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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보철 Aug 28. 2023

방랑의 여정- -‘허영’이 파괴된 자리

새벽 2시의 ‘므깃도 언덕’


풍만한 몸매의 여인은 육감적이다.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수로에서 머리를 감는다. 수로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능수버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이곳에서 능수버들을 처음 보았다.


수로를 흐르는 물줄기는 매우 급하다.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유속이 빠르다. 수로를 따라 걸음의 속도를 높이다 보면 10분 후에 아파트 입구가 보인다. 아파트 입구의 살구나무는 내게는 이색적이다.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것이 신기하게 보였지만 이곳 사람들 아무도 살구를 따지 않는다.


시내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숙소를 구했다. 한국인들, 특히 한국 관광객들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낯선 곳이다. 신혼부부 등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단지, 내가 머무는 1층 창문을 열면 4평 남짓한 조그만 상가가 보이고, 그 뒤로 놀이터가 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은 상가 건너 아이들의 함성으로 곧바로 알 수 있다. 밤 11시 늦은 시간까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숙소를 나서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들이 많다. “까레아”라고 말하면 함빡 웃으면서 ‘엄지 척’한다. 그들의 호기심을 뒤로한 채 멀찍이 외따로 의자에 앉는다. 시원한 밤바람이 온몸을 휘젓는다. 바람에 몸이 붕붕 뜨는 기분이다. 바람 부는 대로 생각도 흐른다. 생각이라는 것은 흩날리는 낙엽인 것 같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잎새를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나는 나를 놓아버린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눈을 감는다. 주변 사람들의 소리가 속속 귀를 들려온다. 나는 이내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깜짝 놀란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우즈베키스탄 언어를 이해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덩달아 조금 전까지 명확히 알아들었던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 그리고 어른들의 담소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나는 방금 전까지 분명히 그들의 얘기를 듣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하나의 흥미로운 해석은 내가 방랑자라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방랑자는 경계 선상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삶의 주변부에 살면서 경계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이다. 나는 한순간 현실의 경계선을 넘나들었을 것이다. 경계선을 넘는 것은 매혹적인 경험이다. 이전까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현지인의 언어를 한순간에 듣고 이해할 수도 있다.


밤이 이슥해지자 아이들의 소리도 잦아들었다. 이제는 숙소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트로이카’의 연주를 들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구슬프게 울리는 발랄라이카의 선율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이렇듯 낯선 이야기들로 꾸며진 달콤한 시간을 남겨두고 타슈켄트의 여름밤은 서서히 고개를 떨군다.   


낯선 곳에 가면 나는 가끔 이런 생각 한다. 내가 이곳에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낡은 집, 특히 먼지가 낀 창문, 허술하지만 대문이 굳게 닫힌 집을 보게 되면 마음이 설레곤 했다. 낯선 곳, 낯선 집에서 타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그려본다. 물론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던지고 하는 생각이다. 내가 아닌 다른 의지를 품은 또 다른 나는 무엇을 꿈꾸며 살아갈까?


첫 번째 충동은 20여 년 전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버스에 탄 채 충남의 한 시골 도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버스에서 당장 뛰쳐 내리고 싶었다. 길가에 허름한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또 다른 내가 보였기 때문이다.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른 것은 책임이었다. 이후에도 이봐 비슷한 충동이 일 때마다 책임은 동시에 나의 행동을 막았다. 책임은 매번 명목을 달리하면서 충동을 달랬다.


20여 년 전의 책임은 출장이었다. 책임이라는 핑계는 다양했다. 사람들 간의 관계, 약속, 연민, 우정, 정의, 금전 등 다양했다. 이런 다양한 이름의 책임은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책임은 그 어떤 가치보다 내게 우선이었다.


그러나 이제서야 고백건대 20여 전, 그날 이후 무언지 모를 두려움에 압도되어 나는 계속해서 버스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다. 책임은 명목상의 얘기이고, 우선은 두려웠기 때문이다. ‘두려움’, 그놈의 정체에서 벗어날 길이 도무지 않았다. 책과 강연 등 세상에서 제시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모든 방법은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언제 버스에서 내릴수 있을까?


