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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원 Sep 13. 2020

이 땅의 스물과 스물다섯들에게

어른이 되는 게 두려우시다면

 2020년 쥐띠의 해, 스물다섯이 되고 말았다. 나는 괜찮은 어른으로 자라난 걸까? 시가 좋아졌고, 부쩍 클래식을 즐겨 듣게 되었고 이별을 한 것 외에 극적인 변화는 없다. 내가 아주 좋지도 그렇다고 싫지도 않은 상태다. 코로나 시국 탓에 만나던 사람만 만나니 스스로의 성숙도를 체크하기 어렵다. 물렁한 가치관도 그대로다. 이대로 서른이 될까 두렵다. 스물다섯을 어른의 분기점으로 삼은 이유는 별 거 없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한 선생님이 사람은 스물다섯 이후로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바지런히 스물다섯까지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살아왔다. 


 스물다섯이 되어 보니 선생님의 말이 맞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간의 경험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데 적절하게 뒷받침 해주긴 하지만, 경험과 근거들이 어쩐지 엉성하다. 나보다 더 나은 혹은 오래 산 사람들에게 내 태도와 생각에 대한 조언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다. 내 세계관과 철학에 대한 깊은 얘기는 좀처럼 친구, 가족과 나누기가 힘드니 말이다. 


 다행히 올초, 이런 조언을 기꺼이 나눠준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비대면이었지만. 그러나 모든 이가 이 조언에 접근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책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에 녹아 있는 조언들이기 때문이다. 학생과 어른의 기로에 선 사람, 사회초년생이 되기 직전의 사람, 아직 어른이 되기엔 글렀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 삶의 태도가 적절한가 고민하는 사람 모두에게 추천한다.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 요조, 임경선 - 문학동네


 이 책에는 '여자로 일하고 사랑하고 돈 벌고 견디고 기억하고 기록하며 우리가 나눈 모든 것'이라는 설명이 따라 붙는다. 설명답게 책에는 요조와 임경선이 견지하는 각종 삶의 태도가 듬뿍 들어있다. 사랑부터 일, 창작, 사회를 대하는 태도까지. 심지어는 생리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있다. 



언니들의 조언 맛뵈기 


"남들보다 조금 더 마음이 헤퍼서 조금 더 손해 보고 상처 입는다 해도, 줄 수 있는 사람, 주는 법을 아는 사람은 근사한 거 아닐까."


"사랑으로 엮인 관계 안에 계란처럼 비밀이 있다면 다들 조심조심했으면 좋겠어요. 뭐가 들었는지 일일이 바닥에 깨뜨리면서 이게 사랑이야!라고 외치는 바보짓은 제발 멈추고요."


"지옥이 별게 아냐. 혐오가 동력이 되는 사회, 이해와 타협, 합리적 논의 없는 힘겨루기로 상대 입을 막는 사회가 우리 가까이에 있는 지옥이라고 나는 생각해."


"함께 일하면서 기분 좋게 설득 당한다라는 요소는 무척 중요한 부분이야."



 밑줄치고 싶어서 안달나게 만드는 삶의 태도에 대한 문장들이 책 곳곳에 빼곡히 들어차있다. 교환일기 형식으로 전개 되어서 쉽게 읽힌다. 가끔 내가 너무 못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뜨끔할 때도 있지만 나를 향한 혼구녕 보다는 작가들 서로에게 건네는 진솔한 조언처럼 느껴져서 괜찮다. 게다가 두 작가 모두 한 챕터를 쉬지 않고 내리 읽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임경선 작가는 수필/에세이의 대가이니 말할 것도 없고, 신수진(요조) 작가의 글빨도 엄청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계기로 신수진 작가의 빅팬이 됐다. 집에서 근 두시간 거리에 있는 영화관에서 작가님이 진행하는 GV에 달려갔을 정도로. 



나를 사로잡은 신수진(요조) 작가의 문장들


"그런데 이 불안심리 말고도 문제가 또 있어요. 사실 저는 유능해지고 싶다는 유혹을 뿌리치는 게 몇 배는 더 힘들어요. 저에게 어떤 일을 맡기고 싶다는 메일을 읽을 때마다 얼마나 짜릿한지, 얼마나 행복한지! 내가 벌게 될 돈은 그 다음이에요. 일단 나를 어디선가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느끼는 쾌감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저에게 살아 있는 일의 재미를 느끼게 해줘요. 그리고 그 일을 잘해냈을 때, 칭찬이 들려올 때의 황홀이란... 사람들이 나를 찾는다는 데서 오는 잠깐의 우쭐함, 그러나 내일은 나를 조금도 찾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어떤 속담." 


"내가 손해 볼 일 없다는 전제 안에서 저는 언제나 속는 일에 적극적이고 싶어요. 영화에도 속고, 소설에도 속고, 사람들이 SNS에 올리는 일상과 사진에, 수다 속에 녹아들어가는 친구들의 자연스러운 허풍에, 애인의 엄살에 기꺼이 속아넘어가고 싶어요."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나 하는 의심이 들 때, 재밌고 쉽게 읽히지만 여운이 남는 글을 읽고 싶을 때 주저 말고 이 책을 펴보길 바란다. 나를 돌아 보고, 두 작가의 태도와 이야기, 문장에 감탄하게 될 테니. 심지어는 여자로 살아가는 누군가와 교환일기를 쓰고 싶은 갈망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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