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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보철 Nov 03. 2023

방랑의 여정

-태초의 말씀이 있기 전에, 태초에 침묵이 있었다.


-태초의 말씀이 있기 전에, 태초에 침묵이 있었다.


-그는 떠나가 버렸다


“He was gone.”


그 목소리는 어린 소녀가 내뱉기에는 가당치 않았다. 너무도 무미건조한 어조였다. 그러나 나는 스쳐지는 주변의 황량한 풍경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시선을 돌렸다.

차창 밖으로는 수만 년, 아니 수백만 전의 모습을 고이 간직한 붉은 땅, 붉은 언덕, 붉은 산이 연이어 펼쳐지고 있었다. 꽃향기는커녕, 풀 한 포기 보기가 힘들 것 같은 삭막한 풍경이다. 그곳에는 정오의 태양이 사정없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무자비한 폭격이다. 붉은 땅은 태양의 열기를 좀처럼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태고의 모습이 이런 모습일까?’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택시 안은 이내 조용해졌고, 엔진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러시아 소녀들과의 대화도 끊겼다. 말이 그치자 차 안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침묵이 시작됐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 전의 소녀의 말이 비로소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침묵이 깃들 때 말은 본래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간다. 말이 생기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소녀의 말이 주는 무게에 눌려 대꾸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덩달아 대꾸할 시기를 놓쳐버렸다. 적막감이 내리누르고 있는 가운데 합승 택시는 목적지를 향해 질주했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에서 만년설이 보인다는 얘기는 건너건너 들었다. 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동화 같은 사랑 얘기도 있을 것이고, 세상을 호령하는 영웅신화가 꿈틀거리는 곳이라고 나름의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러나 내가 호수에 가고 싶다는 열망을 품은 것은 그런 동화와 신화 때문만은 아니다. 세상이 탄생하기 전 떠도는 말들을 가둬놓은 곳, 만년설로 이루어진 호수에 깃든 침묵 때문이었다. 태곳적 침묵에 대한 동경이 나를 호수로 이끈 것이다.


성서에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태초의 말씀은 창조다. 우주적 대격변이다. 그러나 말씀이 있기 전에 침묵이 있었다. 태곳적 침묵이다. 고로 침묵에서 모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침묵을 간절히 원했던 것은 바로 변화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변화하지 않는 삶은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 미지의 힘이 나를 유혹했다. 그 유혹은 강렬했다.


지난 10월, 나는 비행기 티케팅을 불쑥 해버렸다. 도착한 곳은 이식쿨호수. 우즈베키스탄에서 비행기로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로 이동하고, 곧바로 택시로 이식쿨호수까지 달려온 것이다. 비슈케크에서 이식쿨호수가 있는 도시 ‘촐폰아타 ’까지는 택시로 대략 다섯 시간이 걸렸다.


제주도의 4배 크기가 말해주듯 이식쿨호수는 바다다. 호수임에도 불구, 수평선이 바라보인다.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산정호수이다. 호수에서 바라보면 톈산산맥의 만년설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의 하얀색 부문이 만년설이다. 놀라운 것은 톈산 산맥의 만년설이 녹아서 흘러내린 물로 호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비슈케크에서 이식쿨 호수로 가는 택시 합승 승객들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러시아 소녀와 그 친구가 내린 뒤에서야 나는 숙소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는 그만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급히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나는 택시 기사에게 부탁했다. 기사분이 잘 아는 호텔로 데려가 달라고 얘기했다. 기사가 안내한 호텔에는 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9월에는 관광 철이 끝난단다. 따라서 10월의 호텔은 한산했다. 무작정 호텔 직원을 기다리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나는 택시 타고 오면서 지나쳤던 게스트하우스를 기억했다.



게스트형 호텔은 난방이 안 됐다. 이불을 푹 뒤집어써도 냉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밤새 선잠을 잔 기억이 난다. 위안이 되는 것은 숙소가 호수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호텔 앞에 공원이 있고 공원을 가로지르면 곧바로 호수와 마주쳤다.