배낭을 다시 꾸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유리 작업실 한 귀퉁이는 풀지 않은 배낭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떠나는 전날 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나의 영혼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눈물은 이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어떠한 상황에 부닥쳐지더라도 소리 내서 울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떠나는 날, 아이는 수술을 받고 퇴원했다. 아이는 ‘괜찮다’라고 했다. 부축을 받은 채 지하실 계단을 목발을 짚고 한발 한발 내려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뒷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눈이 시리다. 펑펑 눈이 내리는 날, 사냥꾼의 추격을 피해 다리를 절며 도망가는 새끼 사슴의 모습이 그날 아이 이 뒷모습과 겹쳐진다.


숲속에 쌓인 하얀 눈밭에 선명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있고, 새끼 사슴은 온 힘을 다해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살기 위해서이다. 산다는 것, 즉 삶은 정의, 자유, 사랑 등 어떠한 가치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삶은 모든 가치의 총합보다 위대하다.


삶은 몸으로 부딪히는 현실이다. 몸으로 겪는 것이 아니라면 삶은 ‘생각의 유희’에 불과하다. 생각의 유희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 아니라, 이미 탈색된 이미지의 연속이다. 그것은 수없이 반복되는 아이들의 시간처럼 무의미하다. 무의미한 시간 낭비는 한마디로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 번 더,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아직도 목발을 짚고 계단을 내려가는 아이의 뒷모습에 눈시울을 붉힌다면 나의 삶은 생각의 유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아이의 고통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온몸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던 아이의 삶에 대한 경의가 아니다.


신약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찾아온 손님을 분주히 접대하는 마르타의 얘기가 나온다. 자매는 사고하는 인간과 행동하는 인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어느 쪽의 삶이 우위에 있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선택의 결과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오롯이 자신의 책임이다. 나는 그동안 마리아의 길을 걸어왔다. 마리아의 길을 선택한 것이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게 주어진 환경을 무시한 채 현실과 괴리, 균형 잡히지 않는 생각에 빠져들어서 ‘관념과 의식의 놀이’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것은 아주 중대한 실책이었다.


지나고 보니 삶은 놀이터가 아니었다. 운명의 신이 나를 떨궈놓은 전쟁터였다. 생과 사의 전쟁터였다. 선과 악의 최후의 싸움터, 아마겟돈에 못지않은 치열한 전쟁터였다. 그럼에도 불구, 나는 아이들의 놀이에 치중했다. 긴긴 삶의 시간을 허무하게 낭비해버린 것이다.


시간을 낭비한 자에게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존재하는 자에게는 자유는 위대한 가치이다. 나 역시 자유는 평생의 가치였다. 그러나 나의 자유는 ‘생각 뿐의 자유’였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만 남아 있는 자유라는 말이다. 그림자의 자유는 허망하다. 나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행동에 나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직 생각의 유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스스로 무덤에 이런 문구를 새겼다. 누가 감히 자신의 삶을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당당한 선언이다. 자신의 언어에 충실한 삶의 시간을 보낸 사람만이 이런 선언을 할 자격이 주어진다. 허언의 종말, 삶과 언어의 일치는 진정한 존재의 삶이다.


이제 삶이다. 삶은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둘 중 하나다. 가운데가 없다. 적당히 아름답고 적당히 추한 삶은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적당히’라는 말은 허언이다.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나의 삶은 추하다. 나의 언어와 삶이 일치하지 못했다. 생각의 유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생각의 유희에 젖어 있는 삶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후회만 가득 남는다. 이러한 삶은 필요시 과감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못한다면, 이는 불구의 삶이다. 주역에서는 이를 두고, ‘불출문정 흉’,(不出門庭 凶)이라 했다. 제때 문밖에 나가지 않는 삶은 흉하다는 말이다.

   

추하고 흉한 삶에는 형벌이 따른다. 상징적인 단어지만 저승이 기다리고 있다. 저승의 밑바닥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다. 머리 위에는 익은 과일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나뭇가지가 늘어져 있다. 하지만 물도 마시지 못하고 과일도 먹지 못한다. 물을 마시려고 머리를 숙이면 물이 입 아래로 내려가고 과일을 따려 하면 나뭇가지가 위로 올라가 갈증과 기아에 영원히 시달리는 ‘탄탈로스’는 그리스 신화의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형벌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극단적이다. 그러나 이 방법만이 그것을 가능케 할 것이다. 그것은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야 한다. 이는 임제 선사의 화두로, 일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상 시상식장을 뒤집어놓은 연설 중에 나온 한 구절이다.


