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오후 근무일이었다.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나 몸 상태가 평소와 다른 것은 느끼지 못했다. 평범하게 뭔가를 좀 먹고 준비하고 출근했다. 오전 근무자와 교대를 하고 그간의 차팅을 살펴보려는데 몸이 으실으실 추운 것이 느껴졌다. 이 여름에 왜이러지하면서 손은 마우스를 조작해 스크롤을 내리는데 뭔가 토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 갑자기 이 불편함은 뭐지? 하면서 체온을 재봤다. 37.5도? 내게 열이 나는 것은 참 드문 일인데. 지난번 코로나에 걸렸을 때도 나는 열증상은 없었다. 몸은 그저 눕고만 싶어서 매니저에게 이야기했더니 한 시간쯤 쉬다가 일을 하겠냐고 물었다. 아, 집엘 가고 싶은데... 집에 가서 그냥 뻗고 싶은데... 규정이 그렇단다. 응급실에 가는 것 아니면 그냥 좀 쉬다가 일에 복귀. 아...참 야박하기도 하다.
허락된 두 시간동안 잠시라도 편하게 눕고 싶어서 집엘 갔다. 침대에 누웠는데 잠은 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추웠다. 알람소리에 일어나서 다시 나갔다. 그럭저럭 버티고 돌아오자 하는 심정으로. 도착해서 체온을 재보니 38.6. 어라, 이게 뭔 일이지. 그냥 열 만으로도 나는 집에 가도 되게 되었다. 뭐지. 나는 피로가 누적돼 있던 탓에 솔직히 이런 사태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속으로 은근히 쾌재를 불렀다.
그즈음 일을 참 많이 했는데 결국 몸에 탈이 나는구나 싶자 이번 주말엔 엎어진 김에 쉬어가자 하는 심정이 되었다. 이게 늙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 앞으로는 더욱 질 높은 잠을 자고 잘 먹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피로를 남기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새삼 마음을 먹었다. 그러던중 온라인 기사에서 한 회사제품의 음료의 리콜 소식을 접했다. listeria균이 들어있을 우려가 있어서 리콜을 시행중이라고 했다.
별 관심없이 얼핏보는데 사진이 내가 늘 두고 애용하는 제품이었다. 주로 커피에 넣어 마시는 오트 밀크. 리콜 대상이 어느 시기에 생산된 것인지 코드 번호가 안내되어 있었다. 냉장고에 아직 두 통이 있는 오트 밀크를 가서 들여다보니 딱 코드가 일치했다. 흠... 이거로군. 그런데 이것을 마셨다기로소니 그렇게 바로 탈이 나나 싶었다. 문득 전 날의 일이 생각났다. 보통은 조금씩 커피에 넣어 마시는데, 심하게 익어가는 바나나 두 개를 처분하려고 오트밀크를 넣고 갈았다. 족히 2인분쯤 되는 이 달콤 고소 시원한 음료를 벌컥벌컥 원 샷했던 기억이 났다.
제품의 리콜 소식은 그 후 뉴스에 계속 여러번 나왔다. 그로인해 5명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는데, 구입한 사람은 버리고 반품하여 환불받으라고 했다. 냉장고에 있던 두 통을 버리고 이미 다 마셔서 빈 상태의 4통을 더 찾아냈다. 내 몸속에 이미 들어간 오트밀크는 8리터는 족히 되는 분량이었다. 여섯 통을 들고가서 약 2만원 정도 돌려받아왔다.
이틀동안 지속된 발열과 두 번의 설사 후 나의 몸은 정상을 되찾았다. 식욕이 그리 없더니 갑자기 몸이 원하는 메뉴가 선명하고도 강렬하게 나를 지배했다. 바로 된장찌개. 평소 매끼니를 '족보'에 있는 한식 메뉴로 채우는 것은 아닌 내 몸이 무슨 계시를 내리듯 특정 음식을 갈구할 줄이야.
당장 몸이 내리는 명령을 준수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마침 있던 재료들 호박, 감자, 양파, 그리고 두부, 거기에 매운 고추를 넣고 끓였다. 보글보글. 뜨겁고 살짝 얼큰한 된장찌개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니 느슨해져 있던 몸과 정신의 모든 세포들이 재정렬을 하는듯한 기분이 들며 기운이 솟았다. 음식을 먹고 '맛있다'말고 이런 강렬한 기쁨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다시 잘 살아봐야겠다 하는 생의 의지마저 준 된장째개의 힘!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한번도 절감해본적은 없는 것 같다. 나는 꼭 '밥'이 아니어도 무방한 사람이라서다. 이번에 체험한 신비한 '된장찌개의 힘'의 근거는 무엇일까. 어쩌면 찌개의 조건, 뜨거운 온도, 은근한 매운 맛, 그리고 적절히 짠 맛이 인간의 미각을 만족시킨 데서 온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이것은 다만 특별히 식탐이 많지도 않고, 미식가도 식도락가도 아닌 나의 그저 어설픈 생각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