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
1917의 카메라에 끝내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가 강렬한 롱테이크를 보여주었을 때, 또는 <버드맨>이 한 편의 영화를 하나의 커트로만 구성하는 영화적 실험에 성공하였을 때, 비-디제시스에 있는 관객들을 디제시스로 끌어들이는 롱테이크는 더 이상 낯선 존재의 무엇은 아니었다. 이러한 롱테이크가 하나의 유행이 되었을 때, 오히려 <덩케르크>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시간을 끊임없이 교차편집하는 시간의 마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샘 멘데스의 신작 <1917>은 하나의 영화를 두 개의 커트로 나누어 놓는다. 리허설에만 4개월이라는 시간을 필요하게 했던 원 컨티뉴어스 쇼트의 촬영은 기술적으로 결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샘 맨데스는 롱테이크를 선택한 것에 대하여 "젊은 병사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놓였는지를 직접 느끼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샘 맨데스의 이러한 답변은 임마누엘 루베즈키가 위 언급한 영화들에서 보여주었던 카메라의 활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롱테이크는 편집이라는 기법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디제시스와 비-디제시스 간 시간의 간극을 없앰으로써, 비-디제시스에 놓여있는 관객들을 몰입할 수밖에 없게 한다. <1917>이 보여준 강렬한 생동감은 분명 롱테이크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1917>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 이 답변이 충분치는 않다고 느껴지는 것은 영화가 굳이 두 개의 커트를 분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1917>이 보여준, 하나의 영화를 두 개의 거대한 커트로 나누는 선택, 그동안 집요하게 하나의 쇼트를 유지해오던 영화가 그 순간 쇼트를 나누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자문이다.
전우를 잃은 스코필드(조지 맥케이)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계속 전진한다. 마침내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적진에 도착한 스코필드는 독일군과 총격전을 벌인다. 독일군을 확인 사살하기 위해 그는 버려진 건물에 들어서고, 그 군인이 있는 방의 문을 열어젖힌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상대방으로부터 총알이 날아오고, 스코필드는 계단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암전과 함께 70여 분간 이어오던 쇼트는 전환된다. 두 개의 쇼트는 물론 장소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첫 번째 쇼트는 독일군이 퇴각한 상황에서 영국군의 점령지역 또는 양군 누구도 점령하지 못한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두 번째 쇼트는 영국군인 스코필드가 독일군의 점령지역에 발을 들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 차이는 본질적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 전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쇼트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버드맨>에서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이 방아쇠를 잡아당겼을 때, 한 차례 암전이 발생한다. 이처럼 <1917>의 암전과 <버드맨>의 그것은 동일한 상황에서 발생하지만, 똑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 <1917>에서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를 담아내며 움직이는 카메라가 <버드맨>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1917>의 카메라는 스코필드와 블레이크의 여정을 앞에서 비추거나 뒤에서 쫓아가지만, 기본적으로 전장을 떠돌아다니는 부유물에 가깝다. 전장을 떠돌아다니는 부유물은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처럼 보이는데, 그렇기 때문에 카메라는 종종 자신이 비추어야 할 두 명의 군인으로부터 시선을 빼앗긴다. 부상으로 신음하는 병사에게 시선을 빼앗길 때도 있으며, 두 명의 동선으로부터 이탈하여 자신만의 동선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따라서 영화의 카메라는 인물을 따라다니며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지닌 하나의 인격체이다. 그것은 관객이라는 스크린 바깥의 존재가 응축되어 카메라로 현현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전장에서 숨을 거두었던 수많은 영혼들의 시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블레이크가 독일 공군으로부터 칼에 찔려 죽었을 때에도, 카메라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조명한다. 그런데 스코필드에게 총이 날아온 그 순간, 카메라는 자신의 시점을 스코필드와 갑자기 동일시한다.
영화를 하나의 쇼트로 만들었을 때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문제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는데, 그것은 디제시스의 시간과 비-디제시스의 시간이 근본적으로 다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영화 밖은 두 시간 안팎의 러닝타임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갖고 있는 반면에, 영화 안은 스코필드가 임무를 받고 수행하는 하루의 시간을 담아내야 한다. 따라서 시간을 빨리 감는 방법 등을 제외하고는 영화를 원 쇼트로 가져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성은 두 개의 쇼트에 근본적인 차이를 발생시킨다. 첫 번째 쇼트는 디제시스와 비-디제시스의 시간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에 비해, 두 번째 쇼트는 양자의 축이 미묘하게 뒤틀어져 있다. 영화 밖에서는 60분 남짓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비해, 하나의 쇼트로 진행되는 영화의 안은 한밤중에서 쨍쨍한 낮까지의 시간을 담는다. 첫 번째 쇼트는 샘 맨데스가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강렬한 현장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두 번째 쇼트에서는 시간의 왜곡 때문인지 현장감에 미묘한 환상성이 가미된다.
두 개의 쇼트의 본질적인 차이는 암전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첫 번째 쇼트에서 스코필드가 방문을 열었을 때는 한낮이었는데 비해, 암전 후의 시간은 이미 해가 지고 난 깜깜한 밤이다. 영화는 총알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든지, 계단으로 굴러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든지, 이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일종의 영화적 빙의이기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 쇼트에서 처절한 스코필드와 블레이크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던 카메라는, 암전과 함께 스코필드와 동일시한다. 그 순간부터 스코필드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전쟁이 앗아간 수많은 영혼들이나 스크린 밖에서 그 여정을 함께 했던 관객들의 응원이 응집된 무엇이다.
독일군 진영은 1920년대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가 얼핏 연상이 될 정도로, 이전과는 세트 디자인을 보여준다. 특히 그림자의 크기가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일견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러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총격전이, 참호가 붕괴되는 액션 신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환상성 때문이다. 첫 번째 쇼트의 액션이 임무를 위해 처절히 앞으로 나아가야 했던 몸부림이었다면, 두 번째 쇼트의 액션은 지금까지의 희생이라는 명분으로 반드시 성공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스코필드의 생명은 개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전쟁이 희생시킨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며, 스코필드의 실패는 여태까지의 희생이 무용했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1917>이 보여준 기술에 감탄하면서도, 선뜻 영화에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기인한다. 마지막에 스코필드의 여정을 객석에서 응원하게 하는 것이나, 끝내 그 임무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도하는 것에는 공동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었던 희생이라는 명분의 같은 판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쇼트가 두 번째 쇼트로 자연스럽게 전환될 때, 자연스럽게 공동체라는 이름의 희생이 정당화되는 과정이 스며든다. 폭력은 성공할지 실패할지 확신할 수 없는 여정이 반드시 성공되어야만 하는 무엇인가로 바뀔 때 발생한다. <1917>의 성취에 마냥 박수만을 보낼 수 없는 이유이다.