숙소에서 짐을 풀자마자 나는 호수를 찾았다. 호수는 내게 너무도 익숙했다. 낯선 곳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예전에 여기에 왔었을 것이다. 아마 수만 년 전, 수백만 전의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하다는 듯이 모래밭에 주저앉았다. 나는 모래 위에서 마냥 앉아서 호수를 가로지르는 태양의 궤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호수가 깔아주는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멀리서 만년설이 하얀색에서 회색으로 변해가자 호숫물이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마 못 가서 호수의 모래마저 검게 물들어갔다. 어둠이 곧바로 짙게 깔린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데는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야 할 만큼 주변은 순식간에 칠흑처럼 변해버렸다.



호수의 칠흑 같은 어둠은 나의 마음과 같다.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말들의 창고이다. 내 마음속에는 지키지 못할 말들로 꽉 차 있다. 그것들은 허황된 말들이다. 허황되다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 실체가 없는 것은 생명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즉 내 마음은 말들이 죽어있는 채로 꽉 차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말하는 것에 대한 고통을 느꼈다. 나는 죽어버린 말을 쏟아놓고 나면 덫에 걸렸다는 것을 수없이 느꼈었다. 나의 내면에는 패배감만 쌓여갔다. 말을 하면 할수록 내 영혼에 생채기가 나는 것 같았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내 마음을 비우고 싶었다. 죽은 말들의 사체가 빽빽이 쌓여 있는 마음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다. 말들이 사라진 나의 내면에는 침묵이 자리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틈만 보이면 죽은 말들이 침묵을 비집고 들어와 마음의 한 곳을 차지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 마음은 그만큼 죽은 말들에 대해 취약한 것이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뜻 떠오르는 것은 심재이다. ‘장자’ ‘내편’에 따르면 공자가 안회에게 심재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나아가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야 한다. 기라는 것은 허(虛)의 상태이다. 허가 심재(心齋)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심재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며, 그 빈 공간에 커다란 질서가 자리한다는 말이다. 죽은 말들에게 내줄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심재의 경지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마음을 버릴 것이다. 잡다한 이유와 합리, 궤변으로 가득 찬 마음을 이식쿨호수 깊이 수장시켜버릴 것이다.


다음날 새벽 밖이 밝아지기 직전, 나는 다시 호수를 찾았다. 호수에는 물새들이 있다. 바다의 기러기들과는 모양새가 비슷하면서 조금 다르다. 물새의 이름은 모르겠다. 호수에 발을 담그고 있는 하얀 새는 미동도 없다. 미동도 없는 새들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호수에 발을 적셨다.


물속은 투명하다. 투명하다 못해 푸르도록 시리다. 비록 호수에 빠진 것은 발목이지만 나의 온몸이 호수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전달된다. 청량한 기운이 발바닥을 통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호수는 투명한 거울이다. 명경지수란 옛말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옛 선인들은 명경지수에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살았다. 호수의 명경지수는 마음까지 비추는가 보다.


호수에 내 얼굴을 비춰본다. 초라한 얼굴이 드러난다. 삶에 찌든 얼굴이다. 가면을 벗어던진 얼굴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내 삶의 비밀을 들킨 느낌이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희열을 느꼈다. 온몸에 전율이 인다. 동시에 나를 여기로 이끈 미지의 힘에 감탄했다. 미지의 힘은 영혼이 지르는 비명일 것이다.  그 비명은 내  삶에 대한 절실함의 계시다.


방랑은 감탄하는 것이다. 방랑(wandering)과 감탄(wonder)은 같은 어원에서 출발했다. 방랑자는 날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방랑하면 할수록 더욱더 경이에 차게 된다. 그리고 경이는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다음날 정오가 다가오기 전에 나는 숙소를 나설 준비를 했다. 이제는 이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다. 나는 하루 24시간도 채 머물지 못할 이식쿨호수를 무엇이 급하다고 서둘러서 왔을까? 해야 할 일들을 제쳐두고 이곳에 왜 왔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 전에 먼저  체크해야할 의문이 있다. 그것은 소녀와의 만남이다.


