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할 편지

그림을 위해 쓰는 글

by 유세리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느덧 새해가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났어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사실 우리는 서로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죠. 서로 보여주고 싶은 만큼의 자기 삶을 보이는 작은 창이 있으니까요. 무얼 먹었는지, 어딜 다녀왔는지 하는 소소한 자신의 기억들을 남길 수 있는 곳이요.

아시다시피 전 잠시 여행을 다녀왔어요. 처음 가보는 곳, 그래서 더욱 가고 싶어 졌던 곳, 동네방네 나 여기에 간다며 자랑한 곳이었죠. 그곳에 가면 나는 뭐든 하겠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좀 더 도전적으로 다녀보자 하는 생각을 가기 전에 했었거든요. 그런데 왜일까요, 그렇게 설렌 마음으로 여행지에 갔는데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평소처럼 무작정 걷기만 하고, 마음에 드는 풍경이 있으면 사진을 찍고, 배가 고프면 식사를 하러 가고… 늘 하던 정도만 했어요. 전시장에 가서 그림에 집중하지 못하고, 본 적 없던 풍경을 보는 게 참 좋지만 이 감정으로는 부족하다 싶고, 외국어를 잘하지 못해서 더 집중을 못하나 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남들은 일을 열심히 하다 잠시 쉬러 가는 게 여행이지만 저에게는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무언가를 얻어가야만 할 것 같거든요. 하지만 제 감성은 새로운 것을 끌어올리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저는 이번 여행에서 또다시 한계를 느꼈어요.

그래서일까요, 한국에 와서도 여러 날을 멍하니 지내고 있어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여행 때문에 삶을 버티듯이 지내고 여행지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변한 거라곤 갈색에 가까워진 피부색이 전부였어요. 제 내면은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어요. 겨우 3주 동안 바뀌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다 하는 변명을 할 수도 있지만, 저는 3주가 아닌 그동안 제 평생을 떠올렸어요. 재작년도 작년도 올해도 난 변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자꾸 과거를 들춰 못났던 모습만 뒤적거리고 있어요. 남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저는 어릴 때 그대로지요.


선생님, 저는 아직 어려 보인다는 소리를 듣기에는 젊은 나이지만 그런 얘기를 종종 듣곤 해요. 신분증 검사를 하면 생각보다 나이가 있네요 라며 신분증을 돌려주는 놀란 얼굴의 술집 사장님들이 있어요. 전에는 그런 말이 좋았는데 지금은 글쎄요, 마치 어른이 되지 않는 피터팬처럼 철없는 내 정신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요. 부끄러워져요. 여전히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걸 저 스스로 알고 있으니까요.

저는 점점 더 예민해지고 있어요. 작업을 하느라 생긴 작업 정신이 아니라, 그저 나를 방어하기 위해 뻗어 나는 가시가 점점 많아져요. 남이 나를 공격할 수 없게 내가 먼저 남을 따끔거리게 하는 거죠. 나에게 잘못한 게 없는 사람에게 사과를 받기도 해요. 남이 지나가면서 말한 별 거 아닌 말을 계속 곱씹으며 키운 상처도 많아요. 겉에는 가시가, 마음속에는 검은 멍이 가득한 채로,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거의 없는데 늘 상처 받은 것처럼 살아가요. 좋지 않은 양분인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 방법으로만 살아가고 있어요.


선생님, 저도 변할 수 있을까요? 저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요즘에는 밤에 잠드는 게 무서워요.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무서워요. 뭐 할 거냐는 질문을 받는 게 무서워요. 제 앞에 수많은 그림 도구들이 한없이 부족해 보여요. 책을 읽기만 하고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지 못하는 제 모습에 절망하고 말아요. 올해 저는 어떤 걸 붙잡고 한 해를 살아가게 될까요. 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