그들이 살인을 언급했다 해서 내가 반드시 이를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죽여야 한다.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타인이 아니다. 바로 ‘나’다. 추한 삶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 나를 죽이는 생각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한시도 끊이지 않았던 판단이다.


스스로 칼로 목을 베는 것을 수없이 상상했다. 지금도 상상을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나의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 그래서 일단 떠나는 것이다. 돌아오는 열쇠를 깊은 바다에 던져버린 후 떠나는 여정이다.


방랑은 돌아올 수 없는 문턱을 넘는 여정이다. 낯익은 세상과 작별하고, 낯선 세상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는 것이다. 문턱을 넘는 순간 낯익은 영역은 온데간데없고 사방천지에 낯선 의미의 영역이 펼쳐진다. 문턱을 넘는 것은 마법의 순간이다. 마법의 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켜버린다. 그러나 두려움에 젖어 주저하면 마법의 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나는 길고 긴 방랑을 마치고 돌아왔다.”


멋쩍은 선언이다. 방랑은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을 스스로 봉쇄하는 것이다. 돌아온다는 것은 여행이다. 두려움과 마주하지 못하는 자는 결코 방랑을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

  

순간의 문턱에는 타인의 시선이 따라온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타인의 시선에 영향을 받는다. 타인의 시선은 두려움의 또 다른 형태이다.

스승도 위인도 부모님도 결국은 타인이다. 타인의 시선에 따라 사는 삶은 기껏해야 흉내 내는 짓이다. 흉내 내는 삶은 피상적이고, 표면적이다. 멀리서 산의 능선만 바라보고서, 산속의 깊숙한 숲속을 거닐지도 못하고 산이라고 외치는 것과 다름없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은 아무리 보아도 추하다.


사람들은 추한 삶을 무마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것은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다. 그게 허영의 정체이다. 타인의 시선과 내 정체성과의 간격이 허영이다. 즉 나는 이러한데, 타인은 저렇다고 생각하는 차이가 허영이다.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없기에 허영으로 삶을 포장한다. 한마디로 자신의 진성체로 살지 않고 삶을 연기하는 것이다.


허영의 크기는 그 간격의 크기이다. 그 간격이 멀어질수록 나의 삶은 타인의 삶을 흉내 내기에 급급해한다. 그 간격이 깊어질수록 생각의 유희, 관념의 유희, 의식의 유희에 깊이 빠져있다.


진실한 자신의 모습과 타인의 시선 사이가 허영의 자리이다. 그 간극에는 기대와 희망이 놓여 있다. 허영의 영역 속에 자리하고 있는 기대와 희망은 불행하다. 결코, 이루어질 수 기대와 희망이다. 따라서 기대와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속절없이 시간 속에서 무너지고 만다. 카잔차키스와 같은 자신의 삶에 충실한 자는 기대와 희망을 품지 않는다. 그가 기대와 희망을 품었다면 그는 자유를 얘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허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이다. 자신의 크기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허영이 영역에는 인간의 욕망과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 자신의 한계를 넘는 욕구와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과시, 사치, 교만, 나태, 탐욕, 선망, 질투, 자신감, 겸손 등 선악의 모든 것도 허영의 자리에 놓여 있다.


허영이 가득한 곳에는 진실이 오염되기 마련이다. 그 오염된 진실을 먹고 확신은 자란다. 확신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현실 인식의 미약’이다. 확신은 치명적인 병이다. 확신은 우리 편이 아닌 타인에게 적의를 품게 하고, 삶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 특히 전쟁의 역사는 확신하는 자의 그릇된 판단의 결과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간의 전쟁도 확신하는 자의 병폐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시 타슈켄트의 숙소이다. 물이 끊겼다. 잠시 후 전기도 끊겼다. 이곳에서는 가끔 일어나는 일이다. 불평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생수로 얼굴을 대충 씻고 숙소를 나섰다.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바람 한 점 없다. 길가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모자를 쓰지 않았다. 작렬하는 태양은 나의 맨얼굴에 렌즈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같다. 불길은 이내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한치의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길을 걸어갔다.


