 잠시 잊게 만들 뿐만 아니라 오히려 희망을 조각해 나간다.


서사의 구조 


앞서 언급한 대로 <아무도 없는 곳>이라는 이 작품의 제목은 창석이 만난 이들이 사실 그가 쓴 이야기 속 가공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그렇다면 ‘미영’과 ‘창석 모’(문숙)의 이야기는 오히려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최책감이나 착란에 빠진 창석의 심리 상태를 표현한 것이겠지만, 작품의 마지막은 그런 것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다시 말해 창석이 만난 이들과는 실제 만남이 이루어진 게 맞을 수 있으며, 그 사실 여부가 이 작품의 성취에 큰 오류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아픔을 가진 창석의 상황과 그들의 존재가 구조적으로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유진과 함께 만난 ‘혼잣말 사람’은 흑백을 통해 다시 등장하고, 창석이 성하로부터 가져온 청산가리는 마치 원래 그의 방에 있었던 것 마냥 방에 함께 놓여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적인 재회(再會) 요소를 제외하고도, 그들의 대화 역시 그러한 구조적인 측면을 고려할 수 있게 만든다. 유진과의 대화에서 그녀가 과거에 만난 남자는 유학생이다. 그리고 작품의 후반에서 창석이 영국에 남겨놓고 온 아내의 존재가 드러난다, 이에 따라 어쩌면 ‘유진’과 그녀가 만난 ‘유학생’은 창석의 글 안에서 ‘그의 아내’와 ‘창석’을 표현하는 대체 인물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유진이 기억 속 유학생을 ‘미친 새끼’라고 말하는 건, 영국에 두고 온 아내로 인한 일종의 죄책감에서 촉발된 창석의 반성으로도 보인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또한 성하의 이야기 속에서 그의 아내는 죽음을 앞둔 사람인데, 마찬가지로 창석의 아내 역시 죽은 자식인 수연을 살아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병든 상태이다. 그렇기에 나중에 아내를 따라가겠다는 성하의 결심은 창석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며, 결국 성하가 청산가리를 잊고 카페를 나서는 것은, 병든 아내와 함께 삶에 지친 창석이 극단적 선택 앞에서 갈등하는 상황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 것이리라. 그리고 마지막에 직접 물에 청산가리를 탔지만, 다행히 직접 마시지는 않는다.(물론 마지막의 흑백은 ‘희망’이 아니라 현실 속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일지도 모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처음 미영과의 만남에서 창석의 어머니로 이어지는 것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남겨진 자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아내의 상태 때문에 창석이 상상하는 어떤 불안함이 느껴진다. 또한 바에서 만난 주은과의 대화는 분명 희망이지만, 주은처럼 죽음에 문턱까지 마주하지 않는 이상 창석이 희망을 쉽게 잡을 수 없는 것으로도 보인다.


돌출된 공간과 감정


이 글의 시작과 함께 언급했듯, 김종관의 이야기는 구조적으로도 흥미롭지만, 감정이 명확할 수 없는 일상의 공간을 이야기와 다층적인 감정의 공간으로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아무도 없는 곳>의 마무리에서 마주하는 공간은 이야기로 채워지고, 그 끝은 희망일지도 모르고, 누군가의 극단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가 가장 커 보인다. 이는 작품 속 이야기에서 죽음과 반대되는 결말을 맞이한 것처럼 보이는 네 개의 이야기인 탓도 있지만, 두 번 등장하는 창석의 방 때문이기도 하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주은과의 장면 이후, 어두운 방 안에 홀로 누워있던 창석은 책상에 놓인 청산가리 병을 응시한다. 앞선 대화의 공간들은 일상의 공간이기에 등장하자마자 명확한 감정으로 채워지지 않고,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그 공간의 감정과 의미가 전달된다. 그러나 후반에 처음 등장한 창석의 방은 청산가리가 든 병에 닿는 그의 시선과 함께 ‘불안의 공간’, 더 나아가 ‘죽음의 공간’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공중전화 부스에서 아내와의 대화가 이어진 뒤, 우리는 아픈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다시 마주한 창석의 방은 이미 슬픔 또는 죽음에 한없이 가까워진 공간으로 인식된다. 게다가 침대에 누워 흐느끼는 그의 뚜렷한 감정은 이미 형성된 공간의 감정을 배가시키며, 양립할 수 없는 감정으로 걷잡을 수 없이 수렴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글을 쓰고 있다. 다정한 노부부의 뒷모습도 보았으며, 과거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누군가의 모습(추측컨대 그의 엄마)까지 이어진다. 그렇기에 이젠 ‘희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획일화된 감정’에 이어지는 감정이 있다면, 또 다른 서사나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또 다른 획일화된 감정’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다. 창석이 마지막에 마주하는 사람의 몽타주들은 분명 희망이지만, 흑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죽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하나의 감정으로 이어진 탓에 이 장면들 역시 하나의 감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의 마무리는 ‘희망’ 또는 ‘위로’라는 감정으로 닫힌 채 (갑작스럽게)마무리되는 듯한 아쉬움을 갖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물론 <아무도 없는 곳>의 마무리가 작품 전체의 성취를 뒤흔들 정도로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틈을 만들어놓지 않은 마지막의 감정이 아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여전히 흥미로운 김종관만의 서사와 공간을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분명 죽음이든 삶이든 그 안에 존재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필연(必然)이라 설득하는 김종관의 인장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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