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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티 Dec 09. 2023

남반구로 떠났던 소녀의 역수출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굳이 굳이 하는 나 자신 역수출

2011년 2월 1일에 나는 호주에 처음 도착했다. 한낮에 도착한 호주는 이제 무더운 더위가 꺾이고 늦여름으로 들어가는 시기였다. 도착하자마자 두툼한 겨울옷을 벗어던지고 출국장을 나섰는데 2023년 11월 20일 여름이 이제 막 시작하는 시기에 나는 반팔티, 반바지를 입고 호주를 떠나게 되었다.


6개월 만에 부자(?)가 되어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허황되지만 나름 굳세게 마음을 먹은 후 약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굳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 일련의 과정을 역수출에 빗댄다. 2011년 2월 나는 볼품없는 원재료로 호주에 입국했고 2023년 나는 갈고닦아져서 한국으로 역수출된 것. 2011년에 나는 어린 만큼 배울 것도 다듬을 것도 많았고 모르는 것도 많았다. 이는 단순히 학문이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 짬바도 포함한다. 몰랐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뛰어든 일이 많았고 맨 땅에 헤딩하며 말 그대로 고생도 사서 했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이런 경험 중에 하나가 바로 대학원 진학이었다. 언제나처럼 인생의 대소사를 앞두고 깊은 조사보다는 내 직감을 믿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았고 직업운도 좋았다. 학부 때부터 정말 해보고 싶었던 영상번역은 대학원 입학과 동시에 일이 풀려 현재는 오히려 일이 없을 때 은근히 좋기도 하고 통역도 점차 불러는 곳이 생기면서 아주 엄밀히 말하면 '굳이' 한국에 가는 것이 맞게 되었다. 문제는 항상 고생을 사서 하는 나에게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는 것이다. 바로 동시통역 마스터하기.


통역에는 여러 모드가 있다. 통역사라고 하면 흔히 부스에 앉아서 하는 통역을 생각하는데 그건 발화자가 말하는 동시에 통역하는 동시통역이다. 동시통역은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면서 아주 사소한 방해요소도 파급력이 크기 때문에 방음처리가 된 부스에서 통역한다. 그 외에는 더 정확한 통역이 필요할 때 노트테이킹을 하면서 발화를 끊어가며 하는 순차통역, 투어나 만찬 때 클라이언트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하는 수행통역도 있고 이때 노트테이킹이 불가하다면 귓속말로 위스퍼링(슈쇼타지) 동시통역을 제공한다.


통역은 상황에 따라 회의통역과 커뮤티니 통역으로도 나뉠 수도 있는데 전자는 말 그대로 회사나 정부 관계자들이 하는 회의 등에 참여해 제공하는 순차나 동시통역을 말한다. 후자는 이민자가 많은 호주 같은 나라에서 더 흔히 볼 수 있을 수 있는데 병원이나 법원 등에서 생활이나 이민 등에 필요한 서비스를 이용할 때 제공하는 통역으로 거의 대화 형태 발화를 다루고 순차통역이 많다.


앞서 서술했듯이 호주는 찐이민국가로 커뮤니티 통역이 대세이면서 순차 일이 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통번역사가 거의 100 퍼센트 프리랜서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은 통번역 대학원을 졸업하면 인하우스(상근 통번역사)로 취업할 건지 프리랜서로 일을 할 건지 선택할 수 있지만 호주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호주는 통번역사로 활동하기 위해서 나티(NAATI, National Accreditation Authority for Translators and Interpreters)라는 자격증 기관에서 주관하는 통번역 시험에 통과해야 하는데 이게 사실 만만치 않아 채점관으로 기용된 현직 통번역사들이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잘하는 사람도 일부러 떨어뜨린다는 다소 황당한 루머도 돌아다닌다.


나야 나티 자격증도 땄고 통대도 졸업 기준을 모두 맞췄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관문은 어느 정도 통과한 상태이지만 굳이 굳이 한국으로 나 자신을 역수출하는 이유는 앞서 말했다시피 동시통역을 마스터하기 위함이다. 게다가 나는 갓 대학원을 졸업한 통린이. 게임에 빗대자면 통역이 액티브 스킬이기는 하나 기를 모아야 쓸 수 있는 상태인데 문제는 아주 잠시 잠깐만 통역을 안 해도 금방 감을 잃어버린다. 게다가 동시통역은 딱 1년만 배워서 바로 좔좔좔 할 수 있는 일이 적어도 나에게는 아니다. 그리고 어떤 기술을 배우든 학습 이후 연마라는 단계가 있어야 어떤 상황에서든 그 기술로 빛날 수 있는 법. 그렇다면 학교 바깥에서 동시통역을 매일같이 연마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하는데 호주에서는 인하우스는커녕 애초에 동시통역을 할 기회조차 희박하니 정반대 상황인 한국으로 가야 달인까지는 안 되더라도 동시통역 일이 들어오면 자신 있게 받을 수 있는 실력을 쌓을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밑도 끝도 없는 감정에 휩쓸린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나 자신을 설득한 결과였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는 건 사실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씁쓸하기는 했다. 이제야 호주에 애정이 생겼고 뭔가 생활이 안정되어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시기에 왜 나는 또 고생을 사서 하려는 것인지,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역마살인지, 왜 나는 삶을 단순하게 살 수 없는지 조금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와 약속했다. 이제 너무 애쓰지 말자. 한국 가서 너무 힘들면 호주로 그냥 빨리 도망치자. 예전에는 한 우물 파기에 목맸다면 이제는 조금 내려놓고 고집부리지 않기로 했다. 6개월. 하기로 했으니까, 하고 싶은 일이니까 도전하되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얼른 호주로 돌아오기로. 다행히 호주는 어디 가지 않는다. 언제 돌아가도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맛있는 커피를 파는 우리 집 시드니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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