능수버들의 이파리가 시들하다. 살구 열매도 생기를 잃었다. 오늘 온도가 40도를 오르내리는 것을 애써 기억해냈다. 큰길가로 나왔다. 쌩쌩 지나가는 차량들이 이곳이 죽은 도시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육교에 올라서자 모스크가 보인다. 모스크 위로도 태양은 어김없이 내리쬔다. 내 주변의 모든 곳에는 어김없이 태양이 그 뜨거운 열을 토해내고 있다.


내가 할 일은, 오직 유일한 일은 온몸으로 태양의 열기를 받아내는 것이다.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내리쬐는 태양열을 묵묵히 받아들일 일이다.


그게 삶이다. 내가 추구해야 할 단 하나의 사실적인 삶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쭉 이어갈 삶이다. 삶은 생각으로, 관념으로, 의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온몸으로 부딪히는 것이다. 그게 내가 추구해야만 하는 단 하나의 인생이다. 삶은 ‘이해의 대상’도, ‘생각의 유희 ’도 아니다. 오직 경험해야 할 그 무엇이다.


자유 책임 사랑 우정 애국 등 인간의 모든 가치도 경험의 대상이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경험하고 쟁취하지 않았다면 자유라고 말하지 말라. 책임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러한 말들은 모두 보잘것없는 생각의 나부랭이들이다.


숙소를 나선 지 30여 분 만에 카페에 도착했다. 평소보다도 10여 분 늦었다. 한낮의 더위가 그만큼 발걸음을 늦춘 탓이다.


“아메리카노 홋”


여기서는 ‘핫’을 ‘홋’으로 발음한다. 그런 나를 보면서 카운터의 여인은 미소 띤 얼굴로 묵례한다. 이 또한 인생이다. 인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가벼운 미소 역시 인생이다.


그날 새벽, 나의 모든 삶이 무너졌다.


새벽 2시가 조금 지날 무렵이었다.


“달리는 도중 다리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이는 주저앉았다. 몇 번을 쉬고 걷다가 하면서 가까스레 집에 도착했다. 새벽 3시가 넘을 무렵이었다. 아이는 밤새 끙끙 앓았다. 문 열자마자 찾아간 병원에서는 즉각 수술을 권했다.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었단다.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평생 불구가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아이는 그런데도 망설였다. 촬영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다른 병원을 찾았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아이를 덮쳤다.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아이는 병원을 순례했다. 절뚝거리는 다리에서는 피가 흘렀다. 쌓인 하얀 눈 위로 사슴의 선명한 붉은 피가 스며들 듯, 아이의 다리에서  흐르는 붉은 피가 내 가슴을 젖셨다.


나는 아이에게 부담을 주었다. ‘너에게 기대를 건다’는 식으로 아이에게 속삭였다. 그것은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적당하게 생각하고, 적당히 판단해서 나온 불량은 속삭임이었다.  아이의 성공을 통해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생각에서 나오는 얄퍅한 속삭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허영에 쩔은 판단에서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허영으로 잔뜩 오염된 언어로 아이를 강요한 것이다.


그 속삭임이 아이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아이의 꿈을 산산이 깨버린 것이다. 10년간의 무명생활 끝에 공중파 드라마 주인공을 따낸 아이는 한시도 쉬지 않았다.

아이는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액션 스쿨에 다니면서도 개인 운동을 했다. 그날 새벽에도 어김없이 강북의 우이천 변을 뛰었다. 새벽 2시, 아이는 발목에서 뚝하는 느낌을 받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배역의 성격상 대폭 늘린 몸무게를 아킬레스건이 강한 운동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자신은 ‘괜찮다’라고 했다. 그러나 주변의 기대를 저버린 데 대한 미안함이 가득한 아이의 눈을 보고 나는 절망했다.


