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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난 May 23. 2020

투병하는 에세이 쓰기 싫다



솔직히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써본 적도 없거니와, 따지자면 싫어하는 축에 가깝다. 나는 다양한 종류의 글을 좋아하며, 실제로 쓴다. 산문도 쓰고 단편 소설도 쓰고 장르 소설도 쓴다. 셋이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른다. 대학 다닐 적엔 과제로 무진장 글을 썼다. 서평이나 논문 같은 것. 시는 써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시인들은 전부 천재 같다.


에세이를 싫어하는 이유는 내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는) 남의 얘기가 궁금하지 않다. 브런치에는 에세이가 범람하지만, 나는 메인 화면의 이미지를 터치해서 글을 순식간에 읽어내리고,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기분으로 창을 닫는다. 타인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섬유근육통으로 나자빠진 병자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조회수를 기대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궁금해하겠냐?


나는 나의 고통에 관심이 있으므로 그것을 썼다. ‘에세이 쓰기’는 나에게 정신과 치료의 연장선이라고 해도 좋았다. 글로 쓰면서 사건을 객관화하고, 내 안에 남아있던 감정을 추스르고, 때로는 아예 부숴버리거나 새로 지었다. 보다 넓게는 다른 환우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의도나 병을 알리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으나, 브런치 통계 덕분에 나의 주제를 알게 되었다. 이 정도 조회수로는 무리다.


누군가는 자신의 퇴사에 관심이 있으므로 그것을 쓰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결혼에 관심이 있으므로 그것을 쓴다. 그럼 누가 에세이를 읽는가? 퇴사에 관심이 있거나 결혼에 관심이 있는 사람? 대부분은 개인적인 이유로 에세이를 쓰고, 또 개인적인 이유로 에세이를 읽지 않을까? 그렇다면 타인의 에세이를 왜 읽는가? 이것이 나의 최대 의문이었다.


최근, 여기에 관해 측근에게서 실마리를 얻었다. 누군가는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행복해한단다. 나보다 낮은 자리의 타인을 보면서 우월감을 느끼고 용기를 얻는단다. 나는 그런 시선이 저열하다고 생각한다. 아량을 베풀어 ‘생각’할 수는 있지만, 입 밖으로 뱉는 건 다른 문제다. 건강한 누군가가 나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나는 안 아파서 다행이다!’라고 상쾌해할 모습을 상상하면 배알이 뒤틀린다. 그래서 ‘최근’ 이후로 이걸 쓸 맛이 안 났다.


누군가 내 에세이를 읽으며 ‘건강은 정말 소중한 거야’라든가 ‘이런 사람도 열심히 사는데 나도 열심히’ 따위의 감상을 얻는다니? 존나 짜증난다. 이게 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아프리카 불쌍한 아이들보다 낫고 어쩌고 타령을 해댄 어른들 탓이다. 남의 불행을 보며 행복해하는 자신이… 창피하지 않냐? 그러나 내 어린 시절에는 수치심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어른들이 수도 없이 존재했다. 아마 지금도 살아있을지 모른다. 신이시여!


나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언젠가 기독교 신자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산단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잘 기억이 안 나는 종교적인 용어)를 하고 어쩌고 하며 참회해야 한댔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하여 참회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적극 동의한다. 저런 생각을 하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아무 데나 참회하면서 반성을 하란 말이다. 죄인 줄 몰랐다면 무지에 대하여 참회하라.


남이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보리라고 가정하니 역겹다. 근데 정말로 그런 인간이 있을까? 왜 그러고 살지? 역겨워서 다른 이야기를 쓰자니, 또 아픈 것 말고는 이야깃거리가 없다. 그것마저 짜증난다. 근래 내가 정신병자라는 사실을 통감하는 중이다. 디아제팜두셀라캡슐익셀캡슐알프람졸피람큐로켈루나팜데파스정 그리고 인데놀의 가호가 없었더라면, 나는 1호선 광인처럼 아무에게나 증오를 터뜨리고 고함을 지르고 때로는 오열했을 것이다.


저열한 자들을 위해 잘 사는 얘기도 종종 써야겠다. 잘 사는 얘기 할 만한 카테고리, 아니 브런치에서는 매거진이었나, 하나쯤 개설할까. 환자는 불쌍하다는 편견을 깨고 싶어 하리라는 편견을 깨고 싶다. 실은 무엇이든 깨고 싶다. 지금도 뭔가 부수고자 하는 욕구가 치솟는다. 나는 일전에 정신병이 도져서(이보다 나은 표현을 찾을 수가 없다), 손거울과 물컵과 백일장 상패를 골고루 해 먹었다. 유리 재질로 보였던 상패는 예상보다 단단해서, 받침대와 상패 부분을 분리하는 데에 그쳤다.


그래서 투병하는 에세이 쓰기 싫다. 아직 써야 할 이야기가 여러 개 남았는데, 쓸 이야깃거리는 늘어나기만 한다. 섬유근육통이 현재 진행형이라서 그렇다. 이 좆같은 병은 언제 나를 놓아줄까.


질병이 나를 싫어하는 만큼 나도 질병을 싫어하고 싶다. 나는 섬유근육통이 진심으로 싫다. 골판지 상자에서 튀어나오는 그리마만큼이나 싫다. 오늘 상담 선생님께서 섬유근육통을 가진 채로 삶을 영위하는 방향을 고려해보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아파서 기능하지 않는 몸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거나. 나는 씨발… 싫다. 고려조차 싫다. 상상도 하기 싫다. 물론, 씨발 싫어요! 라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회화가 잘 된 정신병자라서.


‘앓느니 죽지’라는 속담이 있다. 속담의 속뜻이고 나발이고. 나는 자주, 앓느니 죽고 싶다. 그런데 가끔은 살고도 싶다.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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