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롯이 대학생으로 살기 시작했다. 지금이 아니면 하지못할, 그리고 못해서 후회할 순간조차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결정적 순간
18년 초, 군대에서 막 전역할 무렵 자활근로자와 공생하는 스타트업을 창업한 친형을 계기로 창업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승승장구한 형과는 반대로 끊임없는 고민과 회의로 이어진 나의 첫 아이디어는 말 그대로 바닥이었다. 다만 여러 선배 창업자들과의 대화, 각종 대회와 더불어 가까이서 사회적기업의 시작부터 성공까지 간접적 경험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폐소방복을 업사이클링해 판매한 수익금 1000만원을 질병으로 돌아가진 고 김범석 소방관님의 국가대상 소송비로 지원했던 ‘119REO’, 나의 팀과 성과는 아니었지만 조금씩 바뀌어가는 소방관에 대한 시선과 진실, 그리고 소방관님의 가족들을 보며 내가 대학생으로써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날이 내 인생 처음 자발적으로 가슴이 뛴 순간이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창업동아리에서는 약 1년도 못채운 채 나오게 되었지만, 여전히 뛰는 가슴과 열정을 가득히 가져올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과연 누군가의 삶에, 그리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건 무엇일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발휘할 수 있다면, 조금씩 나의 강점을 찾아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행복한 대학생활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때부터 이어진 여러가지 봉사활동을 시작으로, 아동복지센터에서의 코딩교육, 미얀마로의 해외봉사, 고등학생을 위한 전공설명연사까지 다양하게 경험하고 부딪혀 볼 수 있었다. 결코 나의 취업을 위한 길은 아니었다. 단지, 이력서의 한줄을 채워넣기 위해 짧게는 3개월, 길게는 4년까지 나의 열정을 털어넣을 순 없었다. 강당에서 마이크를 잡은 순간 또렷하고 반짝거리는 눈빛을 한 포항고등학교 2학년 친구들을 잊지 못한다. 봉사란 결코 단방향의 지식이동이 아닌 쌍방향의 소통이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내가 잘할 수 있는건 누군가를 만나고 좀 더 나은 어떤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뿌리깊은 행복을 느끼는 것 이었다.
대학생활의 끝, 나의 열정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나의 열정어린 6년간의 대학생활의 결실로, 반도체산업의 기업에 ‘양산관리자’로의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공대생이면서 공대생같지 않은 여러 경험으로 한때는 스타트업을 꿈꾸기도 했었고, 잠깐이지만 제주도 소품샵에서 사진작가로 일하며 온라인쇼핑몰 사업을 꿈꿨었다. 그럼에도 다시 돌아 기업으로 가야만 했던 이유는 나름의 타협점이었다. 열정적이었던과 동시에 한구석에 안정적인 직장과 가정을 꾸리고 싶은 이중적인 내면의 모습이 서로 충돌하여 약 1년간의 방황아닌 방황을 겪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내린 결론은 새로운 도전이자 안정적인 성찰의 시간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 평범하지 않은 대학생활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의 도착지는 남들과 같을지언정, 분명 용기를 내야하는 순간 혹은 나의 다른 내면적 욕구가 탄생하기 위한 씨앗들이 땅 속에서 깨어날 무렵엔 큰 차이를 가져올 것이라 믿는다.
창업동아리에서의 첫 구덩이로, 난 그 순간의 삶에 집중하게 되었다. 나태와 게으름보다는 매 순간 내 신분으로써 부딪힐 수 있는 것들을 찾았고 그것이 없을땐 스스로 그러한 환경에 놓여질 수 있도록 환경설정을 하기도 했다. 모든 순간에서 완벽하진 않았지만, 조금씩 더 깊은 구덩이를 경험하며 난 스스로 그 깊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음을 체감하고 더욱 큰 용기를 내어 발걸음을 내딪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