어떤 운명의 신이 나와 소녀를 만나게 했을까? 이제야 고백건대, 나는 버스를 타고 있다가 출발 직전에 내려 합승 택시를 찾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소녀와 나는 같은 합승 택시를 탄 것이다.


어린 소녀, 리자 얘기를 해야겠다. 택시를 합승한 러시아 소녀의 이름이 리자이다.  그녀는 같은 처지의 친구와 처음으로 이식쿨호수에 가는 길이었다.

리자의 운명은 기구하다. 1년 전에 전쟁을 피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비슈케크로 피난을 왔다. 지난 1년 동안 리자는 많은 일들을 겪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중병을 앓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서 터키계 회사에서 패션디자이너로 일한 그녀지만 비슈케크에서는 그에 걸맞은 일거리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집안의 생계를 짊어져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친구가 자신에게서 돌아섰다는 것이다. 굳이 남자의 변신을 들자면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리자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He was gone.’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그 남자가 따났다는 말을 했다. 그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는 떠나가 버린 것으로 나는 해석했다. 사라진 것은 본인이 그를 아직 잊지 못한 것이고, 떠나가버린 것은 본인의 마음에서 그의 자취마저 없애버린 것이다.


떠나가 버린 것은 돌아오는 길을 아예 차단한 것이다. 과거 역시 다시 오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리자는 극도로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를 버리지 못한다. 좌절했다가 다시 희망을 찾고, 또다시 좌절하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의 어려움을 빗대,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미련을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리자는 이틀 휴가를 받아 난생처음으로 이식쿨호수에 간다고 했다. 이식쿨호수에 대한 전설은 이미 익히 들었다. 태고의 침묵이 잠든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담컨대 그녀는 모든 과거를 이식쿨호수에 던져버렸을 것이다.


깨달음은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리자는 22살의 어린 나이지만 지금 이 순간을 얘기하고 있다. 그런 삶은 깨달은 자의 삶이다.


태고의 침묵을 간직한 호수는 거울이다. 거울은 지금 이 순간만을 비춘다, 지나간 것은 비추지 않는다. 아직 오지 않은 것 또한 비추지 않는다.  거울은 ‘오늘 말고 내일 비춰 주겠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일은 절대 오지 않는다. 따라서 내일 할 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내일은 기다림만 있을 뿐이다.진정한 삶은 내일에 없는 것이다. 일부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년왕국은 환상에 불과하다. 천년왕국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이지 영원히 기다려야 할 내일에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내일을 기대하는 것은 그러므로 지키지 못할 말들이다. 죽은 시대와 죽은 말들로 마음의 창고를 가득 채워서는 안 된다. 마음을 비운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내일이 없다면 어제도 없다. 어제는 지나간 것, 다시 오지 않는다.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알고도 쉽게 넘어가려 한다. 삶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He was gone.’


내게 He는 Everything(모든 것)이다. 모든 것을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떠나보낸 마음에는 침묵이 자리할 것이다.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침묵해도 마음으로  끊임없이 지껄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나의 경우만 해도 그러하다. 마음은 무엇을 하든지 항상 이유를 단다. 그러나 모든 이유는 거짓이며, 합리화일 뿐이다.


침묵은 몸과 마음의 평정이다. 나아가 영혼과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다. 요동치는 삶의 현장에서 차분하게 자아를 지켜보는 자의 경지이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침묵의 소리에  나의 마음은 점점 열려지고 있다는것을 직감한다. 이식쿨호수여정은 침묵의 화두와 함께한 것이다. 화두는 아직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나의 마음에서 모든 것을 추방할 수 있을 것인가?'


이식쿨 호수에서 나의 몸은 돌아왔지만  나의 여정은 아직 진행 중이다.  


이식쿨호수여정 중 나는 줄곧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피아노 연주곡 ‘가을을 속삭임’을 들었다. 지금도 듣고 있다. 그러나 가을의 속삭임이 그치는 날, 나는 진정으로 이렇게 말 할 것이다. 드라이한 목소리로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 할 것이다.


“He was g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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