‘괜찮다’라고 말하는 아이의 말이 나를 전율케 했다. 나는 내가 싫어졌다. 생각의 유희에 머물고 마는 내 인생이 극도로 미워졌다. 꿈이 부서진 아이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파멸시키고 싶어졌다. 이런 생각은 어제오늘 갑자기 떠오른 것은 아니다. 전쟁터로 나를 몰아가야 했다. 이제부터는 삶은 전쟁터, 아마겟돈이다. 나는 최후의 전쟁을 벌여야 한다.


이스라엘에 가야만 ‘므깃도 언덕’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최후의 전쟁을 벌일 전쟁터 ‘므깃도 언덕’은 곳곳에 펼쳐져 있다. 내가 선악의 싸움을 위해 ‘므깃도 언덕’을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선악은 거론할 가치가 없다. 삶은 이미 선악의 싸움이 아니다.


‘므깃도 언덕’은 오직 삶을 위한 전쟁터이다. 산다는 것은 자유 사랑 평등 우정 애국 등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창하는 모든 가치보다 우위에 있다. 단 제대로 살아야 한다. 제대로 사는 것은 이미지, 또는 그림자가 아닌 실체로 사는 것이다. 생각의 유희에서 벗어난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허영이다. 죽음 앞에서도 ‘나는 자유다’라고 외친 카잔차키스의 삶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허영이다.


내게 므깃도 언덕은 허영과의 치열한 싸움터이다. 나는 그곳에서 허영으로 포장된 나를 반드시 파멸시켜야 할 것이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나를 변모시키는 마법의 순간은 내 삶에서 더 이상 없다. 시간은 내 삶을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허영과 싸움에서는 두 가지 그림이 그려진다. 하나의 그림은 8월의 타슈켄트의 한 낮,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 속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초라한 사내의 모습이다.


이 그림을 다이아몬드와 석탄의 얘기로 돌려보자.


석탄과 동일한 탄소 원소로 구성된 다이아몬드는 가루로 만들면 검은색 가루가 된다. 석탄과 다를 게 없다. 다이아몬드 생성에는 석탄보다 고온 고압의 환경을 수백 년 이상을 더 견뎌야 하는 가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다이아몬드와 석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정체의 문제이다, 석탄의 결정체는 홀 겹이지만, 다이아몬드의 망은 3차원이다, 똑같은 재료이지만 그것으로 설계하는 방식의 차이가 다이아몬드와 석탄을 갈라놓는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이다. 삶의 현실에서 누구에게나 조건은 따른다. 순풍이 불 수도, 태풍이 불 수도, 때로는 역풍이 불 수도 있다. 가혹한 조건이라고 해서 반드시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두 번째 그림은 봄날 살얼음 냇가를 건너는 노자의 모습이다. ‘도덕경 15장’에 나오는 이 그림과 대립하고 있는 대표적인 게 과시이다. 허영의 포장물인 과시는 파멸의 제물이다.


살얼음을 걷는 데는 두 가지 코드가 필요하다. 그것은 조심과 냉정이다. 조심은 모든 일을 하는데 천착하는 것이다. 끝을 볼 때까지 철저히 하는 것이다. 천착에는 ‘중간’ ‘적당히’라는 단어가 낄 자리가 없다. 이를테면 심리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지적 구두쇠’, ‘휴리스틱’, ‘지적 게으름’, ‘클루지’ 같은 용어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심리는 적당히 타협을 보는 심리를 말하는 것으로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냉정 또한 필수적인 요구 사항이다.  언제 어디서라도 절대 들뜨지 말아야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들뜨는 것은 허영의 입김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침묵으로 세상을 대해야 한다. 언어적 쓰레기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침묵은 행동의 영향력을 대폭 증폭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강력한 행동만이 허영으로 찌든 삶을 정화시킬 수 있다.


이제 이 두 가지 그림을 어떻게 이해하고, 행동으로 연결할 것인가? 타슈켄트에서도 새벽 2시에 잠들지 못하는 자의 고민이다.


얘기를 마무리해야겠다. 카뮈의 말을 잠시 빌린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다. 허영이 파괴된 자리에서 외친다.


“나는 자유를 사랑한다. 책임도 존중한다. 그러나 자유와 책임에 맞서서 나는 나의 아이를 보호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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