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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summersea Mar 13. 2023

자격증 없는 미용사

퍼스널 디자이너.

  대학원생은 본인 연구 빼고 다 재미있는 것 같다. 다들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시험기간에는 벽지 무늬만 봐도 흥미롭던 순간. 대학원생의 일상은 늘 시험기간인 듯하다.


  머리가 짧은 남성들은 미용실에 자주 가야 한다. 여성 커트 비용보다 남성 커트 비용이 당장에는 저렴하지만 자르는 주기를 생각해 보면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소비자 측면에서는 커트 비용이 너무 비싸다). 구 남친, 현 남편은 당시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미용실에 가는 것을 귀찮아했다. 흥미로운 일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자격증 없이 헤어 디자이너 행세를 한 적이 많다. 나의 주 고객님은 엄마였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흰머리를 염색해 드렸다. 작은 식탁용 거울을 앞어두고 엄마는 바닥에 앉고 나는 소파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꼼꼼히 염색약을 도포했다. 엄마는 검은색 염색약이 혹여나 옷에 묻을까 염색약 박스에 같이 딸려온 흰색 비닐 염색보를 얼굴만 남겨두고 두르셨다. 하지만 난 늘 엄마 얼굴에 염색약을 묻히고 닦아주기 바빴다. 그래도 사용 설명서에 명시한 것처럼만 행동하면 나쁘지 않은 결과가 나왔었다.


  커트는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끔 자르는 앞머리도 이상할 때가 많아 커트만큼은 미용실에 방문했다. 남성 커트는 비교적 시간이 덜 들어 데이트 코스 중에 포함하여 구경하기도 했다. 그런데 구 남친이 나에게 머리는 다시 자랄 거니 망쳐도 괜찮다는 완벽한 보험과 함께 본인 머리를 잘라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흥미로운 제안에 당장 미용 가위, 바리캉, 그리고 자잘한 제품들을 구매했다.


  옥탑방에 살았던 구 남친의 집 옥상이 나의 첫 커트 데뷔장소였다. 엄마의 염색을 도와줄 때와 비슷한 구조로 전신 거울을 밖으로 꺼내 들고 나와 의자 앞에 두어 나름 미용실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수 없이 예습한 유튜브를 기억해 나가며 커트를 시작했다. 30분이 넘도록 망칠까 봐 두려워서 그런지 바라캉의 진동 때문인지 모르게 손을 덜덜 떨어댔다.


  처음이 힘들고 두렵지 점차 커트에 익숙해졌다. 공짜로 잘라 주던 머리는 익숙해질 때쯤 그 돈이 그 돈이지만 느낌을 내고 싶어 5천 원을 받으며 잘라줬다. 찾으시는 디자이너가 있냐는 상황극을 연출하고 싶어 ’Summer‘의 앞 글자를 따와 ‘에스 디자이너’로 불러 달라했다. 머리를 잘라준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본가에도 미용실을 가기 귀찮아하시는 남성분 (아빠) 헤어 커트를 담당했다. 아빠는 서울에서 공부하는 귀한 박사생이 멀리까지 와서 머리를 잘라 준다며 교통비와 커트 비용까지 선사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미용사 자격증 없이 퍼스널 디자이너가 되었다.




  다른 사람 머리만 만지다 어느 날 감당 할 수 없이 길어진 내 머리가 보였다. 다시 유튜브에 들어가 이번엔 ‘셀프 컷’을 예습했다. 서걱서걱 가위질을 몇 번 하고 나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나의 퍼스널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역시 연구 빼고 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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